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iness - 기대 만발 속 자생력 강화 시급
Business - 기대 만발 속 자생력 강화 시급
경제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리란 기대를 받으며 나온 협동조합기본법이 12월 1일로 시행 1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3000여개의 협동조합이 설립돼 양적으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다만 협동조합 중 절반은 개점휴업 상태인데다 그나마 잘 운영되는 곳도 영세해 경제 전반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미미하다.
“어? 여기에도 이게 생겼네. 이 가게도 프랜차이즈인가?” “주인이 돈 많이 벌어서 분점 낸 거 아냐?” “다른 사람이 따라 만든 가게라고 하던데. 원조 가게는 따로 있잖아?”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 지하철역 근처를 지나는 젊은 사람들의 얘기다. 이들 대화의 주제가 된 곳은 ‘와플대학’이라는 노점이다. 인기 간식거리가 된 와플을 파는 가게로 12가지 맛의 크림을 선택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가끔은 줄을 서서 먹어야 할 정도로 반응이 좋다.
와플대학이 첫 선을 보인 것은 2008년이다. 신촌의 한 골목에 이름도 없는 허름한 노점이 하나 생겼다. 와플에 특이한 크림을 발라 싸게 팔았는데 맛도 좋아 금세 많은 단골손님이 생겼다. 입 소문을 타며 손님이 늘더니 급기야 줄을 서서 먹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근처 대학생 단골손님들이 “매일 줄을 서 출석체크를 한다”며 ‘대학’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연세대·서강대·이화여대와 함께 ‘신촌의 4대(학)’라는 애칭이 생겼다. 주인은 아예 가계 이름을 와플대학으로 지었다.
최근 와플대학이 눈에 띄게 늘면서 프랜차이즈라는 오해를 받았다. 하지만 프랜차이즈가 아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돈을 많이 벌어 분점을 낸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와플대학과 비슷한 가게를 낸 것도 아니다. 와플대학은 협동조합이다. 올 3월 서울시로부터 협동조합 인가를 받았다.
와플대학을 처음 운영한 사람은 손정희(53)씨다. 와플대학이 화제를 모으자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노하우를 알려달라고 찾아왔다. 그렇게 찾아온 몇몇 사람들이 가게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가게가 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아예 협동조합으로 만들어 가게 수가 급격히 늘었다.
현재 30개가 넘는 와플대학이 서울 곳곳에서 운영 중이다. 와플대학 협동조합원이 되면 손씨가 개발해 특허를 받은 12가지 크림과 와플믹스 제조법을 배워 장사를 할 수 있다. 프랜차이즈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가맹비와 로열티가 없다. 비법과 기술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지 않는다. 와플을 만들 수 있는 기계값과 재료비만 내면 된다.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친구든 가족이든 다섯 명만 모이면 “협동조합이나 만들어보자”는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다. 협동조합 열풍이 분 건 지난해 12월 1일 시행된 협동조합기본법의 영향이 크다. 종전에는 개별 협동조합특별법에 따라 8개 협동조합(농협·수협·신협·생협·새마을금고협·산림조합·인삼조합·중소기업협동조합)만 있었다. 기본법이 시행되면서 거의 모든 규제가 풀렸다. 5명만 뜻을 모으면 출자금 제한 없이 어떤 형태의 조합이든 만들 수 있다.
협동조합기본법은 ‘재화 또는 용역의 구매·생산·판매·제공 등을 협동으로 영위해 조합원의 권익을 향상하고 지역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사업조직’으로 협동조합을 규정한다. 조합원이 조합의 이용자이자 소유자가 된다. 또 협동조합 자체가 하나의 법인이다. 주식회사와는 다르다. 주식회사는 주주(투자자)의 소유지만 협동조합원은 출자금을 낸 조합원의 공동 소유다. 출자액과 상관없이 의결권도 1인 1표로 균등 분배된다.
상법상 영리회사의 목적이 이윤 극대화라면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주식회사는 남은 이익을 주주 지분에 따라 배당하고, 협동조합은 내부 유보금으로 적립하거나 이익만큼 판매 가격을 인하해 조합원의 이익을 챙긴다. 협동조합은 기본적으로 ‘고위험-고수익’을 추구하지 않아 안정적 경영에 유리한 대신 성장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협동조합기본법 시행 1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12월 5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1년 동안 전국에서 만들어진 협동조합은 3057개다. 월 평균 255개의 협동조합이 만들어진 셈이며, 올해 상법상 회사의 설립 건수 4%에 해당하는 숫자다. 3000여 협동조합이 창출한 일자리가 1만개에 가깝다는 추계도 있다.
기획재정부는 올 7월 협동조합을 상대로 설문을 진행했다. 총 1209개의 협동조합 중 747개가 응답했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협동조합이 신규 창출한 평균 일자리는 3.1개였다. “이 숫자를 3057개 협동조합에 대입하면 약 1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한 것으로 나온다”는 게 기획재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외형 330억 프랜차이즈가 협동조합 전환늘어난 협동조합의 수만큼 흥미로운 시도가 많았다. 협동조합을 설립할 때는 분야 제한이 사실상 없다. 투기를 목적으로 하거나 소수 조합원의 이익을 취하는 사업,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공익에 반하는 사업만 아니라면 어떠한 주제의 협동조합도 설립할 수 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이색 협동조합이 많이 등장한 배경이다. 평소 사회적 약자였던 사람들이 모여 개인의 정당한 권리를 쟁취하거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는 등 긍정적 효과를 내는 협동조합도 많다.
