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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 아닌 문화를 파는 기업

간장 아닌 문화를 파는 기업

샘표식품의 기업문화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갑의 횡포로 사회가 시끄러울 때 샘표의 존재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창업자인 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아 샘표를 문화기업으로 만들고 있는 박진선 대표를 만났다.



“기업 경영의 목표는 직원들의 행복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샘표식품 박진선 대표. 샘표는 창립 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
대기업 3세의 언행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때에 주목받는 기업이 있다. 여타 중견기업과는 다른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 샘표식품이다. 1946년 창립해 할아버지(박규회 창업자), 아들(박승복 회장)에 이어 손자(박진선 대표)가 경영하고 있다. 샘표도 3세가 경영을 하고 있지만, 별다른 잡음이 없다. 오히려 3세 경영인에 대해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다. 2014년 12월 12일 임직원이 직접 작성하는 기업평가 사이트 잡플래닛이 발표한 ‘경영진 만족도 순위’에서도 샘표는 상위권에 올랐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익명의 샘표 평가자들은 ‘수평적인 분위기’ ‘인간적인 사장님’ 등을 언급하면서 경영진에 높은 점수를 줬다.

‘내 가족이 먹지 않는 음식은 만들지도 팔지도 않겠다’는 박규회 창업자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까지 품질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도 없다. 샘표를 경영하는 박진선(64)대표는 경영 목표를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원의 행복과 소비자에게 좋은 기업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표에게 ‘뭔가 특별한’ 샘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 대표에게 본지가 인터뷰 제안을 했을 때 “면접 주간에는 인터뷰가 안된다”며 “면접 보는 주는 피하자”는 응답이 왔다. 직원 면접의 중요성을 아무리 인정해도 일주일 동안 대표가 계속 면접에 참여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직원을 대하는 박 대표의 이야기를 들으면 수긍할 수 있다.

샘표의 면접은 구직자에게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면접은 5일 동안, 즉 일주일 내내 진행된다. 2000년부터 요리 면접도 포함시켰다. 박 대표는 “회사 성격에 맞아 도입했는데, 개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팀별로 요리를 하다보면 개개인의 성격이 나온다. 음식을 하다가 돌발상황이 터졌을 때 대응방법이 면접자마다 천양지차라고 한다.
 직원 수의 10%를 공채로 뽑는 기업
아버지 박승복 회장(왼쪽)과 아들 박진선 대표는 샘표의 창업자인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직원 중심의 회사로 키워냈다. 90세가 넘은 박 회장은 여전히 회사에 출근해 일할 정도로 건강하다.
샘표의 공채가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인원수 때문이다. “현재 직원 수의 10% 정도를 매년 신규채용한다.” 2014년 말 샘표의 직원은 650명 정도. 2014년 말 공채로 뽑는 인원은 60여 명으로 대기업과 비교해도 무척 큰 비율이다.

전체 임직원이 28만 명에 달하는 삼성그룹은 2014년 9000명 정도의 신입사원을 채용했고, LG그룹은 3500명, 현대차그룹은 2500명을 뽑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체 임직원수 비율로 따지면 5%가 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직원을 뽑아도 괜찮나”라는 질문에 박 대표는 “직원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웃었다. “기업을 운영하는 대표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직원이 무슨 일을 할지, 어떻게 인원 배치를 해야 하는지 큰 그림을 그릴줄 알아야 한다. 2014년 매출은 2013년보다 안좋았고, 매출에 비해 직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공채 인원을 높게 잡는 이유가 있다.”

박 대표가 기업을 경영하는 목표 중 하나는 직원들에게 주 40시간 이상은 절대로 일을 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2014년 한국의 법정근로시간은 40시간이지만, 이를 지키는 기업이 드문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표의 발언은 신선할 수 밖에 없다. “직원이 직장에서 40시간씩 일을 하게 되면 회사 생활이 즐겁지 않게 된다. 근로시간을 줄이려면 일하는 사람을 늘리는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샘표의 공채를 통과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수백대 일의 경쟁률은 보통. 그만큼 사람을 뽑는 시간도 철저하고 길다. 박 대표도 일주일 동안 지원자 면접에 꼬박 참여한다. 면접이 늦어져 저녁 늦게 퇴근할 때도 있다.

