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 POLITICS - 전쟁을 싫어한 참전용사
U.S. POLITICS - 전쟁을 싫어한 참전용사
미국 의회 은어로는 그들을 ‘의회대표단(codels, congressional delegation)’이라고 부른다. 의회를 대표해 전쟁지역과 외국 수도를 방문해 국가안보 분야의 경력을 쌓고 개인적인 외교를 시도하는 의원들이다. 국민은 의원이 골프를 치거나 풀장에서 칵테일을 홀짝이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잡힐때 종종 그들 소식을 듣는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즐기는 외유로 비쳐진다(their trip exposed as a taxpayer-funded boondoggle). 하지만 때때로 중요한 기능도 한다. 정치인들이 복잡한 외교정책 현안의 뉘앙스를 파악하거나 워싱턴의 당파적인 분위기에서 잠시 벗어나는 기회를 준다.
2008년 7월의 일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상원의원들인 버락 오바마, 척 헤이글, 잭 리드가 함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방문했다. 동료애 소재 영화 촬영지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그들로선 유대를 돈독하게 다지는 경험이었다. 그들은 정책토론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전 측근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부벌레 모임(wonkfests)’이었다. 판이하게 다른 배경에서 비롯된 경험담을 공유하고, 비좁은 군용기 안에서 서로를 곯리며 시간을 보냈다. 오바마는 헤이글이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전쟁지역에 간다고 놀렸다.
오바마는 이미 상원외교위원회에서 헤이글과 연대감을 형성했었다. 이번에는 현장에서 그를 지켜볼 기회였다. 같이 출장을 다녀온 사람들에 따르면 그 미래 대통령은 헤이글이 출장 내내 만난 남녀 장병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헤이글은 훈장을 받은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었다(a decorated Vietnam vet). 진정성을 갖고 자연스럽게 군인들과 어울렸다. “군인들은 그가 사선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리드가 돌이켰다. “그는 지성적인 차원이 아니라 깊은 정서적 바탕 위에서 그들과 소통했다.”
오바마는 헤이글에게서 또 다른 특성도 알아차렸다고 리드를 비롯한 다른 몇몇이 말했다. 사병들과는 마음이 잘 통했지만 그들의 지휘관에게는 까다롭게 구는 편이었다. 바그다드에서 상원의원들은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의 브리핑을 받았다. 당시 이라크 주둔 미군 총사령관이었다.
브리핑의 대가인 퍼트레이어스는 공들여 만든 차트와 슬라이드로 최선을 다했다. 모두 이라크 주둔 미군 ‘증강’의 효과를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폭력은 감소하고 안정은 확대됐다. 하지만 급속한 병력축소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장군은 경고했다. 그는 통계와 도표를 쏟아내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장군의 프레젠테이션을 지켜보는 상원의원들의 시선은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고 한 전 측근은 돌이켰다. 그리고 퍼트레이어스가 장황하게 말을 이어가자 그들은 참을성을 잃기 시작했다. 마침내 헤이글이 장군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일방적인 강론을 들으려고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에게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경제가 추락하고 미국 국민의 인내심이 바닥나면서 영구적인 점령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the era of perpetual occupations was drawing to a close). 당시 오바마는 사실상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자로 간주됐으며 모든 여론조사에서도 곧 퍼트레이어스의 상관인 군 통수권자가 될 참이었다. “시의적절한 개입이었다”고 리드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시계추를 4년 반 앞으로 돌리면 오바마가 헤이글을 국방장관으로 지명하기로 결정하면서 워싱턴에 이념논쟁이 한바탕 벌어지는 중이다. 보수파 단체들은 헤이글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지 그리고 이란에 강경 대응할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지지자들은 헤이글의 세계관이 정부 안팎의 매파 견제에 필요한 균형추 역할을 한다고(provide a needed counterweight to hawks) 응수한다. 헤이글은 국방예산 삭감을 지지하며 대체로 무력사용에 회의적이다.
이 논란은 분명 지명과 관련됐다. 하지만 헤이글이 선택된 요인이었을 법한 다른 일부 요인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오바마와 헤이글의 세계관은 많은 부분이 겹친다. 그런 기준에 부합되는 다른 후보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국방장관으로서 헤이글 같은 무형의 개인적 특성을 가진 내정자는 흔치 않다. 가령 2008년 중동방문에서 보여준 특성 말이다. 자신의 군 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는 능력, 그리고 군 최고위층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투지다.
