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미의 ‘도시미술 산책’ ⑤ 이용백 ‘알비노 고래(Albino Whale)’ - 도심을 유영하는 거대한 흰 고래 유골
박보미의 ‘도시미술 산책’ ⑤ 이용백 ‘알비노 고래(Albino Whale)’ - 도심을 유영하는 거대한 흰 고래 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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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소원을 상징하는 알비노 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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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경이로운 존재가 두 축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는 ‘모비 딕’이라는 흰 고래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과 위엄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인간 이전부터 살아왔고, 스스로 바다를 선택해 진화해온 고래라는 포유류. 그중에서도 지능이 높고 인간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흰 고래는 섬뜩한 유령처럼 대양을 떠돌아 다닙니다. 그리고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의 살을 뜯기고 앙상히 남은 뼈다귀만 남은 채 살아남은 선장 에이허브가 한 축입니다. 그는 지옥과 같은 복수심에 불타 모비 딕을 잡기 위해 망망대해를 헤맵니다.
작품 제목에 언급 된 ‘알비노(albino)’는 ‘백색증(albinism)’이라는 뜻입니다. 피부·모발·눈 등에 색소가 생기지 않는 백화현상을 뜻합니다. 일종의 선천성 돌연변이 유전병이죠. 여기서는 몸에 색소가 결핍돼 흰 빛을 띠는 고래를 알비노 고래라고 칭합니다. 지금은 전 세계에 두 마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네요. 백호나 백마, 백사가 길한 의미를 가지듯 흰 고래도 그 희귀함과 불가사의함 때문에 신성시되기도 하고, 행운과 운명적 필연만이 만날 수 있는 궁극의 소원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제 흰 고래가 희소성, 성공을 뜻하는 것이란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왜 하필 고래의 유골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작품 설명에 쓰여진 대로 그저 이 도시의 수많은 사업체의 성공을 빌기 위한 조각일까요. 아니면 인간에게 무참히 살점을 뜯긴 고래의 뼈를 전시해 그들의 욕망의 결과를 표현한 것일까요. 뼈만 남은 고래는 우악스럽고 탐욕스러운 포경의 현장을 환영처럼 남기고 유백색의 섬뜩한 뼈로 박제된 채 의문을 자아냅니다.
작가의 표현과 표제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묘한 해석의 여지가 생긴 것처럼, 세상의 성공이나 실패도 그저 흑백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요. 소설 모비 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이허브 선장처럼 끝내 패배할지언정 결단코 자신만의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는 전설의 CEO처럼 리더십과 독단성, 카리스마와 투지, 용기를 가진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격이나 목표의 시비(是非)를 떠나 외경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설사 그것이 광인의 도착된 병증이라고 해도 말이죠. 그것을 위해 죽음마저 무섭지 않다는 듯 돌진하는 힘에서 우리는 때때로 전율과 두려움, 위대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포경선 피쿼드호에는 에이허브 선장과 같은 사람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은 향유고래의 살과 기름을 원하는 선원들이었습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힘이 들고 비루하기까지 한, 매일의 일상을 이어나가야 하는 사람들이었죠. 이들은 먹고, 자고, 가족을 부양하고,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속에 살아갑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모비 딕을 잡고자 하는 열망을 차마 놓지 못해 하늘을 향해 뼈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며 침몰하는 에이허브 선장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나는 그저 돈이 되는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승선한 보통의 뱃사람인가 하고요. 죽음의 깃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주도면밀하고 맹렬한 에이허브를 욕하는 동시에 선망하면서 말입니다.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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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죽음을 연상케 했던 뼈는 물줄기 속에 숨어 희미해지고, 단단한 피부 표면에 물방울들이 부딪쳐 부서지는 것처럼 만져질 듯 생생하면서도 빛나는 실체가 됩니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고래의 살과 질량. 우리가 꿈꾸고 바라며 손에 쥐기만 하면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은 목표. 어쩌면 작가는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추구하는 그 무엇이 결국 이와 같은 게 아닌지 묻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에 넣고 씹어 소화되는 일용할 식량으로써의 물고기가 아닌, 꼭 그 고래여야만 한다는 집착과 그 실체를 기어이 잡아 취했을 때의 현실이 그것입니다. 집착과 현실 사이를 우리는 곧잘 무시하고 달려가지만, 그리하여 선원들은, 아니 이곳을 지나는 도시인들은 그 신성(神性)에 도달한 것일까요.
아직 이른 새벽, 시린 바람이 고래의 뼈 사이사이를 훑으며 지나갑니다. 높은 을지로 빌딩들은 새벽에 출근한, 혹은 밤을 새운 자들이 밝힌 전등불로 초롱초롱합니다. 외투 속에 목을 옹송그린 채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빨라집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 어떤 것이 진실인지 모르지만 다들 각자의 전쟁터를 향해 바삐 걸어갑니다. 서늘하게 빛나는 고래의 시선 아래,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는 승진을 하기 위해, 또 누군가는 복수를 하기 위해 각자의 피쿼드호에 승선하는 평범한 아침이 또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곳: 서울 중구 청계천로 100 시그니쳐타워 앞 사거리서울 수표동 청계천가를 따라 걷다 보면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에 시그니쳐타워가 자리 잡고 있다. 동관과 서관으로 구성된 시그니쳐타워는 화장품 제조업체 아모레퍼시픽그룹과 레미콘 제조업체 동양 등의 본사가 소재한 곳이다. 이용백 작가의 알비노 고래는 청계천가 시그니쳐타워 앞 사거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싱가포르 통상산업부 산하JTC코퍼레이션이 부동산 자산을 운용하기 위해 설립한 싱가포르 자산운용사 아센다스(Ascendas)가 시그니쳐타워를 소유하고 있다. 아센다스는 2010년 이용백 작가에게 시그니쳐타워 앞 작품 설치를 의뢰했다. 의뢰를 받은 이용백 작가는 애초 본인의 대표작 중 하나였던 피에타(Pieta)를 패러디한 작품을 설치하고자 했다. 피에타는 성모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잠긴 모습을 묘사한 미켈란젤로의 설치 작품. 하지만 아센다스는 피에타 패러디 작품의 내용이 다소 어렵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이용백 작가는 알비노 고래로 설치 작품을 바꿨다. ‘모두의 바람을 기원한다’는 다소 모호한 알비노 고래 하단 작품 설명도 이런 배경이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 알비노 고래는 2011년 시그니쳐타워에 설치가 완료됐다. 이용백 작가- 1966년생. 1990년 홍익대 서양화과, 1993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조형예술대학 회화과·조각과를 졸업했다.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초대받았다.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마이클 제이콥스 뉴욕현대미술관(MoMA)·휘트니미술관 컬렉터가 꽃무늬 군복을 소재로 한 영상작품 ‘엔젤 솔저(Angel Soldier)’를 구매해 화제가 됐다. 비디오·조각·설치·회화 등 매체나 장르에 구애 받지 않는 미디어 아티스트다.
박보미- 문화예술 기업 ‘봄봄(vomvom)’ 디렉터.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제디자인대학교대학원(IDAS)에서 미디어디자인을 공부했다. 영화미술, 전시기획, 큐레이팅, 미술칼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bomi1020@gmail.com백경(mo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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