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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I Was 25 - 산과의 인연은 숙명이었다

When I Was 25 - 산과의 인연은 숙명이었다

방황하는 젊은이에게 산이 물었다. ‘정말 좋아하는 것이 뭐니.’ 젊은이는 산을 바라봤다. 그 곳에 답이 있었다. 그의 회고를 1인칭 화법으로 구성했다.1949년생
1973년 동진산악 설립, 2010년 블랙야크·동진레져 독립 법인 설립



‘동진산악’ 1973년 2월 1일 간판을 달았다. 서울 종로5가 321-25번지. 도봉산·북한산·수락산·불암산행 버스가 멀지 않은 곳에 선다. 9.9m² 남짓한 면적이지만 그 세 배쯤 되는 공장이 딸린 어엿한 매장이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20대 중반에 시작한 등산장비 사업이다. 주변에서 먹고살기 바쁜데 누가 산에 가느냐며 정신 나간 놈이라 했지만 그때 결심을 굳혔기에 지금의 ‘블랙야크’가 있다.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은 블랙야크는 연 매출 6250억원 규모의 아웃도어 업체다. 블랙야크·마모트·마운티아·카리모어가 주요 브랜드다. 1998년에 베이징에 직영점을 내면서 중국에 발을 디뎠다. 지난해 중국의 260개 매장에서 올린 매출은 550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8월에는 국내 아웃도어 브랜드 최초로 네팔 카트만두에 매장을 열었다. 현재 북미·유럽·러시아·홍콩·대만·호주·인도 등지에 진출했다. 올해는 독일 뮌헨에 매장을 열 계획이다.

제주도 서귀포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교는 한라산 너머 제주시로 ‘유학’갔다. 겨우 몸을 누일만한 방에서 친구와 자취를 했다. 졸업 후 어머니는 대학 진학을 원했지만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 들어간 곳은 면사무소. 매일 손으로 서류를 베꼈다. 1년 8개월을 일하고 그만뒀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다시 농협에서 일했는데, 보관 중에 줄어든 곡식을 채우려고 전전긍긍하는 조합장을 보고 7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어떻게든 참고 일했으면 면장이나 농협 지점장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서울을 동경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진리 같았다. 어머니는 험한 객지생활을 걱정했지만 아들의 뜻을 꺾지 못했다. 1971년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의류사업을 하는 이모를 찾아갔을 때만 해도 대학에 가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낮에는 이모 가게에서 출납을 보고 밤에는 사촌에게 공부를 가르치며 정작 내 공부는 못하고 1년을 보냈다.

그러다 시장에서 군수품을 등산 장비로 개조해 파는 것을 봤다. 당시만 해도 국내 기술로 등산용품을 만들어 파는 곳이 거의 없었다. ‘저걸 제대로 만들면 돈이 되겠구나.’ 이모를 졸라 장사 밑천 50만원을 빌렸다. 직원 없이 미싱 두 대를 들이고 기술자를 시간제로 고용해 동진산악을 열었다.

등산 장비에 눈이 간 것은 산을 잊지 못해서다. 산은 어릴 때부터 익숙하다.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소·말을 방목하면 꼭 한 두 마리씩 산에 숨었다. 가축을 찾으려고 한라산에서 열매를 따먹으며 바위 밑에서 노숙하길 여러번, 산과 친구가 됐다. 중3 때 처음 제대로 등산을 했다.

블랙야크 전신인 동진산악의 초창기 매장.
선생님이 주도한 다분히 강제적인 등반이었다. 2박3일동안 고생해 한라산 정상에 올랐을 때 다시는 산을 쳐다보기 싫을 줄 알았지만 알 수 없는 희열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때부터다. 산에 빠진 것이.



무작정 상경해 등산용품점 열어간판을 달고 나니 대학은 안중에 없었다. 하루 종일 군용배낭을 끼고 앉아 연구했다. 필요 없는 주머니를 뜯어 없애고 더 가벼운 원단이 뭘까 고민했다. 책에서 수입 등산용품을 보고 색상도 넣었다.

하지만 막상 만들어 놓으면 생각과 전혀 달랐다. 시행착오 끝에 배낭 몇 개를 걸어놨지만 어쩌다 손님이 와도 우물쭈물하다 보내기 일쑤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자신감을 갖기 위해 제품을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산악인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70년대 후반에는 기술력을 인정받아 한국보이스카우트와 경찰의 야영장비 대행업체로 선정됐다. 여기서 나오는 고정매출이 전체매출의 40%가량을 차지해 훗날 회사의 기틀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

사업 초기에는 막연히 성공을 꿈꿨다. 외상값을 떼이고 기술의 한계를 느끼면서 현실의 벽에 부딪쳤지만 결국 꿈은 현실이 됐다. 돌아보면 맨 땅에 헤딩하듯 유통 활로를 확보하고 마케팅을 했다. 처음 매장을 열고 손님이 없을 때는 함께 산에 다니던 사람들에게 공짜로 배낭을 줬다. 우선 제품을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단점을 지적하면 하나씩 개선해 나갔다. 좀 장사가 된다 싶었지만 여전히 동네 점포 수준이었다.