대표적 사례가 친환경 공예품 제작업체인 ‘협동조합 온리’다. 이곳은 지역에서 버려지는 폐자원을 이용해 수제화분 같은 재활용 디자인 제품을 제조해 판매한다. 폐자원 수거에 필요한 인력을 지역 내 시니어 클럽과 연계해 구한다. 지역 내 노인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면서 환경도 보호하는 효과를 얻는 셈이다. 7월 한국전력이 진행한 ‘협동조합 비즈니스 모델 발굴’ 사업에서는 최종 선정된 9개 협동조합 중 하나로 뽑혔다.
전남 광주시에는 다문화 이주여성들이 모여 만든 ‘드림인터네셔널 협동조합’이 있다. 외국인 여성 조합원들은 직접 방문하거나 화상채팅 방식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한 달에 30만~40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 예전에는 일반 사설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급여가 밀리는 건 흔한 일이고 특별한 이유 없이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드림인터네셔널 조합원이 되면서는 훨씬 좋고 편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사무실에 모여 교육용 교재를 개발해 팔기도 한다. 일반 사교육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영어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지역사회에서의 반응도 좋다. 드림인터네셔널 협동조합 로스마리 비 메란데 이사장은 “급여가 조금 작아도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사람들과 함께 일해서 행복하다”며 “조합을 더 발전시켜 더 많은 이주여성의 인권을 찾아주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실제 활동하는 조합 절반 수준잘나가던 프랜차이즈 기업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곳도 있다. 해피브릿지협동조합이다. 원래 이곳은 ‘국수나무’ ‘화평동 왕냉면’ 등 음식 체인점을 운영하는 주식회사였다. 지난해 매출은 약 330억원. 하지만 이 회사는 2월에 3년 이상 근속한 직원 67명을 조합원으로 하는 직원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6명의 창업멤버도 모두 평조합원이 됐다. 유망 기업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첫 사례다.
아직 법적으로는 주식회사다.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증여세를 내야 한다는 법적 해석이 나와서다. 하지만 현재 운영은 협동조합의 형태로 한다. 해피브릿지조합 송인창 이사장은 “자본보다는 사람을, 경쟁보다는 협동을, 독점보다는 상생을 추구하는 협동조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밖에도 조합원들이 출자하고 지방자치단체가 발전시설 설치공간을 지원해 태양광 발전을 하는 ‘경남햇빛발전 협동조합’, 제주의 폐가를 고쳐 숙박시설로 만들어 수익을 내는 ‘제주폐가 살리기 협동조합’, 대형마트에 맞서 재래시장을 활성화 하기 위해 조직한 ‘노량진수산시장 협동조합’ 등도 성공 협동조합 모델로 꼽힌다.
이코노미스트는 올 4월 1181호 커버스토리를 통해 협동조합을 취재했다. 당시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을 관계자들을 만났다. 약 6개월이 지난 그들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대부분의 협동조합이 예전에 비해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협동조합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른 협동조합을 도우며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지역 내 폐지 줍는 노인들을 돕기 위해 만든 마중물협동조합 양동일 이사장은 “예전에는 폐지 줍는 노인들 급여만 챙겨줬는데, 최근에는 수익금으로 어르신들의 점심 도시락까지 마련해 드린다”고 말했다. 양 이사장은 전남 광주시의 요청으로 협동조합 관련 강의나 사례 발표를 하면서 다른 협동조합을 돕고 있다.
드림인터네셔널 협동조합의 결성을 도왔던 김종민씨 역시 협동조합 활성화를 위해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씨는 “아직도 협동조합을 만들면 지원금이 나온다고 잘못 알고 있거나, 조합설립 후 사업자 등록 같은 절차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그런 사람들을 만나 협동조합 문화가 올바르게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협동조합은 이제 첫 발걸음을 뗐다. 이제 시작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 평가가 많지만 보완하고 해결할 부분도 많다. 실제 재정기획부 조사에 따르면 협동조합 인가 후 사업을 개시해 운영하는 비율은 54.4%밖에 안 된다. 절차를 몰라 법인화를 하지않거나, 만들기만 하고 후속 관리가 안 되는 협동조합이 절반에 가깝다. 그나마 운영 중인 협동조합도 대부분 영세하다.
협동조합 정규직 직원의 평균 급여는 147만원, 비정규직 직원은 114만원 밖에 되지 않는다. 협동조합도 엄연히 독립된 법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생력을 갖추기 쉽지 않다. 자칫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해 우후죽순 늘어난 사회적 기업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협동조합법 개정을 놓고는 정치권의 갈등이 깊다. 새누리당은 “현행 협동조합 제도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며 법 개정에 나섰다. 민주당은 협동조합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지원을 더욱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최근 새누리당 이이재·길정우 의원은 국회의원회관에서 ‘협동조합기본법 시행 1주년 평가와 향후 과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포럼에서는 협동조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협동조합이 난립하는 것을 방지하는 방안을 주로 다뤘다. “2019년까지 협동조합 8000개를 만들겠다”고 밝힌 박원순 서울시장을 겨냥한 움직임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민주당은 협동조합 활성화에 초점을 맞췄다. 협동조합에 대한 조세 감면과 경영자문 등의 지원은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가 협동조합에 직접 출자할 수 있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다. 자칫 정치싸움에 밀려 좋은 의미로 시작한 협동조합 사업이 왜곡될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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