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PLOMACY - 대초원에서 펼쳐지는 ‘치킨게임’
DIPLOMACY - 대초원에서 펼쳐지는 ‘치킨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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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왜 역사문제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걸까요?” 2013년 7월 초 한국 정부가 주최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한 필자에게 한 정부 관계자가 물었다. “답은 간단합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 사람들은 머지않아 한국이 경제난을 견디지 못해 먼저 굴복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 나는 “물론 저는 그런 예상이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그 정부 관계자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도 한국과 똑같네요. 한국에서는 중국 등과 협력해서 압력을 가하면 언젠가 일본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리라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돈 뒤 그는 중얼거렸다. “정말 난처하게 됐네요.”
한국에서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지 7개월, 일본에서는 아베 정권이 재탄생한 지 9개월도 더 지났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아직도 정상회담을 갖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정상회담이 언제 이뤄질지 예측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다. 아주 이례적이다. 1987년 한국 민주화 이후 한일 양국은 한국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할 때마다 성사 여부와는 별개로 조기에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아베가 총리로 취임한 것은 2006년에 이어 두 번째인데, 지난 7년 간 아베의 주장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아베는 지난 정권에서도 헌법개정론을 펼쳤고, 집단적 자위권 적용을 주장했으며 종군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인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베는 전혀 우경화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우익 성향 정치인이었다.
아베의 현재 정치적 태도가 7년 전과 다르지 않다면 이 두 시기의 한일관계가 큰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뭘까? 당시 한국 대통령이었던 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한일 역사인식 문제에 관심이 깊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진보 진영에 속했던 노 전 대통령과 일본의 전형적인 보수정치인 아베의 사이에는 이념적인 간극도 있었다. 북한을 비롯한 동북아 국제관계 문제에서도 양측이 일치하는 부분은 극히 적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2006년 당시 한일 양국은 대화를 계속했다. 총리에 취임한 아베는 고이즈미 정권 하에 관계가 악화됐던 한중 양국을 첫 순방국으로 선택하고 취임 직후 중국과 한국을 방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 많은 한국 매체는 아베 정권을 호의적으로 보도하며 아베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던 한일관계 개선에 돌파구가 되리라는 기대를 드러냈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2005~2006년 한일 관계 상황과 오늘날의 가장 큰 차이는 한일 양국의 국내 상황도, 영토나 역사인식 문제도 아니다. 2005년부터 오늘날까지 영토나 역사인식 문제를 대하는 한일 양국 정부의 자세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이런 문제를 둘러싼 객관적인 상황이 변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분명 예전 같지 않다. 과거와 현재의 가장 큰 차이는 상황을 해결하고자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적어졌고, 한일 양국 정부의 소통 수준도 크게 저하했다는 점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 식민지 지배부터 해방 이후까지 한일 간에는 항상 문제가 많았다.
그럼에도 양국 관계가 파탄에 이르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이유 중 하나는 위기 상황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선 사람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1980년대 한일관계에 큰 공을 세운 세지마류조가 있었고, 2000년대에도 일본 광고업체 덴쓰의 회장이었던 나리타 유타카 등이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재 한일 양국에는 그런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를 몇 가지 꼽아보면 이렇다. 첫째는 한일 양국의 세대교체다. 세지마가 전 일본 육군 참모로서 군사정권 시절 한국에 깊은 인맥을 형성하고, 나리타가 식민지배 시절 한반도에서 태어났듯이 일본의 ‘지한파’ 대다수는 식민지배 시절부터 계속된 한일 양국의 복잡한 과거와 연을 맺은 인물들이었다.
