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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은 영원히

007은 영원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클라이맥스의 대폭발, 사랑을 나눈 후 희열에 젖은 여인들의 “제-에-이-임-스”라는 나지막히 떨리는 속삭임, 수천 마일 떨어진 열대 석호의 게글스러운 창꼬치 사이에 숨어든 음모. 지난 50년 동안 007 영화는 그 모든 액션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제임스 본드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영국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이다.

007 영화 중 가장 참신한 발상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최신작 ‘스카이폴(Skyfall)’에서 본드는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영국 국립 미술관의 벤치에서 평소답지않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in a mood of uncharacteristic pensiveness). 머리를 헝클어뜨린 20대 범생이가 다가와 곁에 앉는다. 그는 자신을 새로운 무기 담당 Q라고 소개한다. 본드는 그 말을 믿기가 어렵다. 지난 50년 동안 일촉즐발의 위기에서 번번이 그를 구해준 그 신기한 무기와 기발한 장치를 발명한 Q가 어떻게 그렇게 어릴 수가?

Q는 늘 그렇듯 본드에게 우아한 007 가방을 건넨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그냥 우아한 가죽 가방인 듯하다. 희한한 일이다. 안에는 달랑 권총 한 자루. “크리스마스도 아닌 데…(Not exactly Christmas, is it?)” 본드가 양말 한다발을 선물로 건네 받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삐죽거리며 말한다. “뭘 바랐어요(What were you expecting)?” 어린Q가 아랫사람 대하듯이 안됐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폭발하는 펜이라도 기대했나요(an exploding pen)?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우린 이제 그런 건 더 안 만들어요(Sorry, we don’t do that anymore).”

‘스카이폴’의 감독 샘 멘데스(‘썬더볼 작전’이 만들어진 1965년에 태어났다)는 흥미진진한 오락성을 손상하지 않고 007 50주년을 기념하려고 그동안의 수많은 추억을 영화에 가득 담았다. 이 영화를 보면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해럴드 맥밀런 영국 총리 시절부터 냉전의 치명적인 고통을 거쳐 사이버테러리즘의 시대까지 이르는 이 영화의 전체를 체험하는 느낌이다.

‘스카이폴’의 한 장면에서 본드는 가장 아끼는 본드카를 몰고 나온다. 1964년 작품 ‘골드핑거’에서 처음 선보였던 애스턴마틴 DB5다. “승차감이 별로야(Not very comfortable, is it?)”라고 M(본드의 상관으로 주디 덴치가 연기한다)이 불평한다. 이제 그녀도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물건들을중시할 나이가 됐다(has gotten to the point where creature comforts matter). “어디로 가나?” “과거로요(Back in time).” 본드(대니얼 크레이그가 연기한다)가 대답한다. 깡마르고 음산해 보이는 그 역시 외로운 회색 늑대의 모습이다(looking bony and haunted like the lone gray wolf he has become).

올해 런던 올림픽 개막식 공연을 지켜봤다면 잘 알겠지만 시간 여행은 영국인들의 집념이다(Time travel is a British obsession). 산업혁명을 그린 그 우스꽝스러운 가장행렬을 돌이켜 보라. 007 영화 역사의 중간쯤(로저 무어가 주연한 작품 중 말기에 해당한다) 어리석은 미래주의가 등장했다.

초고속 모노레일과 영국이 발명한 변변찮은 기술의 과시(1987년 제작된 ‘리빙 데이라이트’에등장한 무용지물의 수직이착륙기 해리어 점프 제트가 대표적이다)는 제임스 본드의 영국이 구식 스타일의 고급 과정을 가르치는 학교 그 이상이라는 점을 세계에 선전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영국의 이미지를 쇄신하려는 그 가상한 노력은 제임스 본드의 영구한 매력을 간과했다. 그 매력이란 살인, 테러, 임박한 파멸적인 핵전쟁의 세계에서 각 시대에 맞게 진화한 가장 영국적인 ‘신사’의 구현(an updated personification of the British “gentleman” in a world of murder, terror, and imminent nuclear annihilation)을 말한다. 특히 완벽하게 재단된 정장과 쿨한 재치를 가리킨다. 본드는 가학적인 악당에게 고문을 당하든 그를 고문하든 그런 말쑥한 모습과 재치를 결코 잃지 않았다. 영국의 두뇌는 언제든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악당들을 격파할 수 있었다(Brit brains could beat doltish megalomania any day).

