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기업화, 별 수 없다고?
대학의 기업화, 별 수 없다고?
봄이다. 대학가는 새학기를 맞이해 분주히 움직이는 학생들로 들썩인다. 교정 곳곳에선 개나리, 진달래가 꽃을 피우고 잔디밭은 녹색으로 물든다. 낭만을 즐기는 학생들은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인다. 다가오는 중간고사 준비에 여념 없는 학생들이 도서관에 가득한 때이기도 하다.
2015년 대학가의 봄은 조금 다르다. 학생들이 잔디밭과 도서관 대신 광장으로, 총장실로 몰려든다. 여러 대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학과 통폐합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곳만 꼽아도 경기대, 중앙대, 한성대, 건국대, 서울예대 등 한두 곳이 아니다. 학과 통폐합을 계획 중이라고 알려진 대학들까지 더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통폐합의 대상은 대체로 인문계열, 예술계열 등 순수학문이다. 건국대가 지난 3월 22일 발표한 학사 구조 개편안엔 기존 73개 학과 중 10개를 통폐합해 63개 학과로 줄이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영상학과와 영화학과, 텍스타일디자인학과와 공예학과 등 서로 연관성 없는 학과를 통합하겠다는 발표에 학생들은 항의 의사를 표하며 행정관 점거 시위에 돌입했다. 4월 2일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학사 개편 반대 집회엔 서울 각 대학에서 총 2345명이 참석해 뜻을 함께했다.
학교측의 일방적인 학사 개편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월 학과제를 완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가 극심한 반발에 직면해 계획을 취소한 중앙대는 이미 2011년에 18개 대학 77개 학과를 11개 대학 47개 학과로 통폐합한 전례가 있다. 건국대 역시 2005년 불문과와 독문과를 통합해 EU문화정보학과로 만들었다가 2008년 이 전공조차 폐지했다. 그 밖에도 사례는 무수히 많다.
올해 들어 이 문제가 보다 크게 부각된 이유 중 하나는 학과 통폐합의 규모가 일부 학과에 대해 암암리에 실시되던 과거에 비해 너무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큰 원동력은 적극 대응에 나선 건국대 영화과였다. 유명 연예인들이 건국대 영화과 통폐합 지지를 선언하면서 화제를 일으켰다. 바꿔 말하면 사안 자체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서가 아니라 연예인들의 힘이 있었던 덕분에 비로소 화제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한성대, 서울예대, 심지어 건국대 내의 다른 통폐합 대상 학과조차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충남대, 배재대 등 수도권 바깥의 수많은 대학은 말할 것도 없다.
학교측의 입장은 간단하다. 대학 경쟁력 향상을 위해선 경쟁력 없는 학과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경쟁력이란 취업률에 다름 아니다. 중앙대는 학과제 폐지안을 내놓으면서 “산업과 대학 간 미스매치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건국대 역시 “취업을 포함한 학과 경쟁력 향상에 힘쓰겠다”고 했다. 이들의 말은 곧 대학이 기업의 요구를 충족하는 졸업생을 배출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해선 기업이 필요로 하지 않는 학과를 줄여 보다 ‘경쟁력’ 있는 학문에 투자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학문의 차원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서강대 유기풍 총장은 “국내 대학 어디도 돈이 중요하다는 걸 가르치는 곳이 없다”고 한 인터뷰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 자꾸 기업가와 부자를 적대시하는 풍조가 생기는 겁니다. 대학이 학생에게 제대로 가르쳐줘야 합니다.” 한국경제신문은 지난해 9월 사설에서 인문학 전공자가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반시장주의, 반자본주의를 인문학으로 위장하는 강남좌파식 교수들’로 인해 ‘지독한 반기업 정서’에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러니 성숙한 민주주의의 버팀목인 건전한 직업인 육성을 기대할 수 없다.’ 대학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은 물론 친기업적 정신까지 주입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한국 대학이 친기업의 세계로 ‘진격’하는 시기에 적절한 신간이 나왔다. ‘진격의 대학교’는 최근 대학의 실태를 고발하는 일종의 사례집이다. 오찬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이 1226장에 달하는 학생들의 제출물, 교수·강사·교직원들의 제보, 수업 중 만났던 학생들과의 토론 자료를 집대성했다.
