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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O-KOREAN RELATIONS - 고려인이 주는 교훈

RUSSO-KOREAN RELATIONS - 고려인이 주는 교훈

“통일에 앞서 먼저 한민족이라는 정체성부터 확보해야 한다”



김성민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 연구단장의 사무실 벽면에는 축척이 1:150만에 달하는 대형 아시아 지도가 걸려 있었다. “여기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이동한 거죠.” 김 단장은 지도 한쪽 구석에서 반대편 끝까지 손가락으로 주욱 선을 그으며 말했다.

지도가 워낙 커서 그가 손으로 이은 두 선을 눈으로 훑는 데만 몇 초가 걸릴 정도였다. 서울에서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1만㎞의 여정. 유라시아 대륙의 약 4분의 3을 가로지르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경로를 지도에서 확인하니 실로 엄청난 길이였다.

김 단장은 국제한민족재단과 건국대학교 통일연구단이 공동 주최한 ‘제2회 시베리아횡단 역사도전 탐사 대장정’에서 학자, 학생, 언론인, 일반인을 포함해 총 30명의 일행과 함께 8월 11일부터 23일까지 13일 동안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누볐다.

인천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이동 후 인천으로 돌아오는 이 여정은 “고려인의 강제이주, 항일독립운동 등 러시아 전역에 퍼져 있는 한민족의 자취를 탐방하기 위해서” 마련됐다. 탐사단은 세계 최초의 코리아타운 ‘신한촌’과 고려인문화센터, 고려인들의 강제이주가 시작된 라즈돌리노예역 등 고려인의 흔적을 방문했다.

고려인들은 1800년대 말 처음으로 러시아 남우수리 지역에 이주하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주민들은 매년 증가했다. 1910년 고려인의 수는 5만4076명에 이르렀고, 1923년 10만 명, 1927년에는 25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조선의 빈곤과 기아, 억압이 주된 이주 원인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항일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거주 한인들이 학살당하는 일도 있었고, 러일전쟁 때는 일본의 간첩으로 오인받아 러시아 당국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스탈린이 민족이동정책을 펼치던 1930년부터 1937년사이에는 소련 극동지역에 살던 한인 약 20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돼고 이 과정에서 2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적지 않은 수난을 겪었다.

김 단장이 ‘통일인문학’의 기치를 들고 고려인들의 터전을 찾은 이유는 단지 역사 공부때문만은 아니다. 남북통일을 위해선 남북뿐 아니라 전 세계를 두루 살필 수 있는 넓은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김 단장의 생각이다. 특히 고려인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한인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식민지배와 분단을 겪은 후 한반도를 떠나야 했던 동포 대부분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 정착했는데 그 수가 현재 약 750만 명”이라고 김 단장은 말했다.

국가별로 전체 인구 대비 재외동포 인구의 수를 비교해보면 한국이 약 10:1로 유대인을 제외하고 세계 1위다. ‘화교’로 널리 알려진 중국 해외 거주민의 수는 한국보다 5배 가량 많지만 전체 인구에 대한 비율은 2%에 지나지않는다. 그만큼 한국이 겪어야 했던 이산의 수모가 컸다는 의미다.

재외동포와 남북통일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김 단장은 남북이 정치적, 경제적 통일을 넘어 ‘인간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선 새로운 형태의 민족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통일인문학연구단의 주요 과제 중 하나다. “과거의 민족 개념은 한반도에 국한됐었는데 이제는 휴전선 이남으로 더 좁아졌다. 젊은 세대의 경우 북한이 왜 우리와 같은 민족인지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고려인들은 한국과 같은 명절을 지내며 행사를 갖는다.
통일을 당연한 ‘민족의 과제’로 여기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노래했던 과거의 방식으로는 통일의 필요성을 납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북한을 이질적이고 사악한 집단으로 보는 대신 그들이 왜 그렇게 변했고,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무엇인지 규명하고 그 차이를 아우르는 더 포괄적인 한민족 개념을 잡아내야 한다”고 김 단장은 말했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체제만 통일할 경우 이후 일어날 갈등을 극복하기가 쉽지않으라는 것이다.

이번 탐방도 보다 넓은 시각에서 한민족을 바라보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고려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김 단장은 “고려인들은 서운함이 많다”고 말했다. 재중 조선족이나 재일 조선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국가의 지원이나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첫 해외 정착지로 알려진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정착촌 ‘신한촌’은 현재 모두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우수리스크에는 고려인 1세대이자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살았던 집도 그대로 남아 있지만 현재는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어 내부를 볼 수가 없다.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을 기념해 문 앞에 ‘최재형의 집’이라는 안내판이 부착되기 전까지는 찾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국 정치인들이 우수리스크를 방문해 ‘고려인 마을을 지어주겠다’고 공언하며 성대한 대접을 받았지만 이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김 단장은 “현재 러시아에 거주중인 고려인 대부분은 한국어를 많이 잊어버린 상태”라며 “이들이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서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 단장이 고려인들과의 대화에서 또 한가지 주목한 점은 그들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였다. 김 단장이 만나 대화를 나눈 고려인들은 대개 고려인 2세, 3세로 일제강점기나 강제이주 같은 수모를 직접 당한 세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현지 고려인들과 함께 과거 고려인들이 겪었던 역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은 어김없이 눈물을 보이거나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말했다. “직접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했고, 현재는 러시아 현지에 적응해 사는데 별 어려움이 없는데도 그 아픔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이런 트라우마는 고려인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김 단장은 한민족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수난을 겪으면서 민족적, 역사적 트라우마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일제강점기를 겪지 못했지만 일본의 군국주의적 발언을 듣게 되면 아픔을 느끼거나 분노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후에 태어나 북한으로부터 이렇다 할 피해를 직접 입지 않은 현 세대들이 오히려 과거 세대보다 더 북한에 적개심을 갖는다. 이런 일련의 집단적 반응들이 트라우마의 한 양상이다.”

김 단장에 따르면 이런 집단 트라우마는 다른 민족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어느 민족이든 종교분쟁, 인종분쟁 등 다양한 상처를 가졌겠지만 한민족처럼 단기간에 식민지배와 분단, 이산을 모두 겪은 경우는 유례가 없다. “이를 치유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바로 통일”이라고 김 단장은 강조했다.

김 단장은 통일을 하려면 경협뿐 아니라 문화교류, 학술교류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시도된 정치적, 경제적 통일은 ‘우리 체제가 우월하니 너희들이 따라오라’는 식이었지만 학술문화 교류는 남북이 서로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교류에서는 갈등의 소지가 거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0년 시작됐던 개성의 고구려 유적지 만월대 공동발굴 작업이다. 이 사업을 위해 국내 역사학자들이 북한에 방문해 북한측 학자들과 공동으로 연구와 발굴작업을 수행했지만 남북관계 경색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사망 등으로 중단됐다.

학술문화교류에서는 고려인을 비롯한 해외 동포들이 큰 힘이 된다. 김 단장은 “고려인들은 한민족의 역사와 정서에 공감하되 해외에서 오래 살았기때문에 남북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며 “또한 고려인 중에는 러시아뿐 아니라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도 상류층에 자리한 사람이 많고, 이들은 북한 왕래가 자유로워 남북한을 연결하는 사절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연변대가 매년 주최하는 두만강학술포럼에는 남북 양측 학자들을 포함해 세계 각국에서 학자들이 모여 함께 비정치적 주제를 놓고 학술토론을 한다. “정부에서 북한 출입을 허용하지 않으니 접경지대에서 만나는 것”이라고 김 단장은 설명했다. “북한에 직접 왕래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학술교류를 하기 원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그런 연구자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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