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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 늦가을에 만끽하는 동유럽의 낭만

Travel - 늦가을에 만끽하는 동유럽의 낭만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느끼는 중세의 숨결 … 다뉴브강의 자몽색 노을
다뉴브강의 진주라 불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전경.



동유럽으로 기차여행을 다녀왔다. 폴란드의 대평원을 지나고, 소박한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의 기차역을 지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기차 여행의 낭만과 동유럽의 설레임이 넘쳤던 만추 여행.

기차여행에는 비행기나 배로 하는 여행과는 다른, 막연한 낭만이 있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릴 때, 생각은 아무런 제약 없이 커지고 상상이 되어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알랭 드 보통 역시 여행의 기술에서 ‘모든 운송 수단 가운데에서도 생각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기차일 것’이라고 썼다. 그의 말처럼 열차 밖의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러면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느리게 움직인다.

나는 지금 폴란드의 대평원을 지나는 기차를 타고 있다. 바르샤바를 떠나 크라코프로 가는 중이다. 탁 트인 평원이 영화 필름처럼 착착 넘어간다. 보이는 풍경은 전원적이지만 폴란드의 역사를 알고 나면 내내 평온하지만은 않다. 오랜 역사 동안 이 평원을 가로질러 많은 나라들이 손쉽게 폴란드를 침략했고, 많은 유대인의 삶과 죽음도 기차에 실려 오갔다. 어두운 동유럽의 역사를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크라코프에 도착한 사람들이 하나 둘 짐을 내리고 있었다.

크라코프는 폴란드의 수도가 바르샤바로 옮겨지기 전까지 약 500년 동안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중세 수도다. 바르샤바가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몽땅 파괴된 것과 달리, 크라코프는 전쟁의 참상도 고스란히 비껴갔다. 독일군 사령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나치가 떠날 때도 문화유산은 건드리지 않았다. 야만도 비켜갈 만큼 이곳이 아름다웠기 때문이지 않을까란 말도 있다.

크라코프는 그토록 낭만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지어진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도시에는 중세의 유산이 잘 보존돼 있다. 고딕양식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 있는 구시가지의 중앙 광장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물회관이 있다.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마차가 지나다닌다.

중세시대 왕들이 살았던 바벨 성에는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 사이좋게 붙어 있다.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건축구조다. 바벨성 안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바티칸으로 떠나기 전까지 지냈던 대성당도 있다. 도시 곳곳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숨결과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크라코프에서 꼭 챙길 곳으로는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이 있다. 1290년대부터 1996년까지, 무려 700년 넘게 소금 채취를 하던 광산이다. 180개의 갱도와 2000여개의 방이 남아 있다. 가장 경이로운 탄성을 자아내는 곳은 지하 110m 아래에 만들어진 킹가 에배당.

65년에 걸쳐 조금씩 완성된 예배당에는 일생을 이곳에서 일해야 했던 광부들의 고단한 삶과 절망과 희망과 신을 향한 기도가 소금과 함께 박혀 있다. 성인의 조각상과 섬세한 부조들, 대형 샹들리에까지 모두 소금으로 만들어진 이곳에서의 시간은 경이로우면서도 처연한 신비로움으로 채워진다.

다음 여정지인 프라하까지는 야간열차를 타고 갔다. 기차는 생각보다 많이 낡고, 객실엔 찌든 담배냄새가 아련히 배어 있었다. 혼자 자는 1등실은 열쇠가 없어서 화장실을 갈 때마다 거대한 체구의 남자 승무원을 불러 망을 보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순간이 그립고 미소가 지어진다.

1. 1596년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긴 지그문트 3세의 동상이 우뚝 서있는 잠코비 광장. 2. 폴란드 크라코프의 비엘리치카 소금광산. 3.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로 가는 열차에 승객들이 오르고 있다.
여행은 아이러니하게도 편하고 좋았던 기억보다 늘 불편하고 힘들고 때론 황당해서 웃기기까지 한 경험에 더 큰 저장 공간을 내어준다. 지나고 나면 불편하고 힘든 것도 다 추억이 되고 ‘견딜만 한 것이었어’ 하는 느긋함과 뿌듯함도 쥐어준다.

동유럽 레일패스.


야간열차 타고 맞은 프라하의 아침야간열차는 따스했고, 프라하의 아침은 기대처럼 설레었다. 프라하는 고상하고 기품 있는 건물들로 가득하다. 보고 나면 너무 짧아서 허탈해지는 천문시계의 장식쇼도 알지만 챙겨보았고, 시청사에 올라가 프라하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흐라치니 지구의 웅장한 프라하 성과 프란츠 카프카가 작업실로 쓰던 황금소로의 22번지 집도 챙겨 갔다.