제임스 본드의 세계에선 우주를 지배하고 싶어하는 변변찮은 인물들의 망상이 늘 깨진다. 1962년 제작된 007 시리즈 제1탄 ‘살인번호’에서 본드(숀 코네리가 연기했다)는 악당 닥터 노의 확대된 수족관 유리벽을 쳐다보며 “실제보다 큰 척하는 작은 물고기들(Little fish pretending to be bigger than they are)”이라고 조롱한다. ‘골드핑거’에서는 악당의 하수인 오드잡이 몸에 맞지 않아 꼴불견인 정장에다 주제 넘게 쓰고 다니던 살인무기 강철 중절모에 오히려 자신이 당한다.

명문 스코틀랜드 페티스 칼리지(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모교)를 나온 본드는 제2탄 ‘위기일발’에서 로버트 쇼가 연기한 멋쟁이 정신이상 살인자 캡틴 내시의 잔꾀에 결코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영국 첩보요원이라는 내시의 주장은 갈수록 거짓말임이 드러난다. 게다가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식당칸에서 레드 와인과 생선을 주문하는 끔찍한 장면(아니, 어떻게 생선에 레드와인을!)에서 그의 위장된 본색이 완전히 들통난다.

본드는 시리즈 원작자 이언 플레밍처럼 고상한 체하는 속물이긴 하지만 결코 따분한 인물은 아니다(Bond, like his literary creator, Ian Fleming, is always a snob but never a bore). 그의 우아한 스타일 집착은 권력과 돈을 둘러싼 음모가 판치는 듯한 급변하는 세계의 거친 상스러움을 물리치는 방패다. 본드의 동화 세계에서는 그런 음모가 전통 깊은 새빌로 정장과 촌철살인의 신랄한 대사로 인해 산산히 무너진다. 살의가 가득한 요부 본드걸들(‘썬더볼 작전’의 피오나 볼프, 17탄 ‘골든아이’의 제니아 오나톱 등)에게 본드는 거친 섹스와 죽음을 안겨준다. 그러나 미치광이에게 억류된 풍만한 미녀들에겐 언제나 자유를 안겨주는 용감한 기사다(he is always the liberating knightgallant).

미국 영화도 가끔씩 그런 시대착오적인 발상(anachronism)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주로 한물간 카우보이로 ‘내일을 향해 쏴라’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에 나오는 반영웅(antiheroes)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미국 영화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흥분을 즐겼다(But America has always been about the rush of the now). 그와 대조적으로 제임스 본드를 포함해 영국의 거의 모든 창의적인 작품은 과거와 미래, 고루함과 쿨함 사이의 대화에서 나왔다(whereas almost everything creative in Britain, Bond included, has come from a dialogue between past and future, the antique and the cool). 비틀스의 ‘사전트 페퍼’를 생각해 보라.

제임스 본드는 대영제국이 무너진 좌절감 속에서 등장했다(James Bond was dreamed up as the British Empire was on its last legs). 처칠이 그랬듯이 영국은 미국의 보호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인식했다. 이언 플레밍은 카리브해 영국 식민지들이 독립하기 전에 자메이카의 창문 없는 빌라(자신이 행정요원으로 참여한 해군의 첩보작전 이름을 따서 ‘골든아이’라고 명명했다)에서 007 시리즈를 썼다.