오바마는 분명 국방부 앞에 놓인 문제들을 감안할 때 자신의 국방장관에게는 앞으로 이 같은 자질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국방부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긴축시대의 예산 합리화에 이르는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리고 오바마와 헤이글이 수년간에 걸쳐 지속된 그런 직업적인 유대를 어떻게 유지했는지를 설명하는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2005년 버락 오바마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는 단순히 새로 떠오르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빈사상태에 있던 정치계급에 새생명을 불어넣은 문화적 경이였다(was a cultural phenomenon who breathed new life into a political class that seemed moribund). 척 헤이글의 눈에는 그 정도로 매력적이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통찰력만큼은 분명 인정할 만했다.
헤이글의 전 측근에 따르면 오바마가 처음 선택한 위원회가 외교위였으며 그가 정말로 외교를 중시하는 듯하다는 데 헤이글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헤이글도 1996년 초선의원 때 외교위원회에 합류했다. 당시 외교위는 제시 헬름즈 노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아래서 다소 비주류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오바마는 학구파였으며 핵비확산 같은 복잡한 문제에 깊이 파고들었다. 첫해에 그는 리처드 루거 공화당 상원의원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핵·생물·화학 무기의 확산 방지에 초점을 맞춘 방문이었다. 때마침 헤이글도 당시 별도 ‘의회대표단’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참이었다. 윌리엄 J 번스 미국 대사 초청만찬에 참석한 세 상원의원은 야심한 시각까지 정책토론을 벌였다(stayed up deep into the night discussing policy).
헤이글과 루거 모두 국제협력의 중요성을 잘 아는 외교정책 현실주의자들이다. 두 사람은 상원에서 오바마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멘토가 됐다. 보좌관들에 따르면 헤이글은 종종 고약한 성격을 드러낸다. 하지만 헤이글과 오바마 사이에는 그런 그가 다른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보여주지 않는 편안함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그 이유는 세대차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헤이글은 의회 선량 중 극소수 베트남 참전군인 중 한명이었다. 그의 동료 대부분이 용케 베트남전을 기피했다는 사실이 그들과의 관계에 일정 수준 긴장을 유발했다. 특히 미군을 전투에 참여시키는 문제가 화제에 오를 때 그런 긴장이 심해졌다.
“척과 나는 불안정한 시대에 성장했으며 우리 동시대 사람 중 다수가 어떤 이유에서든 병역을 기피했다”고 리드 상원의원이 말했다. 육군 특수부대 출신으로 육사를 졸업한 그는 12년 동안 현역으로 근무했지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찰이 빚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존 매케인은 일종의 멘토였으며 그가 2000년 대권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때도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두 참전용사는 훗날 이라크 전쟁 문제로 사이가 틀어졌다. 그 뒤 그들의 경험이 미친 영향을 두고 매서운 비난을 주고받았다. 매케인은 북베트남의 수용소 감방에 고립돼 있었다(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전쟁의 전반적인 피해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헤이글은 주장했다. 매케인은 헤이글이 사실상 자신의 베트남전 경험의 포로라고 맞받아쳤다. 그래서 국제문제와 무력사용에 관한 판단이 왜곡됐다는 주장이다. 오바마와 관계에는 이런 문제들이 “걸리적거리지 않는다”고 리드는 말한다. “베트남전에 참가했느냐는 문제 자체가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전이 헤이글을 오바마와 가까워지게 하는 요인이었다면 반대로 오바마가 헤이글에게로 이끌리는 요인으로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바마가 워싱턴에 도착할 무렵 의회는 이라크 전쟁 문제에서 강경 일변도로 흐르고 있었다(was a freefire zone over the Iraq War). 마지못해 무력사용에 찬성표를 던졌던 헤이글은 이라크전에 거부감을 갖기 시작했다.
