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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세 빌미로 2차 돈 풀기

소비세 빌미로 2차 돈 풀기

아베노믹스 약발 약해지자 궁여지책 … 재정 부담만 커질 수도



일본 정가에서 소비세 인상은 ‘정치인의 무덤’으로 통한다. 역대로 소비세라는 세목을 신설했거나 소비세율을 올린 총리치고 장수한 사람이 없다. 그만큼 유권자들의 저항이 큰 사안이다.

가깝게는 지난해 소비세 인상 법안을 밀어붙인 민주당 정권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를 들 수 있다. 그 역시 소비세 저주를 피하지 못한 채 자민당의 아베 신조 현(現) 총리에게 정권을 넘겨야 했다.

지난해 여야 3당 합의로 통과된 소비세 인상 법안의 시행 여부를 두고 아베 내각과 자민당에서 소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이런 과거의 경험 때문이다. 경제적 관점에선 모처럼 부흥의 기회를 잡은 일본 경제가 소비세 인상으로 다시 둔화 국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자리하고 있다.

1997년 초 소비세율을 3%에서 5%로 인상한 후 내수경기가 가파르게 꺾인 경험이 정치권엔 강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사실 이 무렵 일본의 경기 침체는 한국 등 아시아 환란(煥亂)에 기인한 측면이 적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日 정부 소비세 인상으로 기울어지난해 여야 3당 합의로 통과된 소비세 인상법안은 현행 5%인 소비세율을 내년 4월부터 8%, 이듬해인 2015년부터 10%로 올리는 내용을 담았다.

소비세를 더 걷자고 합의한 건 일본의 부실한 재정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올 상반기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정부 재정적자 비율은 10.3%에 이른다. OECD 회원국 평균(4.3% 적자율)의 두 배를 넘는다. 부채 상한(Debt Ceiling) 협상 때문에 떠들썩한 미국(5.4% 재정적자율)의 재정상태는 일본에 비하면 애교로 봐 줄만 하다.

수십 년 간 누적된 일본의 재정적자는 GDP 대비 200%를 넘어서는 국가 부채를 남겼다. 구멍 난 재정을 적자 보전 국채로 메운 결과다.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재정적자를 지금이라도 바로잡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리스 꼴이 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지난해 ‘소비세 인상법안’이라는 결과물을 낳은 것이다.

그런데 소비세 인상법안에는 경기 조항이라는 부칙이 포함돼 있다. ‘정부는 실질기준 GDP 2% 성장, 명목기준 3% 성장을 경주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이 조항에 근거, 내각은 오는 10월까지 경기 흐름을 살펴 소비세를 실제 인상할지 말지를 결정하도록 돼 있다.

그간 아베 내각에선 아소 다로 재무상을 중심으로 ‘재정 재건은 국제적 약속이니 예정대로 소비세를 인상해야 한다’는 법안 고수론이 주류였다. 이에 대해 아베 총리의 경제 스승인 하마다 고이치 내각관방 참여를 중심으로 ‘아베노믹스 효과를 반감시킬 것이니 세율 인상 시기를 연기하거나 인상폭을 줄이자’는 절충안이 맞서왔다.

그러다 8월 말 민관 전문가로 구성된 ‘집중점검회의’에서 패널로 참여한 전문가 70% 가량이 예정대로 소비세율을 올려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내각 분위기도 인상 쪽으로 기운 듯한 분위기다. 소비세를 예정대로 인상하지 않아 재정의 신뢰를 상실하면 국채 투매를 불러와 금리가 오르고 이로 인해 경기가 둔화되고 재정의 국채이자 부담만 커진다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늘 군더더기를 남긴다. 최근 소비세 인상을 둘러싼 논의가 애초 취지와는 달리 옆 길로 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비세를 예정대로 인상하되, 내수경기에 미치는 충격을 상쇄하기 위한 보완책이 거론되는 것이다.

