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미의 ‘도시 미술 산책’ ⑧ 서울 청계천 ‘베를린 장벽(Berlin Mauer)’ - 단절의 상징에서 발견한 희망의 흔적
박보미의 ‘도시 미술 산책’ ⑧ 서울 청계천 ‘베를린 장벽(Berlin Mauer)’ - 단절의 상징에서 발견한 희망의 흔적
지난밤 또 꿈을 꿨다. 10년 동안이나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꿈이다. 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녀는 여전히 대학생처럼 앳되다. 향수냄새나 목소리까지 생생하다. 그녀를 만났을 때 너무나 반가워서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말했다. 눈물과 함께 마음의 벽이 드디어 허물어졌다. 그녀는 여전히 새침했지만 나는 마음을 전달한 것만도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잠에서 깨어나 모든 게 그냥 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일순간이나마 열렸다고 생각했던 그녀와 나 사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단단히 닫힌 문으로 남아있다. 오랜만의 산책, 무교동에서 매운 낙지볶음이나 먹어볼까 하고 길을 걷는다. 사거리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허름한 구조물을 보았다. 독일에서 온, 청계천 삼일빌딩 앞 삼일교와 한화빌딩 사이에 있는 진짜 ‘베를린 장벽’이다.
네거리에 우뚝 선 콘크리트 벽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는다. 벽은 낡고, 음울한 회색이다. 성난 사람이 팔을 휘두르며 남겨 놓은 스프레이 자국이 얼기설기 겹쳐있다. 추운 베를린의 겨울이 떠올라 오싹해진다. 벽을 이루는 시멘트 덩어리와 철근을 만져 본다. 두껍지만,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면 무너뜨리지 못할 것도 없는 높이 3.5m, 두께 0.4m 남짓의 벽.
이 벽은 동독과 서독을 수십 년 동안 떼어놓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벽이 있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사람 사이의 벽이란 건 해머로 내려쳐도 소용이 없다. 그것을 허무는 열쇠는 각자가 가지고 있어서, 반대편에서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밀어본들 꿈쩍도 하지 않는다.
거미줄 같은 균열과 낙서의 흔적을 관찰한다. 시간이 지나 저절로 부서져 내린 것도 있고, 누군가가 일부러 힘을 주어 뚫은 흔적도 있다. 거대한 단절의 상징에 스크래치를 내 보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벽의 피부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때 어설펐던 나도 그녀에게 그런 스크래치를 남겼겠지. 가족이나 친구,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은 누구나의 마음의 생채기를 남긴다. 어떤 경우엔 그것이 무의식까지 깊게 내려가 복잡하고도 무거운 꿈을 꾸게 만든다.
베를린 장벽을 보고 있자니 지난밤의 꿈도, 이루지 못한 만남도, 마음에 맺힌 한 마디 말도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 앞에 그저 힘없이 부서져 떨어지는 먼지처럼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진 불신과 미움, 그리고 시간과 두려움의 벽 앞에서 우리는 벽을 탓하지만 실은 자신이 쌓은 쪽 담은 잊곤 한다. 나와 남편, 나와 자식, 나와 부모, 친구들 사이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둔 견고한 벽은 돌아선 등만큼 차디차다.
숨이 턱 막히는 회색 콘크리트를 망치와 해머로 부수는 광경을 그려본다. 그들 마음의 응어리와 소원과 분노가 땀구멍 같은 콘크리트 벽 사이에 촘촘하게 스며있다. 누군가의 힘으로 부서진 조그마한 구멍. 그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누군가를 많이 보고 싶어 하고, 함께 있고 싶지만 어떤 이유로 가로막힌 운명에 놓인 사람에겐 그저 이어진 하늘이 다행이고, 위안이다.
이 구멍을 뚫은 서독의 그 누군가가 염원했듯, 작은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며 그녀와 나도 15년 동안 딱 저만큼의 틈이 허물어지진 않았을까 기대해 본다. 서로 만나지도,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지만 아마 세월과 경험이 서로의 상처에 그 정도의 틈은 허락해주지 않았을까. 15년 전 그녀는 꿈에서조차 나를 외면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거듭되는 꿈속에서 그녀는 나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요즘엔 말없이 함께 거리를 걷기도 하고, 예전처럼 서로의 집에서 차를 마시기도 한다. “지난 번너를 만나서 어찌나 생생하고 반갑던지, 하지만 꿈이란 걸 알고 정말 슬펐어”라고 나는 번번이 말한다. 다시 모든 것이 꿈이란 걸 깨달을 때마다 느끼는 아침의 허탈함조차 이제는 좀 익숙해졌다.
