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0년 <이코노미스트>로 되짚은 한국 경제 30년 ① 1984~1988년 - 3저 등에 업고 중진국으로 도약
창간 30년 <이코노미스트>로 되짚은 한국 경제 30년 ① 1984~1988년 - 3저 등에 업고 중진국으로 도약
이코노미스트가 창간한 1984년 3월. 당시 세계 경제는 2차 오일쇼크로 인한 1980~1982년 대불황 여파로 시름하고 있었다. 1970년대 10% 이상씩 성장하던 한국 경제는 기로에 섰다. 다행히 미국 경기가 살아났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사뮤엘슨은 본지 창간호에 보낸 기고문에서 ‘미국 경기 회복세가 한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의 수출을 상당히 증대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내 기업인들 역시 1984년 이후 경제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본지 특집 제목은 ‘세계 경제, 휴화산에도 탈 것이다’였다. 실제로 1984년 국내 성장률은 9.9%, 이듬해는 주춤했지만 이후 내리 3년 간 11~12%의 고성장을 이뤘다.
창간 특별호에선 ‘수입 자유화 조치 성급하지 않은가’라는 주제로 ‘개방’ 문제를 심도 있게 다뤘다. 선진국의 통상압력에 따라 당시 전두환 정부는 해마다 수입자유화 품목을 확대해 갔는데, 당시 학계·재계에서 이견이 분분했다. 본지는 찬반 의견을 고루 다루면서도, 경쟁력 있는 산업은 과감히 개방하고 전자·기계 등은 개방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젊은 노인이 늘어난다’는 심층취재 기사도 눈에 띈다. 정년 문제를 다룬 이 기사는 평균 55세 정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퇴직 후 촉탁제, 시간제 재고용, 임금피크제 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후 정년 연장은 30년을 끌다가 지난해 60세 정년 의무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1983년 제시한 정년 연장, 지난해 국회 통과당시 대기업 부장 100명을 상대로 한 ‘10년 후 한국 경제 전망’ 조사도 흥미롭다. 이 조사에서 향후 10년 간 우리나라 경제에 가장 커다란 문제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5%가 ‘외채’ 문제를 지적했다. 훗날 총리가 된 정운찬 당시 서울대 부교수가 기고한 ‘진정한 금융개혁 아직도 멀다’라는 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 교수는 금융개혁에 앞서 실물 부문의 개혁이 선행돼야 하고, 금융개혁을 거론하기 전에 우리나라 금융제도 전반의 현실과 문제점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코노미스트 5호(1984년 5월)에는 지금은 47~48세가 됐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 250명을 상대로 한 장래 희망 직업 설문조사가 실렸다. 1위 교사, 3위 의사는 지금과 비슷하지만, 4위에 엔지니어가 오른 게 이채롭다. 은행원·기자·파일럿·승무원·변호사·정치인 등이 10위 안에 오른 희망 직업이었다. 요즘 학생들이 선호하는 연예인·공무원·운동선수 등은 순위에 없었다.
‘한국 자동차산업’을 분석한 기사도 격세지감이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1983년 우리나라 승용차 수출 실적은 1만6405대였다. 30년이 지난 지난해는 308만대를 팔았다. 같은 호에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의 인터뷰가 실렸다. 정 회장은 인터뷰에서 당시 400억 달러에 달하는 대외채무 문제를 언급하며 “지금은 외채를 줄이는데 전력투구할 때”라고 강조한다. 현재 우리나라 국가 채무는 지난해 말 잔액 기준 4160억 달러다.
1984년 8월에는 당시 기업의 흥망을 분석하는 특집을 실었는데, 삼성그룹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삼성은 1970년대 중반부터는 전자 이미지가 강렬해 졌다. 1980년대 들어 반도체·유전공학 부문을 중심으로 한 첨단산업 부문에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제시해 놓고 있어 삼성의 주력 기업도 어쩌면 서서히 바뀔지도 모른다. 삼성전자는 매출 면에서 삼성물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순이익(물산 88억원, 전자 212억원)에서는 전자가 물산을 따라잡아 간판 회사의 위치를 굳히고 있다.’ 30년 전 212억원이던 삼성전자의 순이익은 지난해 약 1400배로 늘어난 30조4000억원이었다.
