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개념 뒤바꾼 은둔의 혁신가
패션 개념 뒤바꾼 은둔의 혁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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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패션 브랜드 ‘자라(Zara, 스페인에서는 사라로 발음)’로 유명한 스페인의 패션유통업체 인디텍스의 전 회장인 아만시오 오르테가(77). 평생 한 번도 인터뷰를 하지 않을 정도의 은둔형 기업가여서 국내는 물론 해외 미디어에도 잘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주목받는 일곱 가지 이유가 있다.
#1. 재산이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오르테가 회장은 570억 달러의 재산으로 올 3월 발표된 포브스 세계 부호 순위 3위에 올랐다. 유럽 제1이자 스페인 제1의 부자다. 그보다 재산이 많은 인물은 1위를 차지한 멕시코의 카를로스 슬림(730억 달러)과 미국의 빌 게이츠(600억 달러) 밖에 없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오르테가는 지난 한 해 동안 재산이 가장 많이 불어난 부호다. 지난해 550억5000만 달러의 재산으로 세계 5위였던 그는 한 해 동안 19억5000만 달러의 재산이 늘었다. 인디텍스는 세계적인 불경기인 지난해 오히려 기록적인 성장을 이루면서 이익이 전년도 대비 50% 이상 늘었다.
중저가의 부담 없는 제품이 많아서인지, 불황과 상관없는 생필품을 품위와 개성이 넘치는 디자인과 함께 뛰어난 품질 수준으로 제공해서인지는 불분명하다. 둘 다 인지도 모른다. 오르테가는 불황 시대 기업이 생존할, 나아가 더 발전하는 기회를 잡는 비결을 가르쳐주고 있는지 모른다.
오르테가 회장은 2011년 재산 375억 달러로 프랑스 명품제국 LVMH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에 이어 유럽 2위의 부자였지만 이제 유럽 최고의 부자로 올라섰다. 그는 2011년 부회장으로 있던 전문 경영인 파블로 이슬라에게 회장직을 물려줬지만 여전히 인디텍스의 지분 59.29%를 보유하고 있다. 회사 주가가 더 올라 그 해에만 재산이 65억 달러 불었다.
#2. 정보기술(IT) 같은 첨단업종이 아닌 섬유·패션 같은 전통 산업에서도 얼마든지 세계적인 거부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데 있다. 세계 경제를 이끄는 IT·전자·자동차·제철·금융·건설·해운·항공 같은 첨단 업종에 진출하지 않고 패션 단일 업종으로 거뜬하게 세계 3위의 부호에 오른 것이다.
그는 자신을 세계적인 부자로 만든 핵심 브랜드 자라를 1975년 세웠다. 전 세계에 1763개의 매장이 있다. 지난해 137억9000만 유로의 매출을 올렸으며 19억3200만 유로의 순익을 냈다. 전 세계에 12만명의 직원이 일한다. 자라는 인디텍스 그룹의 플래그십이다.
자수성가형 부자의 전형1986년에는 젊은층이 즐겨 입는 캐주얼 복장 중심의 패션과 액세서리 브랜드 풀 앤드 베어를 세웠으며 현재 전 세계에 817개 매장이 영업 중이다. 1995년 인수한 고전적이며 우아한 브랜드 마시모두티가 630개, 1998년 인수한 소년·소녀를 위한 브랜드 베르슈카가 899개, 1999년 인수한 젊은 여성층을 겨냥한 스트라디바리우스가 794개, 2011년 인수한 란제리 브랜드 오이쇼가 529개의 매장이 있다.
그 외에도 2003년 세운 가정용품·가구·홈웨어 중심의 자라 홈이 364개, 2008년 세운 신발·핸드백·보석·선글래스 등 소품 중심의 우테르크에가 91개의 매장이 있다. 패션의 종합 브랜드화다. 이들 브랜드를 합쳐 전 세계에 5800개가 넘는 매장으로 오르테가의 메가 패션제국을 일궜다.
#3. 그를 주시해야 할 셋째 이유는 오르테가가 거대한 패션제국을 자기 손으로 창업하고 키운 자수성가형 부자라는 데 있다. 오로지 패션으로만 재산을 모은, 한 우물파기형 기업가라는 특징도 있다. 그는 1936년 스페인 레온 지방의 부스동고데아르바스라는 곳에서 가난한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살때 아버지가 스페인 서북부 갈리시아 지방의 소도시 라코루나로 발령받으면서 이주했다. 이곳은 오르테가의 실질적인 고향이 됐으며 지금도 인디텍스 그룹의 근거지다.