소망과는 다르게 여전히 현실은 견고하다. 나는 그녀에게 연락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고, 그녀는 먼 이국땅에서 다른 인간관계를 맺고 산다. 나는 나, 그녀는 그녀만의 인생을 살아간다. 어쩌면 다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나를 거부한 사람의 단호함만큼이나 미련한 집착일지도 모른다. 그늘 속 퇴색한 낙서와 균열이 가득한 음울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오후 2시 5분, 갑자기 빌딩 사이를 뚫고 나온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베를린 장벽은 일순간 그럴듯한 추상화가 그려진 캔버스로 바뀐다. 짙은 회색의 벽은 따뜻하고 밝은 캔버스로 변하고, 지저분해 보이던 페인팅이 홍조를 띤 활기찬 컬러로 변했다. 부서진 콘크리트의 표면은 직사광선을 받아 그동안의 수 없는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의 고단했던 숨결들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장벽은 무너졌다. 이 벽은 이제 인간 서로의 불운하고 폭력적인 단절의 상징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변했다. 그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여전히 존재하는 분단선이나 지역갈등을 넘어, 그저 너와 나 사이에 우뚝 솟은 벽이란 벽이 언젠가는 모두 허물어지기를. 언젠가는 으스러져 모래가 될 모습을 상상하며 벽을 향해 마음속으로 망치를 들어본다. 사실 문제는 물리적인 벽이 아니다. 내 생각과 고집이 만든 성벽을 천천히 무너뜨리다 보면, 어쩌면 너와 나 사이에 기적처럼 포옹하게 될 날이 진짜로 올지 모른다. 언젠가는 꿈이 아닌, 뼈와 살을 가진 진짜 너를 만날지도 모른다.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곳 _ 청계천 삼일교 인근 청계2가 사거리베를린 장벽은 1961년 동독에서 설치했다. 독일이 통일되면서 1989년 철거된 베를린 장벽은 베를린시 동부 지역 마르쨘 휴양공원에 전시됐다. 이 중 일부 구간이 120여개 부분으로 나뉘어 40여개 국가로 옮겨졌는데, 삼일교 사거리에 위치한 베를린 장벽도 이 중 하나다. 2005년 9월 독일이 우리나라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현재 위치에 베를린 공원을 조성하고, 베를린시의 상징인 푸른 곰과 가로등, 벤치, 갈참나무 등과 함께 베를린 장벽 일부를 설치했다. 서울시는 우리은행 후원으로 독일 마르쨘 휴양공원에 ‘서울공원’을 조성했다.박보미 - 문화예술 기업 ‘봄봄(vomvom)’ 디렉터.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제디자인대학교대학원(IDAS)에서 미디어디자인을 공부했다. 영화미술, 전시기획, 큐레이팅, 미술칼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bomi1020@gmail.com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잠에서 깨어나 모든 게 그냥 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일순간이나마 열렸다고 생각했던 그녀와 나 사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단단히 닫힌 문으로 남아있다. 오랜만의 산책, 무교동에서 매운 낙지볶음이나 먹어볼까 하고 길을 걷는다. 사거리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허름한 구조물을 보았다. 독일에서 온, 청계천 삼일빌딩 앞 삼일교와 한화빌딩 사이에 있는 진짜 ‘베를린 장벽’이다.
네거리에 우뚝 선 콘크리트 벽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는다. 벽은 낡고, 음울한 회색이다. 성난 사람이 팔을 휘두르며 남겨 놓은 스프레이 자국이 얼기설기 겹쳐있다. 추운 베를린의 겨울이 떠올라 오싹해진다. 벽을 이루는 시멘트 덩어리와 철근을 만져 본다. 두껍지만,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면 무너뜨리지 못할 것도 없는 높이 3.5m, 두께 0.4m 남짓의 벽.
이 벽은 동독과 서독을 수십 년 동안 떼어놓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벽이 있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사람 사이의 벽이란 건 해머로 내려쳐도 소용이 없다. 그것을 허무는 열쇠는 각자가 가지고 있어서, 반대편에서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밀어본들 꿈쩍도 하지 않는다.
거미줄 같은 균열과 낙서의 흔적을 관찰한다. 시간이 지나 저절로 부서져 내린 것도 있고, 누군가가 일부러 힘을 주어 뚫은 흔적도 있다. 거대한 단절의 상징에 스크래치를 내 보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벽의 피부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때 어설펐던 나도 그녀에게 그런 스크래치를 남겼겠지. 가족이나 친구,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이별은 누구나의 마음의 생채기를 남긴다. 어떤 경우엔 그것이 무의식까지 깊게 내려가 복잡하고도 무거운 꿈을 꾸게 만든다.