샘표의 공채에 또 다른 특징은 차별이 전혀 없다는 것. 2013년 공채를 통해 선발된 여성 신입사원 중에는 기혼자가 있었고, 34살 신입사원도 뽑혔다. 여성이라고 해서, 고졸이라고 해서 차별받는 것은 없다. 임신부도 면접을 볼수 있다. 토익점수나 성적, 전공 등도 모두 상관없다. 능력만 있으면 된다. 이런 파격적인 채용이 가능한 건 창업자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샘표는 창업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인위적인 구조조정을 해본 적이 없다. “구조조정은 기업가의 경영능력 부족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박 대표는 목소리를 높였다. ‘직원이 먼저’라는 샘표의 전통을 만든 이는 창업자 고 박규회 회장이다.

1970년대 맥주 용기를 재활용해 간장병으로 썼던 시절. 일용직 아주머니들이 맥주병을 세척했다. 1970년대 중반 산업지원금을 받아 유리병 자동 세척기를 들여올 당시, 창업자는 기계가 들어오기 전 날 일용직 아주머니를 모두 정규직 사원으로 발령 냈다. 1950년대 한국 기업 최초로 주부사원을 고용한 회사가 샘표다.

창업자의 정신은 아들과 손자로 이어졌다. 아들인 박승복 회장은 직원들을 설득(?)해 노조를 설립하게 했다. 노사분규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박 대표는 “대표가 하는 일은 샘표의 가치와 철학을 직원과 공유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월급은 대기업만큼 많지 않지만 회사 다니는 것이 행복한 일이 될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엘리트 의식 내세우지 않는 가풍 이어져
2014년 12월 11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샘표에 과징금을 부과했다. 샘표가 대리점과 특약점에 미리 지정해 둔 거래처에만 간장제품을 판매하도록 한 것 때문이었다. 샘표는 “샘표가 대리점 간 영업구역을 보장해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대리점들이 샘표에 도움을 요청해 시작한 일이다. 상권을 보호하고, 무리한 출혈경쟁을 막고 대리점간에 상생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이 소식에 대해 네티즌들은 오히려 칭찬하는 분위기다. ‘이런 갑질은 환영이다’ ‘대리점 구역을 보호해준 것은 오히려 잘한 것’ 등의 글이 올라왔다. 샘표가 보여준 정직한 기업문화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박 대표와 아버지 박 회장은 쉽게 말해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여전히 회사에 나와 일하는 박 회장은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을 지내고 국민훈장 모란장까지 받은 잘나가던 관료였다. 창업자인 할아버지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장손 박진선 대표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를 설명할 때는 ‘수재’라는 단어가 따라 붙는다.

서울 경기중, 경기고를 다닐 때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당시는 전국 석차가 없어서 전국에서 몇 등을 하는지 잘 모른다. 다만 학교 다닐 때 1~3등을 왔다갔다 했다.” 학교 졸업 후 전국의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전자공학과는 서울대 의대보다 점수가 높았다.

“아이를 박 대표처럼 공부 잘하게 만들 수 있는 비법이 뭔가”라는 사심 어린(?) 질문을 던졌다. “난 공부를 열심히 해본 적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건 무슨 소리일까.

“학창 시절 수학 시험에서 틀려 본 적이 없다. 외우고 있는 수학공식도 몇 개 안된다. 나는 공식을 외우지 않고 원리를 깨우쳤다. 원리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한다. 친구들은 외우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과외를 받아본적도, 학원을 다닌 적도 없다.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게 내 공부의 전부였다. 집에서도 책을 펴본 적이 없었다.”

