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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 물먹는 인사발령 받고 ‘왜 하필 나’가 아니라 ‘왜 꼭 나인가’ 생각

FEATURES - 물먹는 인사발령 받고 ‘왜 하필 나’가 아니라 ‘왜 꼭 나인가’ 생각

1월 28일 돌연 사표를 낸 이채욱 전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이 CJ대한통운 부회장으로 경영계에 컴백했다. 그는 짧은 ‘백수 기간’에 두 번째 자기계발서 『행운아 마인드』를 출간했다.
이채욱 부회장이 CJ대한통운으로 첫 출근을 하루 앞두고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내가 사무실이 없는데…” 수화기 너머로 난감해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 출간을 계기로 한번 인터뷰하자고 덤비던 참이다. 40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한 그로서 소속이 없다는 게 당황스러울법도 했다. “흠, 가든호텔 알아요? 아니다. 그냥 집으로 올래요?”

새 직장으로 첫 출근을 하루 앞둔 3월 11일, 서울 용산구 청암동 자택에서 이채욱(67) 전 인천공항 사장을 만났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아파트는 GE코리아 회장 때부터 살던 곳이다. GE헬스케어 아시아 총괄 사장을 맡아 잠시 싱가포르에 머문 기간을 빼면 6년이다.

“밤에 야경이 참 좋다”고 자랑하는 사이 부인 김연주(60)씨가 직접 담근 오미자차를 내왔다. “갑작스레 퇴임한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고 운을 떼자 부인이 걱정스러운 듯 남편 옆에 앉는다. “아내와 의논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놀라는 기색이더니 ‘신중한 당신을 믿는다’며 결정을 존중해주더군요.” 그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공기업 임기가 3년인데 1년을 더한데다 다시 1년을 연임하게 됐어요.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더 하니까 회사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인천국제공항이 5조원을 투자해서 제2터미널을 짓습니다. 5월에 공사를 시작하는데 올해 발주 규모만 1조9000억원이에요. 당초 임기인 9월까지 근무하면 후임 사장은 내가 발주한 것을 진행만 하게 됩니다. 그 분 뜻이 다를 수도 있고, 발주부터 완공까지 한 사람이 하는 게 좋지 않나 싶어 결심했어요.”

“새 정부 주요 부처 장관직을 맡을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는 말에는 너털웃음으로 답했다. “허허허. 그럴 능력도 없고 민간회사 출신이니까 본연의 길을 가야지요.”

지난 2월 15일에 퇴임식을 하고 23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연인 이채욱’으로 살았다. 1972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삼성GE의료기기·GE코리아·GE헬스케어·인천공항 등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한번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이번에는 작정한 듯 퇴임 이튿날 부인과 태국으로 여행을 갔다. “한 6개월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일주일 태국여행으로 만족해야 했어요. 아내에게 미안하지.”

‘프리 선언’을 한 이 부회장을 재계는 가만두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강연이나 하며 조용히 살자고 마음 먹은 그였지만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CJ대한통운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24년차 CEO로서 본능이 꿈틀했다. “CJ대한통운과 CJ GLS가 오는 4월 1일 하면 자산 5조5000억원 규모의 대형 물류회사가 탄생합니다. 세계적 물류기업 DHL과도 경쟁해볼 만하죠.”

그는 인천공항 사장 퇴임 전 물류의 중요성을 얘기하면서 “물류시스템을 구축하고 비용을 줄여 인천공항을 물류 허브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그는 또 “물류공부를 하고 있다”며 “CJ대한통운이 글로벌 톱5 물류기업 도약이라는 비전을 세운 만큼 취임 후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민간기업, 글로벌 기업, 공기업을 두루거쳐 다시 민간기업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지난 2월 초 40여 년 직장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메시지를 담아 자기계발서를 냈다. 공기업 CEO 자리가 부담이었는지 일부러 책 출간 날짜를 사퇴 후로 잡았다. 출간 기념회도 하지 않았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했는데 오히려 새 출발을 앞두고 스스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어요.”

책 제목은 『행운아 마인드』. 행운아 마인드는 경북 상주 산골에서 태어난 그가 삼성물산 해외사업본부장, GE코리아 회장, 인천공항 사장에 오를 수 있게 한 밑천이다.

그는 “럭키(lucky)·패션(passion)과는 또 다르다”며 “마음 깊은 곳에 나다움을 유지하는 힘, 다르게 얘기하면 가치관에서 비롯된 자신감”이라고 설명했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비결을 물으면 ‘그저 운이 좋았다’고 하잖아요. 행운아 마인드가 있으면 그렇게 답하는 이유를 알 수 있죠.”