베를린 장벽을 보고 있자니 지난밤의 꿈도, 이루지 못한 만남도, 마음에 맺힌 한 마디 말도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 앞에 그저 힘없이 부서져 떨어지는 먼지처럼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진 불신과 미움, 그리고 시간과 두려움의 벽 앞에서 우리는 벽을 탓하지만 실은 자신이 쌓은 쪽 담은 잊곤 한다. 나와 남편, 나와 자식, 나와 부모, 친구들 사이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둔 견고한 벽은 돌아선 등만큼 차디차다.
숨이 턱 막히는 회색 콘크리트를 망치와 해머로 부수는 광경을 그려본다. 그들 마음의 응어리와 소원과 분노가 땀구멍 같은 콘크리트 벽 사이에 촘촘하게 스며있다. 누군가의 힘으로 부서진 조그마한 구멍. 그 구멍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누군가를 많이 보고 싶어 하고, 함께 있고 싶지만 어떤 이유로 가로막힌 운명에 놓인 사람에겐 그저 이어진 하늘이 다행이고, 위안이다.
이 구멍을 뚫은 서독의 그 누군가가 염원했듯, 작은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며 그녀와 나도 15년 동안 딱 저만큼의 틈이 허물어지진 않았을까 기대해 본다. 서로 만나지도,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지만 아마 세월과 경험이 서로의 상처에 그 정도의 틈은 허락해주지 않았을까. 15년 전 그녀는 꿈에서조차 나를 외면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거듭되는 꿈속에서 그녀는 나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요즘엔 말없이 함께 거리를 걷기도 하고, 예전처럼 서로의 집에서 차를 마시기도 한다. “지난 번너를 만나서 어찌나 생생하고 반갑던지, 하지만 꿈이란 걸 알고 정말 슬펐어”라고 나는 번번이 말한다. 다시 모든 것이 꿈이란 걸 깨달을 때마다 느끼는 아침의 허탈함조차 이제는 좀 익숙해졌다.
소망과는 다르게 여전히 현실은 견고하다. 나는 그녀에게 연락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고, 그녀는 먼 이국땅에서 다른 인간관계를 맺고 산다. 나는 나, 그녀는 그녀만의 인생을 살아간다. 어쩌면 다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나를 거부한 사람의 단호함만큼이나 미련한 집착일지도 모른다.
퇴색한 기념물이 예술이 되는 순간
장벽은 무너졌다. 이 벽은 이제 인간 서로의 불운하고 폭력적인 단절의 상징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변했다. 그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여전히 존재하는 분단선이나 지역갈등을 넘어, 그저 너와 나 사이에 우뚝 솟은 벽이란 벽이 언젠가는 모두 허물어지기를. 언젠가는 으스러져 모래가 될 모습을 상상하며 벽을 향해 마음속으로 망치를 들어본다. 사실 문제는 물리적인 벽이 아니다. 내 생각과 고집이 만든 성벽을 천천히 무너뜨리다 보면, 어쩌면 너와 나 사이에 기적처럼 포옹하게 될 날이 진짜로 올지 모른다. 언젠가는 꿈이 아닌, 뼈와 살을 가진 진짜 너를 만날지도 모른다.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곳 _ 청계천 삼일교 인근 청계2가 사거리베를린 장벽은 1961년 동독에서 설치했다. 독일이 통일되면서 1989년 철거된 베를린 장벽은 베를린시 동부 지역 마르쨘 휴양공원에 전시됐다. 이 중 일부 구간이 120여개 부분으로 나뉘어 40여개 국가로 옮겨졌는데, 삼일교 사거리에 위치한 베를린 장벽도 이 중 하나다. 2005년 9월 독일이 우리나라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현재 위치에 베를린 공원을 조성하고, 베를린시의 상징인 푸른 곰과 가로등, 벤치, 갈참나무 등과 함께 베를린 장벽 일부를 설치했다. 서울시는 우리은행 후원으로 독일 마르쨘 휴양공원에 ‘서울공원’을 조성했다.박보미 - 문화예술 기업 ‘봄봄(vomvom)’ 디렉터.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제디자인대학교대학원(IDAS)에서 미디어디자인을 공부했다. 영화미술, 전시기획, 큐레이팅, 미술칼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bomi10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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