초등 교육을 받은 뒤 어린 나이에 셔츠를 만드는 작은 의류 제조업체의 보조 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셔츠 제조업체를 옮겨 다니던 그는 같은 회사에서 같은 일을 하던 로살리아 메라와 만나 결혼했다. 이 결혼은 결국 두 사람에게는 물론 세계 패션업계에도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부부는 자기 집 거실에서 여성 목욕 가운과 실내의류·란제리를 만들어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1972년 ‘고아(Goa)’라는 이름의 옷 가게를 차렸다. 고아라는 이름은 오르테가의 이름을 스페인식으로 이름-아버지 성-어머니 성을 늘어놓을 경우(Amancio Ortega Gaona)의 머리글자를 순서만 바꾼 것이다. 이 가게가 잘 돼 자라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오르테가의 세계적인 패션 왕국을 만든 기반이 됐다. 시작은 초라했으나 결과는 창대한 대표적 사례다. 창업 도전의 위대함을 손수 보여준 것이다.
#4. 그가 이룩한 글로벌 의류 유통 혁명이다. 오르테가가 만든 자라는 오늘날 대유행하는 ‘패스트 패션’의 대명사다. 소비자들이 의류를 패스트푸드처럼 소비하도록 패턴을 바꿔놓은 혁신 기업이다. 그는 의류를 골라 사는 ‘선매품’에서 고민 없이 구입해 단시간 소비하다 버리는 ‘편의품’으로 생산·유통·소비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꿨다.
옷이란 원래 장시간 고민 끝에 골라서 구입한 뒤 오랫동안 입는 제품이었다. 이런 것을 트렌드와 기분에 따라 구입해 몇 차례 입은 뒤 버리고 다른 걸로 바꾸는 제품으로 바꿔놓은게 자라다. 의류가 아니라 패션 트렌드를 파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의류 과소비와 자원낭비의 주범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자라는 한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선 명품과 일반 옷의 중간쯤되는 스타일 지향의 패션 제품이라는 이미지도 얻었다.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후발주자와 차별화에 성공했다.
자라는 매주 두 차례 신제품을 내놓는다. 그야말로 패션 디자인을 짧은 시간에 소비하고 버리는 대상으로 삼았다. 트렌드를 놓치면 곧바로 소비자의 외면을 받는 무시무시한 산업이다. ‘졸면 죽는다’라는 무시무시한 군대 구호에 딱 들어맞는 경우다. 그러므로 제품에서 지루함은 찾을 수 없다. 대신 항상 새롭고 유행을 선도하는 디자인의 옷을 소량 다품종으로 끝없이 내놔야 하는 부담이 있다.
그런 부담은 기업의 저력이고 노하우다. 후발주자가 함부로 따라오기 힘든 부분이 바로 이 디자인 속도전이다. 매장의 매니저들은 소비자들의 반응과 기대를 읽어내고 이런 정보를 모아 수백 명의 디자이너에게 전달한다. 이를 전해 받은 디자이너들은 순간적으로 소비자의 눈길을 끌다가 짧은 시간 안에 명멸한 수많은 디자인의 의류를 개발해 낸다. 놀라운 트렌드 더듬이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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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가 아니라 패션 트렌드를 판다자라는 한참 위로 올려다보던 ‘패션’이란 걸 소비자 눈높이에서 마구 소비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꿔놨다. 게다가 자라 매장에 가면 항상 새로운 디자인의 옷이 넘쳐났다. 아무리 자주 가도 새로운 디자인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매장에 매료되지 않을 소비자가 어디에 있으랴. 자라 방식은 전 세계에 수많은 아류를 낳았다.
하지만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자라 방식을 누구나 흉내 낼 수는 있지만 누구나 자라처럼 성공하긴 어렵다. 오르테가는 창의적인 의류 마케팅, 혁신적인 유통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옷 입는 즐거움을 준 기업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패션 매장을 편의점으로 바꾼 혁신가이기도 하다.
