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부양책에 ‘엔 리스크’ 커져
아베 부양책에 ‘엔 리스크’ 커져
“아베가 돌아왔다.” 3년 3개월 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자민당에 대해 기대 반 우려 반이 섞인 캐츠프레이즈다. 실패해서 물렀나던 정당에 다시 일본 국민이 기대를 거는 것은 이제는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경기를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에서다. 일본 국민 사이에 지지도가 높지 않은 상황에서 자민당이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것은 구관이 명관이지 않느냐는 시각에서다. 그런 만큼 아베 정부는 경기회복이라는 지상명제를 안고 출발하는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대만큼이나 우려를 갖게 하는 것은 출범 이전부터 기치를 높게 세운 극단적인 우경화 경향 때문이다. 이미 센카쿠, 독도 등 영토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 신사참배 등을 강행할 경우 주변국과의 갈등이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경제적으로도 자국만을 생각하는 ‘엔고 저지책’은 글로벌 시대에서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일본 정부 외환시장 적극 개입금융위기 이후 일본경제는 엔화 강세에 내내 시달려 왔다. 전임 노다 정부는 총체적 난국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취약한 재정과 제로 금리로 정책수단이 바닥났다. 이 때문에 일본 기업의 해외진출억제와 경기부양 차원에서 엔화 강세를 저지하기 위해 외환시장 개입에 주력해 왔다.
일본경제는 내수 비중이 다른 나라에 비해 큰편이어서 내수 확대 없이는 디플레이션 국면에서 탈피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내수 부진이 고용과 임금 불안정성 증대, 인구고령화 진전 등 당장 해결하기 곤란한 구조적 요인들에 주로 기인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장기 성장기반을 훼손시킬 가능성이 크다. 내수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면 일본 경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서는 경제여건 이상으로 강세를 보이는 엔화 가치가 약세로 돌아서야 가능하다.
하지만 엔화 가치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사태, 유럽 위기가 잇따라 발생함에 따라 ‘안전통화 저주(curse under safe haven)’에 걸리면서 오히려 강세를 보여 왔다. 안전통화 저주란 UC 버클리대의 베리 아이켄그린 교수가 처음 주장했던 개념으로, 미국과 유럽의 잇단 위기로 인해 안전 피난처(safe haven)로 엔화 수요가 쏠리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로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후 국제금융시장에서 엔화 가치는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확대될 때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뚜렷하다. 엔화의 명목실효환율은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반영하는 주가 변동성 지수(VIX)와 포지티브 상관관계를 보인다. 특히 모기지 사태, 유럽위기 등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엔화 강세가 일본경제 여건과 관계없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설상가상으로 엔캐리 트레이드가 활성화됨에 따라 불확실성이 확대되면 안전자산 선호와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맞물리면서 엔화 강세가 증폭된다는 점이다. 그 메커니즘을 보면 ‘불확실성 증대→안전통화 선호→엔화 수요 증가→엔캐리 트레이드 청산(네거티브 트레이드)→엔화 수요 증가→엔화 초강세’의 악순환 고리가 형성된다.
올 들어 일본경제는 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이 동시에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지는 디플레이션 국면이 우려되는 상황 속에 무역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서 3중고를 당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정책적으로 경기를 부양하면서 물가로 일정수준 이상 올리고 무역수지 적자를 개선해야 하는 ‘트릴레마(trillemma)’에 봉착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특정통화가 안전통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는 시장 리스크, 유동성 리스크, 신용 리스크로 평가해 본다면 엔화의 안전자산으로서의 위상은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출범 초부터 수출진흥책을 추진해온 오바마 정부도 집권 2기를 맞아 양적완화 등을 통해 달러 약세 유도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엔고 저주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던 개인 금융자산이 줄어들고 무역수지가 대폭 적자로 돌아섬에 따라 안전피난처로 엔화 수요가 급감하고 있다. 정책적으로 일본은행이 엔고 저지를 위해 최후의 방어벽을 치고 있다. 올 들어 엔고 저지를 위한 자산매입 규모가 36조엔, 그중에서 9월 이후 21조엔에 달하는 가운데 앞으로도 더 늘려나간다는 방침이다.
더욱이 차기 총리로 확정된 아베 신조는 현재 1%인 인플레이션 목표를 2%로 올려서라도 엔고 저지를 통해 적극적으로 경기를 부양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밝혔다. 아베 신조의 적극적인 양적완화에 반대하는 시라카와 마아아키 일본은행 총재도 12월 20일 자산매입 기금을 91조 엔에서 101조 엔으로 늘리기로 했다. 엔화 약세시대가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키코의 악몽 잊지 말아야금융위기에 따른 환율 폭등으로 대규모 환차손을 본 국내기업들은 다시는 되새겨 보고 싶지 않은 용어 중의 하나가 키코(KIKO)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4년이 지난 지금도 깊은 상처가 지워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관련 소송이 지루하게 지속되고 있다. 키코만큼 구조가 복잡하고 않고 사태도 공식화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가 큰 것이 ‘엔화 대출 후폭풍’이었다.
피해규모만 본다면 키코 사태보다 월등히 크고 2006년 이후 아직까지 후유증이 지속되고 있다. 일부 국내기업 외환담당자들은 엔화 대출 후폭풍을 오히려 ‘제2’가 아니라 ‘제1의 키코 사태’라 부른다.
2006년 당시 상황을 되돌아보면 원·엔 환율이 100엔당 730원까지 하락했고 일본경제도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실적을 내야 할 시중은행이나 자금난에 봉착했던 국내기업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엔화 대출이 급증했다. 이런 상황은 금융위기 이전까지 지속됐다.
하지만 원·엔 환율이 올 10월 말까지만 하더라도 1400원 이상 유지됐고 금융위기 직후에는 1600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키코 사태까지 겹치면서 엔화 대출을 사용한 수많은 국내기업과 개인 병원들은 부도가 났고 아직도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 외환역사상 1997년 외환위기, 키코 사태에 이어 3대 환위험 관리의 실패 사례로 꼽힌다.
‘엔화 대출 후폭풍’이 몰아닥친 가장 큰 요인은 금융위기 직후 ‘마진 콜(margin call)’에 직면한 미국 금융사들의 ‘디레버리지(자산회수)’ 과정에서 급등했던 원·달러 환율이다. 여기서 마진 콜이란 각종 펀드들이 수익률 하락으로 증거금에 일정수준 이상 부족분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보전하라는 요구를 말한다. 애초 예상치 못한 사태로 금융사들이 마진 콜을 당하면 외부에서 긴급자금지원이 없으면 기존에 투자했던 자산을 처분해서 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은 너무 오랫동안 엔화 강세환경에 젖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엔화가 본격적으로 약세로 돌아서면 그동안 일본경제 여건과 관계없이 시달려 왔던 엔‘ 화 대출 후 폭풍’은 줄어들겠지만 또 다른 환위험 관리에 실패해 ‘제3의 키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아베 정부 출범 이후 본격화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엔화 약세에 선제적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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