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돈 죌 조짐에 신흥국 몸살
선진국 돈 죌 조짐에 신흥국 몸살
신흥국 금융시장이 몸살을 앓고 있다. 전 세계 금융시장을 지탱한 ‘유동성 범퍼’에 금이 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여기저기서 돈 빼는 소리가 요란하다. 위기의 원인은 늘 선진국 시장이 제공하지만 위기의 표면화는 가장 약한 고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그 약한 고리들이 삐걱댄다.
돈이 가장 싫어하는 게 불확실성이다. 안개 속에서도 혜안을 갖고 맥을 짚어 투자하는 돈은 얼마 안 된다. 우르르 몰려갔다 서로 짓밟히며 뛰쳐나오는 돈의 흐름은 각국 중앙은행의 돈 풀기가 본격화한 이후 더 뚜렷해진 양상이다.
선진국 양적완화 축소 움직임지금의 불안감은 밑그림이 흔들린 때문이다. 애초 그 밑그림에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의 무제한 양적완화, 일본의 팽창주의적 완화정책, 마이너스 금리까지 고민하던 유럽중앙은행(ECB), 새 지도부를 맞은 중국 경기의 회복 전망 등이 자리했다.
우선 연준부터 보자. 적어도 내년까지는 지속될 것이라 믿었던 미국 연준의 무제한 양적완화는 예상보다 빨리 축소 모드에 돌입했다. 언제부터 얼마만큼 줄이겠다고 결정된 것은 없다. 그러나 연준의 이사들은 그 시기가 다가온다는 신호를 계속 보낸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가 내놓은 ‘양적·질적 완화정책’은 두 달만에 신뢰에 금이 가고 있다. 국채(JGB)시장의 동요를 시작으로 일본증시가 흔들리자 달러당 엔화 가치는 다시 올랐다. 구로다가 풀어놓은 일본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 전 세계 위험자산 가격을 끌어올릴 것이라던 기대 역시 퇴색했다.
마이너스 금리까지 검토하며 경기 부양의 의지를 다진 ECB도 덩달아 뒷걸음 치기 시작했다. 경기를 부양하고 싶지만 점점 펀더멘털과 동떨어지는 자산시장 흐름이 겁나서다.
중국 경제는 어떤가. 경기 둔화 기울기가 예상보다 가파라졌지만 지도부는 아직까진 나쁘지 않다며 팔짱을 끼고 있다. 성장률 수치에 연연하기보다는 질적 변화를 도모하겠다며 중국 경제의 비효율과 부실을 어떻게 털어낼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다. 토대가 흔들리자 거기에 의지해 수익을 올리던 큰 손들의 동요가 커졌다. 물론 이같은 흐름이 일시적인 조정으로 끝날지 아니면 하향 나선형을 그리며 더 큰 위기로 치달을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다만 지금 큰 손들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응하는 중이다.
그 대응은 바로 과도한 투자 포지션의 청산으로 나타났다. 과열로 인식된 자산에서 돈을 빼는 모습이다. 각국 중앙은행의 양적완화로 가격이 부풀어 오른 주요국 국채시장은 물론이고 주식시장, 나아가 신흥국 자산시장에서 서둘러 돈을 찾고 있다.
왜 이렇게 서둘러 돈을 빼는가를 이해하려면 그간 자산시장을 끌어올린 큰 손들의 취한 투자기법을 살펴봐야 한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일본·유럽연합(EU) 중앙은행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제로금리 수준의 자금을 시장에 뿌려댔다.
이 자금 대부분 실물경제로 흘러들기보다 금융시장 투자자들의 레버리지로 활용됐다. 공짜나 다름 없는 돈을 빌려다 여기저기에 투자한 것이다. 이른바 ‘캐리 트레이드’다. 그 결과 레버리지를 이용한 투자 포지션은 미국발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수준을 훌쩍 넘어버렸다.