한국측에서 그들의 교섭 상대로 나선 것은 일제 치하에 일본어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로, 한일 간 대화가 일본어로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도 일본과 교류 역할을 맡았던 것은 1935년생인 이상득 의원이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한일관계가 얼마나 식민지배의 잔재 하에 이뤄졌는지 알 만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지일파, 지한파가 탄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한일 양국이 서로에게서 가치를 이끌어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에서 일본의 중요성이 저하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일본은 한국 수출입의 40%를 차지했지만 이제는 1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는 흔히 한국인들이 오해하듯 일본 경제가 불황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 수출입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일본 경제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던 1980년대에도 70년대보다 크게 떨어졌다.
게다가 같은 시기 미국의 점유율도 35%에서 10% 이하로 떨어졌다. 냉전 체제 최전선에 놓여 있어 중국이나 소련과 국교를 맺지 못한 가난한 개발도상국 한국이 경제개발을 일궈내고 냉전이 끝나 국제관계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미국이나 일본 의존도가 낮아진 것이다.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일본 내 한국의 존재감은 한류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많이 향상되지 않았다. 예를들어 일본 무역에서 한국의 비중은 6% 정도로 낮게 유지되고 있다. 휴대전화 등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삼성이나 LG, 현대 같은 한국의 세계적 기업들이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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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한국 내에서 일본의 경제적 중요성은 낮아졌고, 일본 내에서 한국의 중요성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게다가 한일 간에 존재하는 상호의존 관계는 갈수록 일반인들이 알기 어려운 형태로 변해간다. 예를들어 현대자동차 앞 덮개를 열면 ‘미쓰비시’ 로고가 새겨진 엔진을 볼 수 있었던 1980년대에는 양국의 상호 의존관계가 누가 보기에도 뚜렷했다.
물론 오늘날에도 가령 삼성전자의 휴대전화를 분해해 보면 상당 수 일본제 부품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일반인은 어떤 부품이 일본제고 휴대전화의 성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알 길이 없다. 이렇게 한일 상호의존관계는 점차 시야에서 사라져 간다.
이런 이유 탓에 사람들은 양국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정치인이든 경제인이든, 언론인이든 지식인이든 간에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큰 동기가 사안을 둘러싼 이익인 이상, 새로운 이익이 대규모로 발생하지 않는 분야에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현장에서 외교를 담당하는 외교관들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 내에서 일본의 중요성이 낮아지면 당연히 한국 내 일본 전문가들의 지위도 낮아진다. 물론 일본측 한국전문가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양국 전문가들이 점차 사라지고 나면 양국을 연결할 고리도 줄어든다.
똑같은 일이 안보분야에서도 일어난다. 한일 양국이 오늘날 동북아 정세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가장 큰 현안은 미중관계다. 일본 정부나 대다수 일본인은 미중관계를 기본적으로 대립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이 중국과 대립하더라도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리라는 계산 하에 움직이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 정부는 미중 양국 사이에서 ‘연미연중’ 노선을 선택했다. 미중관계를 대립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글로벌화하는 세계에서는 궁극적으로 공존을 택하리라고 전망한다. 때문에 한국에는 중국에 접근한다고 해서 한미관계에 큰 손해가 일어나지는 않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미중관계를 둘러싼 이해 차이는 한일 양국의 상호 이해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미중 대립구도를 기본으로 동북아 기본질서를 생각하는 일본이 보기에 중국에 접근하는 한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진영에서 이탈하거나 혹은 중립화를 꾀하는 듯이 여겨진다. 반면 한국 입장에서는 영토문제 등으로 중국과 대립하는 일본이 미중관계를 곤혹스럽게 하는 문제아처럼 보인다.
이런 이해 차이는 한일관계에 장애가 된다.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을 전후해 일본 정부는 스스로 제창한 ‘가치관외교’에 입각해 한국과 대화를 시도했다. 즉 한일 양국은 똑같이 ‘서구 민주주의적인 가치관’을 공유하므로 협력 가능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 배경에는 보수 성향인 박근혜 정권이 미중 대립 구도를 기초로 움직이리라는 예측도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이 메시지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구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국가가 단결한다는 말은 곧 이를 공유하지 않는 국가, 구체적으로는 중국에 일본과 함께 대항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중시하는 박근혜 정부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을 것이다.