사라진 제국을 아쉬워하는 영국인들에게 우아한 매력이 가득한 남성적인 영국 스타일이라는 상상의 진통제를 제공했다. 플레밍은 어느 누구보다도 그런 면에서 뛰어났다. 본드에 비하면 그의 작품에 나오는 CIA 요원 펠릭스 라이터는 늘 한발 뒤져 보였다. 본드는 1950년대 말 영국이 위기를 느낀 다른 측면의 해답을 제공하기도 했다. 남성다움의 위축을 말한다(the shrinking manhood department).

탈출하는 전쟁포로나 악조건의 해군 전투 같은 전시 영웅담을 되풀이하는 영화는 소재가 바닥났다. 전쟁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는 탈장대를 하고 맥주 한 잔을 들고 선술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처칠도 나이가 들어 비실거렸다. 그의 후임자들도 의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영국 연극배우 노엘 카워드는 이를 두고 “유럽 대륙은 섹스를 가졌고 영국은 (보온용) 뜨거운 물주머니를 가졌다(Continentals have sex; the British have hot water bottles)”고 표현했다. 그러나 플레밍은 달랐다.

‘독설(cruel mouth)’과 늠름한 태도에다 여성편력이 화려했던 그는 자신의 취향을 본드에게 투영시켰다. 파격적인 사랑행위를 그린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주인공 크리스천 그레이를 마치 메리 포핀스처럼 정숙해 보이게 만드는 에로틱한 채찍의 맛도 즐겼다. 플레밍은 상류층 여인으로 언론 재벌 로더미어 자작과 결혼한 앤 차터리스와 수년 동안 사귀었다. 그녀는 자메이카에서 런던으로 돌아간 뒤 너무도 아쉬운 듯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을 위해 요리하고 당신 곁에서 잠들고 당신에게 채찍 맞기를 너무도 좋아했어요(I loved cooking for you, sleeping beside you, and being whipped by you).”

스파이 소설을 통해 영국의 남성적 무기력함을 탐구한 작가는 플레밍 만이 아니다. 1960년대 초 007 영화 시리즈가 시작됐을 때 첩보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는 냉전시대의 영국 대외정보국 MI6의 어둡고 위험한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그보다 덜 알려졌지만 뛰어난 작가였던 렌 데이턴도 있다. 그의 ‘반항하는’ 첩보요원은 제임스 본드와 완전히 다른 쪽으로 세상 물정에 밝은 오만한 인물이다. 그는 요리로서 만이 아니라 프랑스제 궐련 담배를 피우는 런던 토박이의 태도로 여성들을 유혹한다(데이턴은 양파를 썰거나 치즈 수플레를 만드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남성성이 위협받지는 않는다는 점을 남성에게 설득시키고자 요리책도 여러 권 냈다).

물론 르 카레와 데이턴의 소설도 영화로 만들어졌다. 1965년 나온 두 편의 영화가 대표적이다. 르 카레의 소설을 바탕으로한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와 데이턴의 소설을 각색한 ‘베를린 스파이(The Ipcress File)’다.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에서는 리처드 버튼이 시종일관 우중충하고 냉소적인 우울함 속에서 활동하는 스파이 앨릭 리마스를 연기했다. ‘베를린 스파이’는 MI6의 점잔빼는 요원들을 신랄하게 풍자하면서 쾌활하고 매력적인 마이클 케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너무 소재가 편협하고 영국적이어서 국제 시장에 맞지 않았다.

‘베를린 스파이’의 프로듀서 해리 샐츠먼은 누구보다도 그런 점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1950년대 말 영국에 정착한 캐나다 출생 유대인인 샐츠먼은 영국적 상상이 아니라 냉철한 사회적 사실주의 작품을 전문으로 한 우드폴 영화사의 실세였다.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1960년)’ ‘꿀맛(A Taste of Honey, 1961년)’ ‘장거리 주자의 고독(The Loneliness of the Long Distance Runner, 1962년)’ 등 우드폴 영화사의 모든 작품은 산업사회의 황무지를 배경으로 성, 계급, 절망을 탐구했다.