시간이 된다면, 크리스탈 공예로 유명한 체코의 대표 브랜드 ‘모저 세일즈&아트 갤러리’에 들러 여러 나라의 왕실에 납품되는 명품 글라스도 꼭 감상해보길 권한다. 13세기 수도원을 개조해 호텔로 만든 아우구스틴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점심을 챙겨먹고, 손꼽히는 명물 재즈바 우 말레호 글레나에서 라이브 재즈 연주를 들으며 밤을 보내면 프라하에서의 짧은 가을이 아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더 자연스럽게 읽히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체코와 슬로바키아라는 두 개의 나라로 읽는다. 슬로바키아는 1993년 체코에서 독립한 이후, 각종 규제를 완화하고 유럽연합(EU)에도 가입하면서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뤘다. 지금은 ‘동유럽의 디트로이트’라 불리며 세계적인 외국 자동차 생산국으로 부상했다.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는 중세의 멋도 잘 간직하고 있다.

구시가지 동쪽에 있는 미하엘 문을 통과하면 순간이동을 한 듯 중세의 정취가 듬뿍 전해진다. 미하엘문은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이라 걷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게 된다. 중세의 분위기는 프라하나 크라코프 못지 않게 진하지만 구시가지의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다. 한두 번 구시가를 돌고 나면 머릿속에 그림이 훤히 그려질 만큼 만만하고 아기자기한 숍과 카페도 즐비하다.

우리에겐 낯선 유대인 지구를 지나 브라티슬라바 성에 오르는 길도 즐겁다. 브라티슬라바 성은 프라하나 바벨 성에 비하면 참 볼품없고 밋밋해 보이지만,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다뉴브 강과 시가지 전경은 여유롭고 고즈넉하다. 북쪽의 신시가지와 남쪽의 구시가지,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다뉴브 강까지 모두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헝가리를 거쳐 베오그라드까지 이어지는 다뉴브 강 위에는 마치 유에프오를 잡아 매어놓은 듯한 다리가 하나 세워져 있다. 브라티슬라바 성을 오르내리는 길에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데, 참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 유에프오 같은지도 모르지만.

이번 여정의 마지막 도시이자 최고의 도시였던 헝가리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는 원래 다뉴브 강을 중심으로 상류층이 사는 언덕 위의 부다와 서민들이 사는 페스트로 도시가 나뉘어 있었다. 아무도 이 두 도시를 잇는 다리를 놓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다른 나라처럼 따로 존재해 왔다.

그러다 1849년 세체니 백작이 다리를 완공하면서 마침내 부다페스트로 합쳐지게 됐다. 해가 지는 세체니 다리를 건너고 있노라면, 처음 온 곳임에도 강한 기시감이 든다. 그리고 곧 깨닫게 된다. 부다페스트가 이스탄불과 정말 닮았다는 사실을.

그런가 하면 왕궁 부근의 카페 피에로에서 저녁을 먹고 나왔을 때는 ‘미드나잇 인 파리’의 그 빈티지 카가 정말 눈 앞에 나타나서 나를 1920년대의 파리로 데려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다페스트는 이처럼 낭만적인 파리의 감성과 신비로운 이스탄불의 감성이 공존하며 여행자를 홀린다. 부다 지역의 언덕 꼭대기에 있는 ‘어부의 요새’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다뉴브강에 번지는 자몽색 노을을 보고 있으면 너무 아름다워 눈이 멀 것만 같다. 부지런히 지하철을 타고 도시를 누빈다.

부다페스트는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지하철을 만든 도시다. 100년도 더 된 지하철 역을 헤매는 것도 운치가 넘친다. 골목골목을 누비다 피곤해진 몸은 터키의 지배를 받는 동안 생겨난 100여개의 온천장에서 스파를 풀어보자. 네오 바로크 양식의 이국적인 아름다움이 넘치는 세체니 온천에서 몸을 풀고 팬케익으로 유명한 군델에서 달달한 팬케익을 먹으며 피곤을 녹일 수 있다. 취재 협조 레일유럽(www.raileurope.co.kr)



동유럽 레일패스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오스트리아의 동유럽 5개국의 기차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기차패스. 한 달 동안 5~10일을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 레일유럽(www.raileurope.co.kr)을 통해 동유럽 패스 구입은 물론 기차패스에 관한 다양한 정보와 기차 여행 루트를 알아볼 수 있다. 5일권 성인패스 가격 총 230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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