그때 떠올린 것이 동대문운동장에 빼곡히 들어선 체육사다. 이곳에서 제품을 팔 수 있으면 대량 유통이 가능할 듯했다. 하지만 아무 연고가 없는 어린 장사꾼을 믿어줄리 없었다. 무작정 빗자루를 들고 매일 아침 가게 앞을 쓸었다. 죽 늘어선 체육사를 따라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아침 청소를 시작한 지 20여 일 만에 한 체육사 사장님이 말을 걸었다. “자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이 사장님 소개로 전남 광주에 있는 꽤 큰 체육사에 물건을 댈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1년 동안 아침 청소를 계속했다.

열심히 뛰는 만큼 운도 따랐다. 등산 문화는 정치·경제·사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뜻하지 않은 외부환경에 회사가 존폐 기로에 서기도 하고 큰 성공을 맛보기도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꼽으면 우선 박정희 대통령 유고 이후 1979년 10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야간 통행금지령이 떨어진 사건이다. 어수선한 시국에 아무도 산에 가려 하지 않았다.

다행히 1982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시장이 살아났다. 이때 토요일에 회사를 마치고 밤새 산행 후 일요일에 돌아오는 ‘무박산행’을 생각해냈다. 처음으로 일요일에 매장 문을 닫고 토요일 밤에 산을 탔다. 함께 간 산악인들의 반응이 좋았다. 무박산행은 이후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1991년에 또 한번 위기가 왔다. 산에서 취사와 야영을 금지한 것. 코펠·버너·텐트 같은 등산용품이 전체 매출의 90%를 차지했기 때문에 타격이 컸다. 이때 등산용품회사의 70%가 문을 닫았다. 당시는 청천병력 같은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면 회사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전화위복이었다.

마음을 정리하며 산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직접 장비를 써보니 개선해야 할 점이 눈에 띄었다. 1993년 마음을 다잡기 위해 히말라야 등반에 도전했다. 엄홍길 대장이 원정대를 이끌었다. 엄 대장과는 지금도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지낸다. 티베트의 산속을 걸으며 회사의 앞날을 고민했다. 등산용품 시장이 90% 막혔다면 남은 10%의 등산의류 시장을 뚫는 길밖에 없었다.

기능복으로만 생각한 등산복에 패션을 접목하자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뭔가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순간 짐을 나르는 야크의 검은 털이 눈에 띄었다. 야크는 고원에 사는 소와 비슷한 동물이다. 히말라야에서 돌아오자마자 브랜드 개발에 착수해 1995년 고유 브랜드 블랙야크 제품을 선보였다.



‘취사 금지령’에 패션업으로 전환패션업으로 전환하고 나서도 시련은 계속됐다. 1997년 외환위기는 등산용품 시장에 큰 영향을 줬다. 초기에는 매출이 급격히 줄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데 직장에서 대거 퇴출된 중년 남성들이 출근하는 대신 산에 오르면서 분위기가 반전됐다. 나중에는 남편을 따라 온 아내들까지 등산을 즐기면서 외환위기는 등산 장비 업체들에겐 결과적으로 호재가 됐다. 1998년 금강산 관광길이 열렸을 때는 준비물에 등산화가 포함돼 ‘짝짝이’까지 다 팔렸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산은 정직하다. 노력한 만큼 대가를 준다. 과욕을 부리면 채찍질이 날아든다. 자연 속에서 날 것 그대로 나를 대면할 수 있다. 제주도에서 홀로 상경했을 때도 매일 산에 올랐다. 이모 댁이 중구라 주로 남산을 찾았다. 요즘은 주로 혼자 주말 등산을 한다. 약속이 있어도 시간을 내 꼭 다녀온다. 그래야 밥맛이 난다. 최근에는 관악산에 재미를 붙였다. 사당 쪽에서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이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북한산은 봄·여름에는 정릉 쪽에서 출발해 전망을 즐기고, 가을·겨울에는 계곡 쪽으로 올라 나무 우거진 풍광을 즐긴다.

블랙야크는 1983년 몽블랑 원정대를 시작으로 30여년 동안 해외원정대를 지원하고 있다. 2008년부터 후원한 오은선 대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으로서 여러 기록을 세웠다. 나 역시 초오유·몽블랑·안나푸르나·칸첸중가·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 인생의 롤 모델을 물으면 한라산이라고 답한다. 휴대전화 뒷 번호를 1950(m, 한라산 높이), 2750(백두산 높이)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산악인으로서 가고 싶을 때 산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겁다. 등산장비 업체 CEO가 되고 보니 출근길이 산으로 향할 때처럼 설렌다. 등산복은 옷이 아니라 생사를 좌우하는 장비다. 처음 간판을 달 때부터 지금까지 ‘품질’이라는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스물 다섯으로 돌아가도 산이 좋아 사업을 시작한 마음은 변함 없을 것이다.

한국 아웃도어 시장이 2003년부터 급성장해 시장 포화라고 하지만 브랜드 경쟁력을 키우면 더 성장할 수 있다. 에베레스트를 세계 최초로 등반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에베레스트에 어떻게 올랐느냐”는 질문에 “한 발 한 발 걸어서 올랐다”고 답했다. 내게는 1973년 2월 종로5가의 동진산악이 글로벌 톱 브랜드로 가는 첫 발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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