오바마도 전쟁에 반대했지만 헤이글과는 달리 군대경험이 없었다. 전쟁과 평화 문제에 관해 논할만한 개인적인 바탕이 없었다. 오바마 입장에선 이라크 문제에서 헤이글과 마음이 맞았던 경험이 의심할 바 없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헤이글은 아직도 가슴에 유탄이 박혀 있으며 여전히 마치 현역인 양 장병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2008년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방문에 오바마와 헤이글이 한 조를 이룬 건 우연이 아니었다고 벤 로즈 국가안보담당부보좌관이 말했다(로즈는 당시 오바마의 선거운동 참모였다). “당시 누구를 오바마의 출장 파트너로 고를지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대통령 자신이 헤이글을 원했다.”
찰스 티머시 헤이글은 네브라스카주 서부의 벽촌에서 성장했다. 너무 궁벽진 곳이라 그중 한 마을은 자칭 ‘황무지 한복판(The Middle of Nowhere)’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으며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에서 싸웠다. 그와 형제들은 중서부의 전통보수주의 교육을 받았다. 겸손함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몸에 익혔다.
퇴역군인회를 비롯한 기타 참전용사 지원단체가 지역사회의 중심을 이뤘다. “1969년 당시 누군가 앞으로 40년쯤 뒤에 한 진보적인 민주당 대통령이 골수 보수파인 척 헤이글을 행여 ‘들개 포획자’에라도 임명하리라고 내게 예언했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말했을 듯하다.” 척의 동생인 톰 헤이글이 지난주 뉴스위크에 말했다.
헤이글은 1967년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베트남에 파견됐다. 그 직후 동생 톰도 입대했다. 공교롭게도 척과 같은 부대에 배치됐다. 형제는 1967년과 68년 몇몇 가장 치열한 전투를 겪었다.
보병이었던 그들은 캄보디아 국경 근처 “최전선에 배치돼(walked point)” 적군의 수색·섬멸 임무를 맡아 수시로 적과 교전했다(doing search-and-destroy missions and engaging the enemy on a regular basis). 1968년 3월 형제가 순찰 중 종대 앞쪽의 앞 병사가 부비트랩을 건드렸다. 폭탄이 터지면서 유탄이 사방으로 날았다. 척의 온몸이 피범벅이 됐다. 동생이 그의 가슴을 천으로 감싸 출혈을 막아 목숨을 구했다.
한달 뒤 이번에는 척이 동생을 죽음에서 구했다. 함께 장갑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한 마을을 막 관통한 직후 지뢰가 터졌다. 척은 폭발의 불꽃에 얼굴 화상을 입고 고막이 터졌다. 톰은 의식을 잃었다. 척은 자신의 몸으로 동생을 감싸며 불타는 잔해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그를 끌어냈다.
탄환이 빗발치는 순간들이 가장 극적이었다(The bang-bang moments were the most dramatic). 하지만 헤이글의 전기작가에 따르면 야간 경비를 설 때의 기억이 그의 머리 속에 가장 깊숙이 각인됐다. 눈깜짝할 새 총격전이 벌어지며 너무 많은 아드레날린이 분출해 공포를 느낄 새도 없었다.
반면 칠흑같이 어두운 정글 속에서 적군의 이동을 감시하는 활동은 서서히 그리고 털끝이 곤두서는 긴장감으로 전개됐다. 다른 병사들이 잠을 자고 헤이글이 불침번을 설 때였다. 대규모 베트콩이 정글 속을 이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그들이 베트남말로 속삭이는 말까지 들릴 정도였다.
형제는 많은 훈장과 상반된 전쟁관을 갖고 베트남에서 귀환했다. 톰은 정부에 분노하며 자신이 사람들에게 준 고통 때문에 괴로워했다(wracked with guilt over the suffering he’d caused). 결국 그는 정치적 좌파로 돌아섰다. 그리고 지난주 뉴스위크와 인터뷰할 때 공화당에 대한 비판을 억누르지 않았다.
“오바마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명했다 해도 오로지 오바마가 지명했다는 이유만으로 시빗거리를 찾아내는 공화당 의원 무리가 있다.” 하지만 척은 베트남전에 대해 그렇게 후회하지 않았다.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전쟁에는 숭고한 명분이 있었다고 여러 해 동안 주장했다.
척이 이 같은 입장을 재고하기 시작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톰에 따르면 형의 “전환점”은 1999년에 찾아왔다. 린든 존슨 대통령의 테이프가 새로 공개됐다. 그는 승산 없는 싸움에 병력을 계속 파견한(was continuing to send troops to fight in a lost cause) 이유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시인했다.
