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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RLIN WALL -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무너졌다

THE BERLIN WALL -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무너졌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매카트니는 사람들이 장벽 위로 올라가 망치로 벽돌을 쪼개기 시작했다고 돌이켰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 대변인이 TV로 생중계되는 기자회견을 통해 수정된 정책과 새로운 각료 임명을 발표했다. 회견장을 가득 메운 기자들은 지루한 발표에 반쯤 졸고 있었다. 바로 그때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소식 중 하나가 불쑥 던져졌다. 기자들은 귀를 의심하며 서로 쳐다봤다. 방금 동독 정부 대변인이 베를린 장벽의 철거를 발표한 걸까?

당시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의 중부유럽지국장이던 로버트 매카트니(현재 그는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다)는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인 11월 9일을 이틀 앞둔 날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돌이켰다. “너무 충격적이라 믿을 수 없었다. 우리는 녹음기를 반복해서 틀어 들어보며 ‘아니야, 그가 말을 잘못한 거야’라고 말했다. 동독 기자들도 하나같이 ‘그가 진짜 그걸 의미했을 리가 없어’라고 말했다.”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의 과거(1961년 11월 19일, 왼쪽)와 현재(장벽 붕괴 후 25년 뒤인 2014년 10월 24일).
동독 주민이 여권만 있고 승인만 받으면 곧 서독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동독 정부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 정치국원은 이렇게 발표했다. “오늘 우리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모든 국민이 모든 국경 검문소를 통해 동독을 떠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규정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그 규정이 언제 발효되느냐고 기자들이 묻자 샤보브스키는 이렇게 답했다. “지체 없이 즉시.”

그 발표는 물론 중대한 조치였지만 베를린이 실제로 다시 통합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발표가 역사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당시 미국 뉴욕타임스 신문의 특파원으로 일했던 퍼디낸드 프로츠만(현재 미국 오하이오주 오벌린대 교수다)은 “샤보브스키가 기자회견 마지막에 그 발표문을 읽고는 그냥 자리를 떴다”고 돌이켰다. 프로츠만은 그날 기자회견장에서 매카트니 옆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그 발표의 실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말했다.

매카트니와 프로츠만은 그 발표가 중대한 사안이며 사람들이 샤보브스키의 말에 따라 즉시 행동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TV로 생중계 됐다는 게 문제였다”고 프로츠만은 말했다. “몇 달 동안 시위와 논란 끝에 그날 밤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다고 사람들은 느꼈다.”

미국 NBC 방송의 톰 브로코는 기자회견 직후 샤보브스키를 인터뷰했다. 브로코는 그 발표문에 관해 묻고 그 의미를 확인했다. 그 다음 브로코는 기자실로 돌아가 매카트니, 프로츠만을 포함한 각국의 기자들에게 자신이 들은 말을 전했다. 모두가 황급히 서베를린의 호텔로 돌아가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의 역사적 현장인 브란덴부르크 문의 과거(1989년 11월 10일, 왼쪽)와 현재(2014년 10월).
기자회견 중계를 지켜본 동독 주민들은 샤보브스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매카트니와 프로츠만이 예상한대로 그 소식은 베를린 전역에 신속히 전파됐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동베를린 주민들이 처음엔 수백 명씩, 나중엔 수천 명, 수만 명씩 모여 가장 가까운 장벽 검문소로 가서 서베를린으로 넘어가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국경 경비대원들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상부의 지침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늘어나는 군중을 통제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그러나 놀랍게도 총성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밤 11시 30분께 보른홀더스트라세 검문소 경계를 책임진 슈타지(Stasi, 동독의 비밀경찰로 알려진 국가안보국) 소속의 하랄트 예거 중령은 군중을 더는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동베를린 주민들이 물밀듯이 그 문을 통과했다.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한 뒤 인터뷰를 하려고 거리에 나갔을 때 베를린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동독인들은 국민차 트라반트를 타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배기가스 냄새가 아주 지독하기로 유명한 차였다.
매카트니는 이렇게 돌이켰다. “교통체증이 엄청났다는 기억이 생생하다. 어디를 가든 차가 꽉 막혀 장벽까지 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때쯤 사람들은 장벽 꼭대기에 올라가 망치로 벽돌을 쪼개기 시작했다. 동독 주민들이 대거 장벽을 넘어갔다. 그들에게 쇼핑하라고 돈을 주는 사람도 있었고, 가로막힌 장벽 때문에 헤어졌던 이산가족들이 재회했다. 자연스럽게 열린 엄청난 규모의 파티와 같았다.”