그러다가 유동성 밑천이 줄어들지 모른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자산시장의 추가 상승 여지가 줄어들자, 수익 극대화에 쓰인 레버리지들이 빠르게 풀리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같은 흐름을 가속화시킨 촉매 중 하나는 바로 미국과 일본의 국채수익률, 즉 시장금리 상승이다. 공짜나 다름없던 차입금의 이자가 오르자, 이 돈을 끌어다 투자한 큰 손들이 투자처에서 빠르게 탈출하는 것이다.
아쿠아리움 같은 거대 수족관과 동네 횟집의 수족관은 물의 양이 다르다. 아쿠아리움에서 양동이로 물을 조금 퍼낸다해서 큰 영향은 없다. 그러나 횟집 수족관은 다르다. 조금만 물을 퍼내도 활어들은 가쁜 숨을 몰아 쉰다. 아쿠아리움을 선진국 시장, 횟집 수족관을 신흥국 시장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벌어지는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인도네시아·필리핀·태국·남아프리카 공화국·터키 등의 금융시장은 이미 횟집 수족관의 생태환경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쿠아리움과 횟집 수족관 차이2008년 저점 대비 주가 지수가 5배로 상승한 인도네시아 증시는 5월 24일을 고비로 하락 행진 중이다. 전 고점 대비 낙폭은 12%에 달한다. 인도네시아 루피아 가치는 2009년 중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역외선물환시장(NDF)에서 달러·루피아 환율은 심리적 저항선이던 1만 루피아를 돌파했다.
사정은 필리핀도 마찬가지다. 2008년 저점 대비 3배로 뛰어오른 주가지수는 5월에 7400포인트를 꼭지로 가파르게 밀렸다. 3주 만에 주가는 1000포인트(13.5%) 가까이 빠졌다. 정국이 불안한 터키와 남아공에서도 외국인 자금이 탈출하면서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을 흔들었다.
문제는 여러 횟집 수족관들이 독립 개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거대한 파이프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파이프로 모두 연결돼 있다. 큰 파이프의 수압이 낮아지면 작은 파이프로는 아예 물이 안 간다. 오히려 가득 찼던 횟집 수족관들의 물이 파이프로 역류해 큰 파이프로 빨려 들어간다. 수족관의 수위를 끌어올린 속도만큼 물이 빠지는 속도 역시 빠르다. 그리고 이는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
실물경기를 보면 중국 경제가 신흥국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해 말 반짝한 중국 경제는 올 들어 다시 성장률이 둔화됐다. 생산과 투자·수출입 지표 모두 아래로 꺾이는 흐름이다. 그럼에도 기대를 모은 새 정부의 부양책은 나오지 않았다.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는 계속 과거와 같은 고강도 부양책을 쓸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일자리가 심하게 흔들린다면 일정 정도 경기방어책을 기대할 수 있겠지만 최근 리커창 총리는 “일자리 사정은 안정적”이라는 인식을 드러냈다. 당 지도부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설사 경기부양책을 펴더라도 올해 목표인 7.5% 성장률을 달성하는 정도의 저강도 정책만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이는 중국 경기에 의존해 원자재를 수출해먹고 사는 주변 신흥국을 더 힘들게 하고 있는 요인이다.
선진국 시장의 통화정책 변화가 신흥시장에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오는지 우리는 1997년 한국 등 아시아 외환위기에서 경험했다. 무엇보다 신흥국 금융시장의 위기는 필연적으로 사회·정치적 동요를 동반한다. 그리고 둘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주변국으로 위기를 전염시킨다. 터키와 남아공의 소요 사태가, 인도네시아에 잠재된 정치적 불안이 결코 강 건너 불일 수 없는 연유다.
- 국제경제 분석 전문 매체 Glober Monitor 특약
캐리 트레이드(Carry Trade) 저금리로 조달한 자금으로 다른 국가의 특정 유가증권 혹은 상품에 투자하는 거래를 뜻한다. 금융회사는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해 미국의 장기 채권이나 석유·금·구리 등 국제 원자재 상품이나 신흥시장의 증시 등에 투자한다. 고수익·고위험의 양면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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