#5. 오르테가를 바라봐야 할 다섯 째 이유는 소비자에게 접근하는 그의 감각이다. 사실 자라를 비롯한 오르테가 소유의 브랜드는 매장 디스플레이에 강하다.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가 매장의 상품 전시·진열이다. 패션 디자인과 유통 분야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도메니코 데 솔레 구찌의 CEO는 “자라가 나를 매료시키는 것 중 가장 큰 게 고품격 매장 전시다. 의류업자로서 자신의 상품을 특히 진열창에 어떻게 진열하는 게 최고인지를 아는 사람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오르테가는 매장을 방문해 진열하는 작업도 현장에서 지휘한다. 진열 팀을 데리고 다니며 조명을 밤처럼 어둡게 했다가 대낮처럼 훤하게 했다가 하면서 갓 나온 새 디자인의 제품을 어떻게 하면 최고로 보이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가 방문한 매장은 그의 최종 재가 없이는 제품 진열을 마무리할 수 없다. 회장이 이렇게 관심을 보이니 전 세계 각지 매장의 전시·진열 책임자는 처절하게 혼신을 다한다.
#6. 돈에 대한 감각과 집요함이다. 그는 유로존 재정위기가 시작된 2010년 이후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보유 현찰을 동원해 헐 값에 사들였다. 이것의 값이 지난해 40억 달러 가까이 올랐다. 대표적인 부동산이 2011년 5억3600만 달러에 구입한 스페인 마드리드 43층짜리 랜드마크 건물 토레스 피카소다.
구글 스페인이 입주해 있다. 그 밖에 마드리드·런던 등 유럽 주요 도시는 물론 미국 뉴욕 59번가의 고층 빌딩도 구입했다. 시카고·샌프란시스코·보스턴 등 미국 대도시의 주요 빌딩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마이애미 해변 54층짜리 에피크 레지던스&호텔도 손에 넣었다.
#7. 평생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2011년 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자라의 패션 디자인에는 계속 관여한다. 은퇴한 후에도 일하는 게 건강의 비결이다. 자수성가한 부호의 특징이기도 하다. 스페인 라코루나의 오르테가 집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는 스페인 통신회사인 재즈텔의 창업주 마르틴 바로브스키를 외신이 간접 인터뷰한 게 오르테가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드문 목격담이다.
바로브스키의 전언에 따르면 오르테가는 패션 디자인을 일일이 챙기기를 좋아한다. 자라를 비롯한 인디텍스의 웬만한 브랜드 신제품은 그의 손을 거쳐간다. 디자인을 손수 관리하는 것은 물론 이를 직접 재봉까지 한다.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디자인 작업에 직접 나선다. 아직도 현역 재단사이자 디자이너임을 자임한다.
오르테가는 세 가지 점에서 유별나다. 하나는 소탈한 은둔형 기업인이라는 점이다. 60대인 2000년에야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증명사진 말고 사진이 찍힌 건 당시가 거의 처음이다. 이듬해 있을 인디텍스 상장을 앞둔 기업 소개 행사에서였다. 하지만 인터뷰는 한 적이 없다.
패션 제국의 황제인데도 격식 없고 검소한 복장이다. 결혼식때 외에는 평생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그렇다고 노타이의 패셔너블한 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세계적인 패션 제국 황제의 복장은 창업 당시와 마찬가지로 티셔츠에 청바지다. 게다가 세계적인 부호인데도 생활 근거지는 고향인 스페인 서북부 라코루나다. 그 동네 검소한 아파트에서 재혼한 부인과 산다.
은퇴 후에도 일 놓지 않아조강지처와 이혼하면서 별 잡음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도 독특하다. 첫 부인 로살리아 메라와 이혼하면서 인디텍스의 지분 7%를 떼줬다. 이 때문에 로살리아의 재산은 주식과 이것저것 합치면 35억 달러나 된다. 스페인에서는 물론 세계에서 손꼽히는 여성 부호다. 로살리아는 자선재단인 파이데이아 재단을 세워 운영한다.
막내딸 사랑도 유별나다. 오르테가는 전처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었지만 후처와의 유일한 자녀이자 막내딸인 마르타에게 경영 수업을 시켰다. 그런데 오르테가는 지난해 12월 딸 마르타와 승마선수 사위 세르히오 알바레스가 캄보디아와 호주 등지로 신혼여행을 다니는 장면을 촬영한 파파라치의 사진을 무려 50만 달러나 주고 구입해 유출을 막은 것으로 알려졌다.
거액을 주고 공개를 막은 사진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밝혀지지 않아 숱한 억측을 불렀다. 마르타는 인디텍스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다 지난해 2월 스페인의 유명한 승마선수인 세르히오 알바레스와 결혼했다. 오르테가는 사위를 위해 승마트랙을 통째로 구입해 선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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