프로츠만은 택시 기사를 설득해 밤새 같이 지내기로 하고 여러 곳을 들렀다. 그들이 처음 간 곳은 냉전 스파이 영화로 유명한 찰리 검문소였다. 그곳에선 폭죽이 터졌고 록음악이 울려 퍼졌다. 서베를린 출신인 운전기사의 도움으로 프로츠만은 이야기하기를 꺼리던 동베를린 주민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그들은 희열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에 프로츠만은 이렇게 썼다.

34세의 한 동베를린 주민은 서베를린의 가장 붐비는 쇼핑가 쿠르퓌르스텐담에서 동독의 국민차로 불리는 오렌지색 트라반트의 운전대 앞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싶다. 여긴 처음이다. 몇 시간 뒤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나를 기다라고 있다. 하지만 이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다.”

한 젊은 여성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어떻게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한 중년의 동베를린 주민은 자신의 기분을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다.”

사람들은 장벽 위에 올라가 하루 전만 해도 생각도 못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일을 하며 자축했다. 프로츠만도 그들과 함께 어울렸다. “사람들이 장벽 위에 올라와 내게 와인, 샴페인, 맥주 병을 건넸다. 그들 모두 활기가 넘쳤다. 수십 년 동안의 억압과 공포, 죽음이 끝났다는 생각에 흥분을 참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자 동독과 서독 사람들은 장벽의 서로 다른 쪽을 본 뒤 만족한 기분으로 귀가하기 시작했다. 그런 자축은 며칠이나 계속 됐다. 그러나 결국 복잡한 상황의 현실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두 기자는 불확실성이 팽배했다고 돌이켰다.

“가장 큰 의문은 ‘이제 어떻게 되나?’였다”고 매카트니가 말했다. “이게 냉전의 종식일까?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큰 변화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게 동·서독의 통일을 의미할까?”

서독의 관리들도 확신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부대변인의 기자회견. 여행규제 완화를 여행자유화로 잘못 말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촉발했다.
"서독에선 사람들이 과연 통일을 원하는지를 두고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고 매카트니가 말했다. “엄청난 비용이 들 뿐 아니라 단순히 국경을 없애는 것 이상의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대다수는 ‘머릿속의 장벽’(wall in head, 서독과 동독 사이의 사회정치적, 심리적 격차)을 과소평가했다. 장벽 너머의 사람들은 일의 처리 방식에 관해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데도 말이다.”

일부 서독 관리들은 통일에 회의적이었다. 소득이 훨씬 낮은 동독과 합치게 되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국 서독은 궁극적인 통일독일을 추구한다는 오랜 정책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독일에 남아 통일 과정을 지켜본 프로츠만은 통일이 불가피하다는 게 분명해 보였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동독인들은 또 다른 공산주의 정부의 통치를 받을 생각이 없었으며, 통일이 가져다 줄 경제적 기회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먼저 1990년 7월 1일 동독과 서독의 경제가 통합됐고, 이어 10월 3일엔 두 개의 독일이 공식적으로 완전히 하나가 됐다.

성장통이 따랐다. 동독에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과 고용 문제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정부는 통일 후 첫 5년 동안 동독의 개발과 현대화에 5억 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프로츠만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옛 동독 지역에 건설된 첨단 코카콜라 입병(入甁) 공장을 방문한 일을 기억했다. 구식 입병 산업에서 일한 동독인이 그 공장의 운영을 맡고 있었다. 그는 코카콜라를 위해 일하게 된 것이 너무도 기쁘다고 말했다.

“공장 안에서 직원 몇 명과 인터뷰를 한 뒤 나가면서 공장 중앙에 있는 제어실에 앉아 있는 공장장을 봤다”고 프로츠만이 말했다. “서독에서 들여온 최첨단 컴퓨터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새로 뽑은 차를 만지듯 제어 장치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굉장한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매카트니와 프로츠만은 동독 정부 대변인의 기자회견장에서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인터뷰를 하면서 일생일대의 경험을 즐겼다.

“택시 기사와 나는 밤새도록 호텔을 들락거렸다”고 프로츠만이 말했다. “우리 기자들은 호텔로 달려가 기사를 써서 보낸 뒤 다시 장벽으로 달려나갔다. 아주 맑은 밤이었다. 그날 밤 베를린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했다.” 호텔에서 기사를 보낼 때 뉴욕의 편집자가 전화로 그에게 말했다. “이게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알기 바라네.” “그럼요.” 프로츠만이 그에게 말했다. “잘 알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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