하지만 부시 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밀어 붙인 뒤에야 헤이글의 가슴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둑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이제 베트남전이 거짓과 기만의 토대 위에서 이뤄졌다고 믿는다. 그 전쟁은 이라크에 대한 헤이글의 준거기준이 됐다(became Hagel’s frame of reference for Iraq). 전투의 진정한 공포를 모르면서 필요가 아니라 선택에 따른 전쟁에(wars of choice and not necessity) 미국인을 보내려는 정치인들을 향한 분노가 갈수록 커졌다.
“미국을 전쟁으로 서둘러 밀어 넣으려 하며 아주 잠깐 동안의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다수가 전쟁에 관해 눈곱만큼도 모른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2002년 그가 뉴스위크에 한 말이다. “그들은 지적인 관점에서 그런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들은 정글이나 참호 속에 앉아서 전우의 머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나는 어느 정도 그런 과거의 유령을 대변하려 노력한다.”
그 무렵 아직 무명의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이던 오바마도 헤이글과 상당히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 오바마는 모든 전쟁을 배격하지 않았지만 멍청한 전쟁에는 반대한다고 2002년 10월의 한 연설에서 말했다. “내가 반대하는 건 냉소적인 시도다. 이 정부의 (취미 삼아 하는) 주말전사들이 생명의 희생과 그에 따르는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념적 어젠다를 우리에게 강요하려 든다(by weekend warriors in this administration to shove their own ideological agendas down our throats).”
오바마가 상원에 입성할 즈음 헤이글은 열정적으로 과거를 파헤치고 있었다. 베트남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모두 읽으며 이라크와의 유사성에 갈수록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2007년 정부 정책에 관해 절제되지 않은 발언을 쏟아냈다. 에스콰이어 기자에게 조지 W 부시의 탄핵을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헤이글의 공격에 공화당 내 또 다른 직설화법의 대가가 냉소적인 카운터펀치를 던졌다. “같은 공화당원을 헐뜯지 말라는 로널드 레이건의 11번째 계명(11th Commandment)을 굳게 믿는다.” 당시 딕 체니 부동령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하지만 척 헤이글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그 계명을 지키기가 대단히 힘들다.” 헤이글은 대통령 출마를 고려했었다. 하지만 당내에 많은 적을 만든 데다 무소속으로 입후보할 생각은 없었던 그는 결국 레이스에 참가하지 않았다. 2008년 상원에서도 물러났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헤이글에게 조언을 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취임하기 전부터 민감한 국가안보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 헤이글은 데이비드 보렌 전 상원의원과 함께 랭글리에 있는 CIA 본부를 찾아갔다. 정보원들이 수행하는 다양한 비밀작전에 관한 일련의 브리핑을 받았다.
여러 참석자에 따르면 회의장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정보 당국자들이 강화된 심문기법 같은 논란 많은 프로그램들을 존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헤이글과 보렌은 절대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고문은 미국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이라는 주장이었다.
CIA나 장군들과 맞서는 헤이글의 투지는 분명 오바마에게 유용할 듯하다. 하지만 그는 오바마도 서슴지 않고 비판했다. 대통령 정보자문위원회(Intelligence Advisory Board) 현역 위원인 그는 정부의 아프가니스탄 증파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오바마의 제한적인 대(對) 리비아 개입정책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whether Obama’s limited intervention in Libya was in the national interest)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그것이 결점이 아니라 장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이견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더 없이 환영할 일”이라고 로즈가 말했다. “헤이글이 자기 생각을 말할 때는 정말로 신념을 이야기하며 그것이야말로 대통령이 좋아하는 특성이다.”
오바마는 지난주 초 헤이글의 지명을 공식 발표할 때 이 같은 특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발표를 마칠 무렵, 한 측근에 따르면 오바마가 준비된 발표문을 덮고 즉석 발언을 할 때가 더 의미심장했다. 대통령은 헤이글을 국방부 장관으로 앉히려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를 가리켰다. 내정자는 “전쟁터에 있었으며, 치열한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곳에서 우리가 내리는 결정의 결과를 이해”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그는 말했다. “그야말로 더없이 소중한 가치다(That’s something invalu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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