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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O-KOREAN RELAT IONS - ‘저평가 우량주’ 러시아를 잡아라

RUSSO-KOREAN RELAT IONS - ‘저평가 우량주’ 러시아를 잡아라

냉전 종식 후 러시아의 영향력 급감했지만 2000년대 들어 성장세 접어들면서 중요도 갈수록 높아져
러시아는 천연가스 수출국들이 결성한 기구 가스수출국포럼(GECF)을 주도하는 자원부국이다.



“러시아는 앞으로 항상 두 날개로 날아갈 것 입니다.”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처음으로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했던 말이다. 푸틴이 말하는 두 날개는 유럽과 아시아를 뜻한다. 두 지역 사이에 위치한 러시아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측을 모두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의미다.

2012년 3기를 맞은 푸틴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200억 달러가 넘는 예산을 쏟아붓고, 국정연설에서 “21세기 러시아의 발전은 동쪽을 향해 있다”고 발언한 것을 계기로 언론은 러시아의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을 재차 부각시켰다.

아시아 국가와 외교 관계를 심화하고 아시아와 인접한 극동러시아 지역 개발에 힘쓰겠다는 푸틴의 정책 기조에는 ‘신동방정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00여 년 전 제정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블라디보스톡을 확보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면서 동방 개발에 힘썼던 옛 동방정책에서 따왔다. 블라디보스톡이라는 이름 자체가 지배를 뜻하는 접두어 ‘블라디(влады-)’와 동방이라는 의미의 ‘보스톡(восток)’을 합친 단어다.

때마침 박근혜 대통령이 5월 ‘신북방정책’을 추진한다고 선언하면서 푸틴 정부의 ‘신동방정책’과의 동반 상승효과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박 대통령의 ‘신북정책’은 과거 노태우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북방정책에서 따온 것으로, 현오석 경제부 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 따르면 “러시아와 경제협력뿐 아니라 정치·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이다.

현 부총리가 5월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이런 구상을 내보인 데 이어 7월 ‘제13차 한러 경제과학기술 공동위원회’에서 양국 장관이 시베리아 철도와 북극항로 개발 등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하자 그런 기대는 더욱 커졌다. 당시 기재부측은 그 공동위원회가 “한국의 신북방정책과 러시아의 신동방정책이 추진되는 시점에서 양국 간 새로운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과거에도 그랬듯 여전히 한국의 외교 중요도 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듯하다. 양정훈 수원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 교수는 “양국이 수교한지 어언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기대만큼의 변화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국과 러시아가 각각 ‘신북방정책’과 ‘신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한러 관계 발전이 중요한 지점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북방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당시 한러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양국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런 지점에서 양국 정부가 외교에 임하는 적극성이야말로 수십 년 간 답보 상태였던 현안들에 돌파구를 마련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한러관계에서 이뤘던 성과도 그랬다. 1990년대 초 냉전이 종식되면서 국제 정세는 한 차례 격변을 일으켰다.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의 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외교 판을 짜야 했기 때문이다.

한러 관계가 급격히 진전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북방외교라는 이름 아래 소련과 중국 등 북쪽의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외교를 펼쳤다. 1990년 6월 노태우 전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정상회담을 가졌고, 9월에는 한러 수교를 맺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양국 간 우호협력 의지를 담은 모스크바 선언을 고르바초프와 공동으로 발표한 데 이어 1991년 1월 한국 정부가 소련 정부에 차관 30억 달러 공여를 약속하는 등 양국 관계는 급물살을 탔다.

냉전체제에서 거리를 두고 있던 한러 양국이 짧은 시간 동안 이처럼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까닭은 “세계사의 시대적 흐름과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라고 양 교수는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정부가 아무리 노력을 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성과를 가져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소련은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인접국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이에 응하는 국가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한국은 북한을 견제하고 국제무대에서 위상을 높이기 위해 소련과의 외교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호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러를 협력의 장으로 이끌었던 시대적 흐름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한러 관계는 빠르게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가 차관 상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양국 관계에 불협화음이 생겼다. 여기에 더해 1996년 북러군사동맹조약까지 폐기되면서 러시아를 통해 대북 안보효과를 누리려 했던 한국 정부로서는 러시아와의 외교에 힘쓸 동기를 상당 부분 잃고 말았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한러는 “새로운 전략적 공유점을 마련하지 못한 채 다시 표류하기 시작했다”고 양 교수는 말했다.

그렇기에 ‘신동방정책’과 ‘신북방정책’이 만나 추진력을 얻은 현 시점이야말로 한러관계를 대폭 증진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다. 러시아와의 관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자원 부국인 러시아와의 경협을 통해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다.

학술 교류를 통해 우주기술 등 러시아가 보유한 고급 원천기술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남북관계를 비롯한 동북아 외교안보 지형에서 한국이 입지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냉전 이후 급감했던 러시아의 영향력은 지난 10년 간 크게 회복됐다. 신범식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는 “탈냉전 이후 러시아의 권력은 급속히 약화된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2000년 푸틴 대통령 등장 이후 러시아는 아시아 지역에서 일정한 지분과 발언권 그리고 역할을 지닌 지역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데 비해 외부의 평가는 그만큼 회복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러시아는 현재 앞으로 행사하리라고 기대되는 영향력에 비하면 ‘저평가 우량주’에 해당한다는 얘기다.