대학 입학 후 첫 학기 수학 시험. “1학기 내내 음악에 빠져 살아서 교재 한번 펴본 적이 없었다”지만 시험은 봐야했다. 시험 전날 교재를 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시 시험은 리미트(lim). 배워본 적도, 공부해 본 적도 없는 분야였다. 박 대표는 7~8시간 동안 책을 보면서 리미트의 원리를 깨쳤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런 식으로 준비해서 수학을 다 맞았다. 애들 잠 안재우고 공부시키는 부모를 보면 정말 답답하다. 애가 깨어 있다고 공부를 하는 게 아니다. 암기를 시킬 게 아니라 원리를 파악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박 대표는 대학 졸업 후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전자공학과 석사를 마쳤다. 박사 과정은 ‘뜬금없이’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철학을 선택했다. 미국 대학 강단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것인지, 마음먹고 살펴볼 수 있는 과가 철학과였다”는 말로 전공을 바꾼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유학시절 만난 아내는 아주대 고계원 교수(수학과)다. 자녀는 1남1녀, 모두 결혼했다. 가족 4명이 모두 서울대를 나왔다. 심지어 며느리도 서울대 출신이다. “사위는 카이스트 출신이다. 장학금 때문에 거기 들어갔다”며 박 대표는 웃었다.

박 대표를 포함해 모든 가족이 잘 나가는 셈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든든한 배경이 있었고, 공부도 잘했다. 부족한 것 없이 탄탄대로의 길을 걸어온 이들에게 부족한 게 있다. 평범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을 수 있다는 것. ‘난 쉽게 했는데, 저 사람은 왜 저리 못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 장 프로젝트, 150여 개 레시피 선보여
“직원들 일하는 것에 만족하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나와 같은 이들의 울타리에만 머물면 평범한 사람의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철학을 전공한 것은 사회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직원들의 실력을 높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사를 물려받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던 박 대표. 1990년 그는 생각을 바꾸고 샘표 기획실장으로 입사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회사가 망할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따뜻한 마음이 유지돼야 한다”면서 교수직을 그만 둔 이유를 밝혔다.

그는 샘표를 진취적으로 만들었다. 전산망을 구축해 샘표 사내 시스템을 선진화시켰다. 1997년 대표로 취임하면서 ‘샘표=간장공장’이라는 외부의 선입견을 깨려고 노력했다. 체질개선에 들어간 것이다. 세계적 규모의 최첨단 이천 공장을 완공했고, 충북 영동에 제2공장을 세웠다. 2006년 샘표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샘표 아이장 캠페인’을 진행하기 위해 샘표 된장학교와 샘표 유기농 콩농장을 만들었다. 샘표 된장학교는 벌써 9000명의 수강생을 배출했다. 샘표 이천공장 옆에 마련한 2만3140㎡(약 7000평) 콩밭은 매년 소비자에게 분양한다. 소비자 스스로 콩을 재배해 장을 담글 수 있게 해 인기를 끌고 있다. 2013년 11월에는 ‘샘표 우리발효학교’를 만들어 발효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은 수강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제공한다. 2013년 5월 충북 오송에 ‘우리발효연구중심’이라는 연구개발(R&D)센터도 지었다. 150명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으로 200억원을 투자한 곳이다.

박 대표의 또 다른 프로젝트는 장의 세계화다. 2011년 부터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알리시아 연구소’와 손잡고 해외 장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간장, 고추장, 된장등 한국의 장을 유럽 음식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장을 처음 접하는 서양 셰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장 컨셉트 맵’을 제작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150여 가지의 레시피를 선보였다.

박 대표가 벌이고 있는 이런 일련의 시도는 ‘샘표는 문화를 파는 기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화기업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한국의 음식문화가 업그레이드된 데는 샘표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 우리처럼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곳도 드물다.”

박 대표가 해결해야 할 일도 많다. 샘표는 간장 분야에서 1위를 하고 있지만, 고추장이나 여타 장에서는 경쟁 업체에 밀리고 있다. 2014년 흑초 백년동안이 자리 잡지 못한 것도 매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2015년 목표는 연두가 제자리를 잡아 매출을 올리는 것이다. “연두는 한식간장에서 출발했다. 세상에 없던 제품인데, 세계 모든 음식에 적용될 수 있다. 2015년 연두 매출을 흑자로 돌리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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