정주영 회장 인터뷰에서 “대외채무 줄여라”경제가 침체 국면으로 빠지던 1985년, 본지 신년호는 100명의 기업 CEO를 상대로 한국 경제의 과제를 설문조사 했다. 조사결과 1위는 국제 경쟁력 제고, 2위는 기술 개발, 3위는 외채 축소였다. 수출 증대와 사회 안정, 정부규제 축소, 내수기반 확대가 그 뒤를 이었다. ‘2010년 한국’을 내다본 기사도 이채롭다.
한국미래학회가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쓴 이 기사는 한국이 최고 성장률을 이어갈 때 2010년 1인당 국민소득을 9500달러로 예상했다. 실제론 2만2000달러였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체제가 시장경제 체제로 이행되고, 산업구조의 변화, 노령화 현상 심화 등은 제대로 전망했다. 이와 달리 대학교육이 학부 중심에서 대학원 중심으로 바뀌고 교육열은 낮아질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전국이 전철과 고속도로로 연결되면서 고소득·노년층의 탈도시화 현상이 촉진될 것이라는 예상도 어긋났다. 한편, 당시 대기업 사장의 평균 월급은 250만원이었다. 본지가 1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였다. 연봉으로 치면, 약 3000만원 정도다. 기업평가 사이트인 CEO 스코에 따르면 지난해 51개 대기업 집단 CEO의 평균 연봉은 15억4500만원이다.
본지 30호(1985년 6월)에 실린 조순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특별기고는 경제학자와 기업가의 시각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당시 본지에 등장한 기업인들은 한결같이 정부 주도로 자동차·컬러TV·반도체 산업을 육성해 수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순 교수는 이렇게 썼다. ‘정부는 지금까지 비교우위가 없는 산업을 중점 육성해 왔다. 따라서 수출산업의 국제 경쟁력이 없어져 버렸다. 우리는 경쟁력을 키우는 것보다도 대규모 생산 체제를 갖추는데 더 힘을 기울여 왔다. … (중략) …우리는 반도체나 자동차산업을 육성, 일거에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한데, 이는 1970년대의 멘털리티다.’
기술이 축적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도체나 자동차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런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수출을 늘리고, 그 과정에서 기술을 습득하며 세계적인 반도체·자동차 제조국이 됐다.
1985년 상장기업 랭킹 기사 역시 요즘과 비교하면 기업·산업의 흥망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상장사 중 수익성 1위는 현대약품, 2위는 한국화장품이었다. 재무 안정성 1위는 대일화학, 2위는 오리엔트시계였다. 성장성에는 삼성반도체통신·현대자동차서비스·아남산업이 1~3위였다. 매출은 대우·유공·삼성물산·현대건설 순이었다. 삼성전자는 매출 순위 8위, 성장성 14위였다.
본지는 무역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이 달러 강세를 완화하기 위해 G5(미·영·독·프·일)와 1985년 9월 22일 맺은 플라자 합의와 그 해 11월 열린 국제부흥개발은행·국제통화기금 서울 총회를 비중 있게 다루면서, ‘미국 시장뿐 아니라, 유럽 시장에 대한 수출 경쟁력이 좋아질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측했고, 결과적으로 맞아 떨어졌다. 그 해 말에는 심화되는 한·미 통상마찰을 다루면서, ‘미국은 더 이상 짝사랑할 애인이 아니다’는 도발적인 제목을 뽑았다.
1985년 매출 1위 대우, 삼성전자 8위1986년 초, 본지가 대기업 CEO 100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절반은 ‘불황’을 점쳤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이때부터 3년간 국내총생산(GDP)이 11.7~12.3% 성장하는 초호황에 접어들었다. 이른바 3저 시대(달러 약세, 유가 하락, 국제금리 하락)의 개막에 대해 본지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적어도 1~2년은 갈 것으로 정확히 예측했다. 그 해 중순 ‘3저 시대’ 특집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3저 시대가 왔다고 떠들썩하다. 수출 오더가 밀려오고 공장이 풀 가동 중이다. 각 사가 작년 수출 실적의 20~30% 이상을 목표로 잡고 있다.’
당시 직장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사도 흥미롭다. ‘새 풍속도로 본 한국인의 돈 감각’이라는 특집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하루 2000원 범위 내에서 점심값·교통비·담뱃값·소주값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현대 샐러리맨들을 2000원 남편족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우리나라 기혼 남성들의 한 달 평균 용돈은 6~7만원이었다.