“한국이 가진 외교적 역량엔 한계가 있고, 이 제한된 역량을 어떻게 배분하느냐가 문제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러시아에 외교력을 더 투자할 여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이 어려운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 외교력을 더 투입한다고 하면 가장 얻을 것이 많은 나라가 러시아라는 점은 분명하다.” 미국과 중국에는 이미 충분히 공을 들이고 있고,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로 협력이 어려운 상황에서 러시아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신 교수는 덧붙였다.

러시아는 동북아에서 세력 다툼을 벌이는 미중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더 가치가 있다. 위성락 주 러시아 대사는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주변국 중 현재 러시아가 차지하는 포지션이 가령 16분의 1에 불과하다 해도 중국과 러시아 사이엔 일정한 공조가 있기 때문에 러시아라는 지렛대를 활용해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을 움직일 수도 있다”며 “한러 관계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증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러시아 지도부는 세계정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강대국으로서의 명분을 얻기 희망하지만, 러시아의 능력은 일정한 한계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며 “그때문에 경쟁의 주역이 되기보다는 그 경쟁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면서 세계정치 무대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모색한다”고 말했다. “동북아에서 미중간 경쟁의 심화는 러시아의 입지와 역할을 더욱 강화시키는 조건이 될 수 있다.”



러시아가 남-북-러 삼각 경협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러시아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원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동북아 내 지위를 높이길 원한다. 뿐만 아니라 신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러시아는 남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에 우호적인 입장이다.

“중국에 비해 러시아는 남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로부터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국가다. 통일 한반도와 접경국이 됨으로써 동북아에서 무시할 수 없는 발언권을 갖게 되고, 한국 사회가 러시아에 대해 갖는 ‘지리적 원격성’이라는 심리적 장벽도 약화시킬 수 있다.” 양 교수 역시 “한반도 문제에서 인접국 중 한국에 가장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는 국가가 바로 러시아”라고 말했다.

2011년 대표적 삼각 경협인 남-북-러 가스관 설치 사업 관련 논의가 활발히 오갈 당시 러시아는 상당히 호의적인 입장을 보인 바 있다. 북한을 통과하는 배관공사를 자체 비용으로 선 투자하고, 가스 인도지점을 남북한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한국측 요구도 수용했다. 이로써 가스가 북한을 통과해 한국에 도달하기까지의 공급 책임은 전적으로 러시아가 지는 것이다.

남-북-러 가스관 사업의 법적 측면을 오랜 기간 연구한 이유진 박사(법학)는 “러시아가 제시한 공급안정성 보장 조건 일부는 러시아가 다른 나라와의 가스 공급 사업에서는 일반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것들”이라며 “이 사업에 대한 러시아측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특히 북한의 도발로 가스 공급이 차단될 경우 LNG를 대체 공급해달라는 한국측의 요구에 원칙적 합의를 해준 부분은 여타의 다자 간 사업계약에서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이는 작은 경협에서 시작해 큰 경협으로 나아간다는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구상이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 재가동 회담에서 중시했던 북한 국제화와 맞닿아 있다. 만약 가스관이 북한 땅 밑에 설치된다면 러시아의 자산이 북한 내에 놓임과 동시에 러시아가 공급 책임을 지는 가스가 북한을 지나게 된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폐쇄할 때처럼 일방적으로 가스 공급을 차단하기 어려운 이유다. 남북러 가스관 사업을 주관하는 러시아 가스업체 ‘가스프롬’의 사보 편집장 세르게이 푸라바수도브는 “북한 정권이 가스 공급을 차단하면 통과료를 받지 못할뿐 아니라 러시아와의 관계를 크게 해치게 된다”며 가스관을 도발 목적으로 이용하기가 어렵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앞당긴다는 점에서도 남-북-러 삼각경협은 중요하다. 이 박사는 “북한이 통과료로 현물인 가스를 받게 될 경우, 북한 내 가스 사용 발전소 건설이 가능해지고 전력부족으로 지지부진한 북한의 지하자원 개발과 산업화를 지원함으로써 변화를 유도하는 계기가 될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측도 이 사실을 잘 아는 듯하다.

일각에서 남북러 가스관 사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일어나자 푸틴은 “북한의 개혁 주체는 김정은이나 군대, 인민이 아니라 부엌에서 밥 짓는 아낙네”라고 말했다. 이병화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은 7월 한반도통일경제포럼에서 “러시아 가스가 북한 가정에 공급되면 바깥에 있는 부엌이 안방으로 옮겨오면서 가정주부의 해방이 이뤄진다”며 북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전망했다.

개성공단 재가동 협상이 타결되고 금강산 관광 재개 회담 논의가 오가는 남북 간 화해분위기는 한러 관계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추진력이다. 남북러 가스관 사업이 오랜 기간 지체된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로 인한 긴장 고조였다. 올해 상반기 극에 달했던 한반도 내 긴장이 완화되면서 가장 큰 문제도 함께 해소된 격이다.

이 박사는 “이와같은 다자간 사업을 진행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각국이 지분참여를 해 합작회사를 설립하기도 하는데, 2011년 이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던 당시엔 남북관계가 좋지 않아 러시아가 단독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었다”고 말했다. “만약 개성공단 남북공동위원회 같은 공동조직이 원활하게 운영된다면 가스관사업과 관련해서도 남-북-러 3국의 합작회사가 북한 내에 설립되고, 우리측 기업과 기술자들이 북한에 가서 러시아, 북한측 인력들과 함께 통과 배관의 운영에 참여하는 일도 기대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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