그는 50대 50에서 어느 쪽 1%를 선택하느냐가 성공을 가른다고 말했다. “가난은 정해진 운명이었어요. 6·25전쟁 피난 때는 나뭇지로 움막을 짓고 살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어요.” 그는 5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학교를 마치면 밭에서 채소를 뽑고 똥지게를 졌다.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가던 그가 스스로 행운아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고교 입학 무렵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철공소에서 기술을 배우던 중 장학생에 선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수없이 되뇌었어요.”하지만 2학년 때 장학생 시험에서 떨어졌다. 그 때 또 행운이 찾아왔다. 교장 선생님이 읍내 적십자병원 원장 댁 입주 가정교사 자리에 그를 추천한 것.

“동네 사람들이 어린 것이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는다고 혀를 끌끌 찼으니 신세를 비관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학교를 다닐수 있다는 게 무척 기뻤어요.” 그는 갑자기 모기장 얘기를 꺼냈다. “시골에서는 모기장을 구경도 못해요. 독방·쌀밥보다 ‘개인 모기장’이 있다는데 설레었죠. 신나서 동생가르치듯 열심히 하니 어른들이 잘 대해줬어요.”

긍정적 사고는 열정을 스스로 만들게 한다고 했다. 1989년 중동 두바이에서 삼성 해외사업본부장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그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사업을 정리하려는 삼성GE의료기기 사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잘 정리하고 오라”고 주변에서 위로해 줬다. 그만큼 다들 꺼리는 자리였다.

‘왜 하필 나일까’ ‘왜 하필 거기일까’ 생각하다가 ‘하필’ 대신 ‘꼭’을 넣어봤다. “꼭 내가 가야 하는 이유를 백지에 적다 보니 절망할 이유가 없더군요.” 그는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삼성과 GE를 설득했고 결국 이 회사는 5년 동안 연평균 46%의 성장을 이뤘다. 개인으로는 미국의 글로벌 기업 GE에서 일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 하는 일도 즐거웠지만 글로벌 기업에서 경쟁하고 교육받을 수 있다는 것이 열정에 불을 지폈어요.”

이렇듯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온 그지만 위기도 있었다.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달려가는데 외부환경 때문에 멈춰야 할 때는 방법이 없어요.” 1998년 GE메디컬·초음파 부문 아시아 총괄 사장을 맡았을 때다. 동남아 시장을 확장하려고 인력을 채용하고 회사 규모를 키우던 중 외환위기로 동남아가 직격탄을 맞았다.

“내가 채용한 사람을 내가 내보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당시 필리핀 지점장은 식구들도 잘 아는 사이였는데 도저히 그만두라는 얘길 못해서 근무지인 싱가포르에 세 번이나 갔죠.” 세 번째 방문 때 함께 골프를 쳤다. 18홀로도 모자라 27홀을 도는 중에 지점장이 “이미 알고 있으니 그만해도 된다”며 부회장의 골프채를 잡았다. 그는 지점장을 포함한 해고 직원들에게 헤드헌터를 소개해 주고 좋은 조건으로 직장을 구할 수 있게 애썼다. “위기가 닥쳤을 때 도망치지 않고 솔직하게 대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삼성GE의료기기에서 대규모 감축을 할 때 역시 직원 102명을 다른 삼성 관계사에서 근무할 수 있게 배려했다. “동기인 김순택 당시 비서실 상무가 협조해줘서 참 고마웠어요.”

그는 ‘변화와 혁신의 전도사’로 불린다. 이 역시 행운아 마인드에서 비롯됐다. “행운아들은 내 역할을 잘 실행하고 있는지, 조직에 가치를 더하고 있는지 늘 자문합니다.” 그가 인천공항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직원이 두툼한 서류를 들고 왔다. 출장보고서였다.

‘아무도 읽지 않는 두꺼운 서류뭉치가 왜 필요할까’ 이 전 사장은 출장보고서를 없애고 꼭 필요한 내용은 해당 부서에 e메일로 남기게 했다. 그는 “출장보고서를 없애면 감사를 받는다”며 펄쩍 뛰는 직원에게 말했다. “아무도 안 보는 걸 쓰느라 시간 낭비한 걸 감사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처럼 작은 것에서 변화를 시작한 인천공항은 국제공항협의회의 공항서비스평가에서 7년 연속 세계 최고 공항으로 선정됐다.

살면서 가장 행운아라고 느낀 순간이 언제인지 물었다. 그는 슬쩍 고개로 뒤쪽을 가리켰다. 인터뷰 내내 조금 떨어진 곳에 의자를 두고 앉아 미소 띤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던 부인이다. “평생 내 와이셔츠를 다리는 아내가 안쓰러워 세탁소에 맡기라고 했더니 ‘내 행복을 뺏지 마라’고 하더군요.

그때 알았어요.다림질이 그저 주름을 펴는 게 아니라 깔끔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일하라는 아내의 응원이었다는 것을.” 주말이면 함께 밥상머리에 앉는 세 딸 역시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선물이다. 든든한 가족의 성원을 등에 업고 이 부회장의 새로운 도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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