그 영화들은 제국주의 영광을 잃은 뒤의 숙취, 그리고 이언 플레밍과 제임스 본드가 구현한 구식 자만심에 짓눌린 세대의 심화된 갈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영국의 진정한 현실을 상징했다.그러나 샐츠먼은 구식 예의범절을 던져버린 새로운 영국(롤링 스톤스와 비틀스의 영국, 메리 퀀트의 미니스커트와 카나비 스트리트 나팔바지의 영국)이 뒷골목의 낙태와 금요일 밤 광란의 음주 같은 음침한 드라마보다는 좀 더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무엇을 바란다고 생각하고 007 영화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대중음악, 연극, 잡지 등 어디를 봐도 자기 조롱과 풍자가 만연했다. 나이 든 은퇴자들의 공통점은 영국적이라는 것에 깊은 애정을 가지면서도 그런 면을 조롱하는 능력이었다. 미국에서는 나라를 조롱하며 찬양할 엄두를 내기 어렵지만 영국은 다르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여왕은 최신판 본드걸이 됐다. 애국적인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의 천방지축 같은 면이 과장되기도 했다. 로저 무어가 연기한 변덕스러운 본드가 그랬다. 그의 형편 없는 말장난과 능글맞음 속에서 숀 코네리의 매력적인 악동이 갖는 치명적인 잔혹함은 사라졌다. 시리즈 제6탄 ‘여왕폐하 대작전’은 비극적인 부드러움을 시도했다. 황혼이 바다 위에 걸려 있는 프랑스 해변으로 시작하는 서정적인 장면은 플레밍이 원하면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는 진정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 영화에서 셰익스피어 연극 배우 출신인 다이애나 리그가 그런 정서를 잘 소화했지만 초콜릿 광고에 등장한 뒤 곧바로 본드 역을 맡은 조지 라젠비의 연기력은 수준에 미치지못했다. 그 다음으로 본드 역할을 맡은 티머시 달턴은 라젠비의 연기를 능가했지만 상투적인 각본과 형편 없는 음악, 저예산으로 빛을 못 봤다. 샐츠먼과 그의 파트너 앨버트 브로콜리가 불화로 갈라선 뒤 생긴 긴장 때문이었다.

그 뒤 매력남 피어스 브로스넌과 뛰어난 작가팀(닐 퍼비스와 로버트 웨이드)이 배짱 두둑한 본드의 쾌활함을 되찾았다. 대니얼 크레이그와 그의 007 영화를 맡은 감독들은 더 날렵하고, 더 강하고, 더 어둡고, 더 매서운(leaner, meaner, darker, and harder) 본드를 목표로 삼았다. 물론 본드 특유의 면도날 같은 재치는 그대로 유지했다(But the blade edge of wit without which Bond wouldn’t be Bond is still there).

‘스카이폴’에서 샘 맨데스 감독은 작가팀과 함께 아주 놀라운 일을 해냈다. 본드 시절의 다른 스파이 망령들(해리 파머, 르 카레의 이중첩자들 등)을 모조리 불러내 007 영화를 영국안으로 되돌려 놓았다(액션의 훨씬 많은 부분이 영국에서 펼쳐진다). 007 영화의 표준인 액션도 풍부하지만 이번에는 본드가 늘 취하는 여정의 궤적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역사의 잔해 속으로 향한다. 본드의 숙적 블로펠드보다는 프로이트가 반이상향의 어둠 속에 숨어 있다. 과거를 더듬어 가는 기억은 고아의 고통으로 가득하다.

007만이 아니라 영국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만신창이가 된 영국의 운명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Bloodied and bashed about, where is its destiny supposed to lead these days)? 붕괴하는 유럽은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도 아니다. 미국도 나름대로의 골치 아픈 문제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그래서 영국은 본드처럼 혼자 떨어져 의심으로 가득한 바다를 표류한다(So Britain like Bond seems cut loose, a voyager on a sea of doubt). 그렇다고 제임스 본드나 영국의 이야기가 재미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지금은 그 둘 다의 삶을 무엇인가가 휘젓 고 뒤흔드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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