미중관계를 대립구도로 보느냐, 아니면 공존관계로 보느냐는 양국의 군사적 협력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중관계를 대립구도로 보는 일본 입장에서는 한국도 중국의 강대한 군사력에 노출돼 있으며, 이에 대항하려면 미군에 군사기지를 제공하는 일본과의 관계가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비롯한 일본과의 군사협력을 거부하는 한국 정부의 자세는 비합리적으로 여겨진다. 한편 동북아의 위협을 중국이 아닌 북한이라고 본다면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데, 그렇다면 한국으로서는 일본과의 군사협력을 딱히 서두를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한반도에 불필요한 긴장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한일 양국의 대중외교 노선이 다른 이유는 중국 자체에도 있다. 한일양국의 수출입 총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20%를 넘어서는 정도다. 이 수치만 봐서는 중국의 경제적 중요성은 한일 양국에 동등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중국관은 크게 다르다. 한국인들은 최대의 무역 상대국인 중국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자신들의 경제성장을 지탱해줄 원동력이라고 본다.
그런 한국인의 눈에는 영토나 역사인식 문제로 중국과 대립하는 일본이 어리석은 존재로 보인다. 실제로 2012년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일 시위 이래 중일무역은 축소했고 일본기업의 대중국 투자도 감소 추세로 돌아섰다. “일본은 언제까지 어리석은 행동을 계속할까요?” 한국인에게 이런 질문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같더라도 애초에 경제 전체에서 무역이 갖는 중요성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현재 무역 총액이 GDP에 필적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 GDP 대비 무역총액 비율은 20%밖에 되지 않는다. 즉 한국 입장에서 무역총액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과의 무역은 그대로 GDP에서도 20% 이상의 비중을 갖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GDP 대비 5%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에 비하면 일본경제는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 중국이 거대한 무역 상대국인 점은 분명하지만 원유처럼 전략적으로 긴요한 자원을 공급하는 국가는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과의 관계에서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영토나 민족의 자존심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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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양국을 둘러싼 상황이 크게 변했고, 그로 인해 양국 국민들이 국제관계를 보는 시각에도 차이가 생겼다. 문제는 그럼에도 여전히 양국 국민들은 그런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서두에서 소개한 에피소드는 바로 그런 인식 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인은 자신들이 아시아 유일의 경제대국이었던 시대를 상기하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한국은 불황에 빠지면 경제대국인 일본에 기대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IMF 외환위기를 겪을 당시의 한국을 떠올린다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본은 현재 한국에 그만한 존재가 못 된다. 과거보다 훨씬 더 힘을 키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도 여러 관계를 바탕으로 일본 외에도 다양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일본인들은 한국의 이런 변화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보기에 한국정부나 한국인의 행동은 아주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한국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 한국 입장에서 중국은 아주 중요한 국가이며, 그래서 중국과 원활한 관계를 맺으려 한다. 중국에 경계를 늦추지 않던 한국의 보수 언론들이 지난 수 년 새 중국과의 우호관계 구축을 적극적으로 부르짖기 시작했다.
조선일보같은 매체의 중국 관련 보도가 지난 몇 년 동안 어떻게 바뀌었는지 관찰해보면 흥미롭다. 한국 보수 언론에서 빈번하게 거론되던 중국 위협론이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오히려 한중FTA 등의 문제를 놓고 진보 성향 언론에서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거리낌을 표하는 모양새다.