이런 기사도 있다. ‘일류재벌 그룹 엘리트 간부인 C차장은 600만원을 들여 소형차 맵시나 하이딜러스를 구입했다. 입사경력 13년으로 월급여 65만원을 받는 그는…’, ‘신용카드 매출이 급격히 늘어나 1985년 한 해에만 4000억원대에 달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지난해 국내 신용카드 이용액은 당시보다 약 1300배 늘어난 585조이다. 1986년은 현대자동차가 처음으로 미국 시장에 수출되고, 양담배가 개방된 해이기도 하다.
1987년에는 ‘주식투자 열풍’을 다뤘다. ‘재테크 시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고 소개한 기사에는 당시 주식 투자 열풍을 이렇게 묘사했다. ‘상오 10시가 지나면서 주부들의 수가 부쩍 늘어나 11시쯤에는 50명을 넘어선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 이때쯤이면 증권사 객장 안은 여자들의 화장 냄새로 그득하다. 남자들은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 반면 여자들은 대부분 껌을 씹고 있는 게 특징이기도 하다.’ 당시 주식투자자는 100만명을 넘어섰다. 현재는 약 500만명이다.
대기업 ‘갑질’ 논란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대기업은 중소기업 육성을 입버릇처럼 떠들면서 실제로는 중소기업들이 하청을 받아 생산·납품한 제품의 대금 결제를 고의적으로 미루거나 값을 후려쳐 깎거나 또는 하청을 더 이상 안 주겠다고 협박·공갈하여 대기업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간다.’ 본지는 민주화 운동이 뜨거웠던 1987년 여름에 게재된 ‘민주화 시대의 경제환경’에서 ‘관 주도의 4대 악습(관치금융, 각종 인허가 규제, 산업정책, 인사 개입) 틀을 과감히 버리고 민간주도 속 작은 정부로의 전환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30년이 지나도 4대 악습은 여전하다. 또한 6·29 선언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하던 노사분규와 관련, 한국형 노사 관계의 정립을 연속 시리즈를 통해 강조했다. 1987년 본지가 뽑은 10대 경제 뉴스는 민주화 열기 속 노사분규, 부동산 투기 열풍, 국제수지 흑자 시대, 800원대 무너진 환율, 이병철 삼성 회장 별세 등이었다.
1988년 6공화국 출범과 함께, 본지는 ‘6공화국의 10대 과제’ 특집을 실었다. 권위주의 타파, 합리적인 분배, 금융자율화, 경제력 집중 완화, 농어촌 대책, 노사 문제 해결, 부정부패 척결, 언론자유, 학생·학원 문제 해소, 통일 문제 등이다. 1만원권 발행 15주년을 맞아 ‘1만원권으로 살 수 있는 상품’ 기사는 그동안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기사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1973년에는 1만원으로 자장면 125그릇을 먹을 수 있었지만 1987년에는 14그릇밖에 먹을 수 없다고 썼다. 현재는 두 그릇을 겨우 먹는다. 같은 기간 소주는 1만원에 117병에서 25병, 다방 커피는 200잔에서 20잔으로 줄었다. 지금 1만원은 커피 2잔 값이다.
1987년 신조어로 ‘재테크’ 등장부동산 시세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아파트 투기 신화’를 다룬 본지 126호(1989년 6월)에 따르면, 당시 서울 개포 주공아파트 17평형은 6000만원 안팎이었다(현재는 9억원 안팍). 같은 해 4월 분당·일산 신도시 개발 발표 등으로 부동산 시장이 과열되자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89년 말 택지 초과소유 부담금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 등을 골자로 하는 토지공개념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당시 큰 논란을 일으키며 대폭 축소돼 국회를 통과했고, 향후 일부 법안이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결정을 받아 폐지됐다.
당시 이와 관련해 본지는 한 국회의원의 말을 전했다. ‘(토지공개념) 확대 도입에 반대한 한 의원은 사석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찬성하지만 내 주변의 사람들이 반대하므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것이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겠다는 정부의 큰 목소리가 용두사미식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강력한 투기억제대책이 있었지만 결국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던 주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1988년은 재계의 큰 전환기였다. 반도체 부문을 흡수한 삼성전자의 거대 기업화, 현대자동차의 급성장, 금융재벌의 부상 등이 이때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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