정부가 5조~10조엔 규모의 추가경정 예산안을 편성하고 법인세를 감면해 경기부양에 나서는 한편, 일본은행(BOJ)도 양적완화 규모를 확대하는 등 추가적인 완화조치를 내놔야 한다는 여론이 당 안팎에서 형성됐다. 때를 맞춰 아마리 아키라 경제재생상과 아소 다로 재무상도 추경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역시 소비세 인상으로 경기가 흔들릴 경우 추가 완화에 나설 의향이 있음을 시사했다.

재정을 바로 세우겠다며 소비세를 인상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나라 재정을 허물어 돈을 더 풀 궁리를 하는 것이다. 이율배반이다. 물론 소비세 인상에 따른 세수 확대는 영속적인 효과를 갖는데 비해 추경은 일회적 비용인 만큼 장기적 관점에서 재정에 미치는 부담은 제한적이다. 오히려 경기 위축을 막아 디플레이션 탈출을 돕는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 20년 간을 그런 식으로 재정을 망가뜨리며 나라 빚을 늘려 왔다. ‘이번 부양책은 단기적으로 재정에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기업 활동과 고용을 늘려 경제를 선순환시키는 한편 세수 증진을 도모해 결과적으로는 재정에도 이롭다’는 과거 논리의 동어반복인 셈이다.

이 같은 논리에 입각해 일본은 매년 재정을 통한 부양책을 폈고, 한계에 직면한 ‘좀비 기업’의 부실을 공적자금으로 메워 왔다. 이를 위해 발행된 막대한 양의 국채는 중앙은행이 수시로 매입했다. 실제 중앙은행에 의한 국채 매입, 즉 양적완화의 원조는 미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최근 소비세를 둘러싼 논의의 전개를 살펴보면 일본은 여전히 지난 20년간 중독된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돈 푸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지구상에 빈국(貧國)이라는 단어는 일찌감치 사라졌을 거다. 일본이 수십 차례 반복된 부양책과 중앙은행의 완화정책에도 디플레이션 국면을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근본 치료, 즉 고통을 감수한 구조조정과 복지지출 개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권은 짧고 디플레는 길다 … 기업들 기본급 동결이를 바라보는 무라타 마사시 BBH(브라운브라더스해리먼) 외환 전략분석가의 통찰은 날카롭다. 그는 “6월 이후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에서 아베노믹스가 한계를 드러내자 아베는 소비세 이슈를 이용해 새 모멘텀을 만들어 내려 한다”고 말했다. 금융시장에서 아베노믹스 약발이 떨어지자 ‘소비세 인상+추경+추가 양적완화’라는 패키지를 꺼내 들 명분을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엔 약세와 일본증시 상승의 불씨를 되살리려 한다는 이야기다.

추가 모멘텀을 원하는 시장으로선 반가운 시나리오다. ‘엔 매도-일본증시 매수’ 전략으로 올 상반기 재미를 본 시장 플레이어들로선 다시 한번 목돈을 만질 수 있는 재료다. 이 같은 시나리오가 현실화해 달러·엔 환율이 급등세(엔 절하)를 재개한다면 주변 신흥국의 수출 산업은 더 갑갑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일본의 통화정책을 둘러싼 주변국의 반감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돈 푸는 것 외에 뾰족한 수를 보여주지 못한 아베노믹스는 장기적으로 과거 정책의 실패를 답습할 가능성이 크다. 내수 비중이 큰 일본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선 무엇보다 가계소비가 뒷받침돼야 한다. 그러나 5인 이상 사업장의 근로자 고정급여(기본급)는 오히려 14개월째 감소했다. 기업들은 엔 절하 효과로 늘어난 이익을 일회성인 상여금 형태로만 배분할 뿐 기본급을 인상하진 않았다.

기본급이 오르지 않고서는 소비의 항속성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런데 왜 기업들은 근로자의 기본급을 올려주지 않는 걸까. 이번에도 반짝 회복에 그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정비용을 늘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정권의 수명은 짧고 디플레이션은 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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