그런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영토나 역사인식문제 때문에 중국과 협력하지 않는 일본이 아주 비합리적인 국가처럼 보인다. 물론 일본측의 행동에도 이유는 있다. 중일 무역의 부진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반면 한국이 중국과 손발을 맞춘 듯이 행동하는 모습은 일본의 민족주의를 자극할 뿐만 아니라 미중관계를 대립구도로 생각하는 일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되기 십상이다. 중국은 경제력을 내세워 한국을 자신의 진영으로 포섭하려 하고 있고, 일본은 거기에 끼면 안 된다고 말이다. 이렇게 일본측은 한층 더 완고해지고, 정치적 양보를 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와 같은 일본측 사정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일본의 행동이 그저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일본은 불합리한 국가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인식이 형성된다. 이렇게 한일 양국은 서로를 비합리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국가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관계 개선은 난관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왜 자신들의 메시지가 상대측에 전달이 안 되는지, 상대측이 어떤 원칙에 입각해 움직이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일 양국의 행동은 이와 전혀 다르다. 서로에게 원리원칙을 들이대면서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 더 골치 아픈 문제는 서로에게 들이댄 카드가 효과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한일 양국 간에 ‘치킨게임’이 펼쳐진다. 아니, 오히려 이 게임은 진짜 치킨게임보다도 더 질이 나쁘다. 절벽을 향해 각각 차를 몰면서 담력을 경쟁하는 본래의 치킨 게임에서는 둘 중 한쪽이 절벽에 떨어지기 전에 브레이크를 밟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한일 양국이 벌이는 게임은 ‘대초원을 무대로 한 치킨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에게 효과가 없는 카드만 내놓으니 아무도 브레이크를 밟으려 하지 않는다. 양측 사이에 서서 무의미한 치킨게임을 그만두라고 호소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양측 모두가 대초원을 하염없이 내달리기만 할 뿐이다.
돌이켜 보면 21세기에 들어서 한일 간에는 항상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다. 야스쿠니 문제나 교과서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영토 문제 등이다. 그 때마다 양국 정치인들은 서로를 비난했고, 언론에서는 과격한 언사가 오갔다. 민족주의적인 시민운동도 때로는 과격성을 띄었고, 인터넷상에서는 차마 눈에 담기 힘든 말들이 오갔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한일 간 경제적, 사회적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가 성사됐고, 일본 열도에 한류열풍이 불어닥쳤다.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정치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도 단기적인 한일관계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물론 이는 양국 시민사회가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한일 양국의 정치인과 언론인, 나아가 양국 관계개선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도덕적 해이에 빠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한일 양국을 둘러싼 문제 대부분은 민족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며, 따라서 대다수 지식인들로서는 이 문제에 손을 댔을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바꿔 말하면 그들 입장에서 손익을 계산했을 때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거나 상대측에 원칙론을 들이대는 편이 간편하며 합리적이다.
한일 양국은 자신들의 카드가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며 현 상황을 방치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양국 정부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는 비슷하다. 일본 정부는 ‘중국과 관계개선만 이뤄지면 한국은 내버려둬도 알아서 따라온다’고 보는 한편, 한국측은 “미국 여론을 끌어들이면 위안부 문제 등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초원의 치킨게임’을 벌이는 와중에 상대측 경로에 함정을 파놓으려는 셈이다. 그러나 설령 상대가 보기 좋게 함정에 빠진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함정에 빠진 상대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고, 그렇게 깊어진 상처는 단기적으로는 물론 중장기적으로도 보다 완고한 태도를 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애초에 외교란 교섭을 통해 성과를 얻어 내는 것이지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카드를 들이밀어서 승부를 겨루는 시합이 아니다. 북한을 둘러싼 문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한 국가의 정치 태도를 바꾸려면 단순한 제재만으로는 어렵다. 한일 양국이 상대에게 북한에 가하는 만큼도 제재를 가하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초원의 치킨게임’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기란 어렵지 않다.
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타협점을 모색하는 상대에게 세련된 변명거리를 제공해서 행동을 이끌어 내는 일이다. 그렇게 하려면 대화가 필요하며, 원칙은 그 대화 중에 표현하면 된다. 국내 정치와 마찬가지로 외교에서도 ‘소통’이 중요하기는 마찬가지다.
- 필자 기무라 간은 고베대학교 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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