저자가 거창한 분석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사례 수집에 집중한 데는 이유가 있다. “대학의 기업화라는 이 책의 주제는 낯설지 않다”고 저자는 서론에서 밝힌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 ‘별 수 있어?’라는 체념적 순응뿐이다. 이 문제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게 하려면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라며 충격을 받을 만한 사례를 드러내는 수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대학을 졸업한지 몇 년 되지 않은 나조차 충격에 빠지게 할 만큼 놀라운 사례로 가득하다.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어떤 대학생들은 ‘신입생 길잡이’라는 수업에서 어떻게 웃어야 면접 때 좋은 인상을 주는지, 어떤 자기소개서가 인사담당자의 눈을 사로잡는지를 배운다. 신입생은 반드시 들어야 하는 강의다. ‘비즈니스와 생활예절’이라는 수업에선 “지시사항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원은 상사가 좋아하지 않는다” “상사를 수행할 때는 상사의 오른쪽 두세 걸음 뒤에서 걷는다” 따위의 문장에 밑줄을 쳐가며 공부한다. 나비넥타이 매는 법을 실습하고 실기평가까지 받는다. ‘진로탐색’ 수업에선 각 대기업의 인재상과 요구 스펙을, ‘스포츠면접 대비법’ 수업에선 ‘애드벌룬 배구, 피구, 족구, 2인3각, 단체줄넘기’ 등 기업이 합숙면접 때 종종 테스트하는 운동 종목을 배운다.
오 연구원은 대학이 기업에서 요구하는 “특정한 가치만 추종하는 의사결정을 강요”하며, 그 속에서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특정한 가치로 무장된 시민은 곧 “죽은 시민”이다. 모든 시민이 친기업 정서로 일치단결하고, 기업이 요구하지 않는 지식은 무시하고, 기업에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진격의 대학교’는 그런 사회가 우리 눈앞까지 다가와 있음을 숱한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기업 논리에 사로잡힌 곳은 대학뿐만이 아니다.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서 기업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대학 하나만 문제시하고 개혁해서 될 일은 아니다. 오늘날 대학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돌출된 괴물이 아니라 그 사회의 일부이자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거창한 해결 방안이나 개혁 과제를 내놓지 않는 이유다. “이 책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말을 프롤로그에서 한 번,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취업이 안 된다는 이유로 학과를 폐지하지 않는 것, 대안 찾기는 그 지점부터 시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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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대학가의 봄은 조금 다르다. 학생들이 잔디밭과 도서관 대신 광장으로, 총장실로 몰려든다. 여러 대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학과 통폐합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곳만 꼽아도 경기대, 중앙대, 한성대, 건국대, 서울예대 등 한두 곳이 아니다. 학과 통폐합을 계획 중이라고 알려진 대학들까지 더하면 그 수는 더 많아진다.
통폐합의 대상은 대체로 인문계열, 예술계열 등 순수학문이다. 건국대가 지난 3월 22일 발표한 학사 구조 개편안엔 기존 73개 학과 중 10개를 통폐합해 63개 학과로 줄이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영상학과와 영화학과, 텍스타일디자인학과와 공예학과 등 서로 연관성 없는 학과를 통합하겠다는 발표에 학생들은 항의 의사를 표하며 행정관 점거 시위에 돌입했다. 4월 2일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학사 개편 반대 집회엔 서울 각 대학에서 총 2345명이 참석해 뜻을 함께했다.
학교측의 일방적인 학사 개편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월 학과제를 완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가 극심한 반발에 직면해 계획을 취소한 중앙대는 이미 2011년에 18개 대학 77개 학과를 11개 대학 47개 학과로 통폐합한 전례가 있다. 건국대 역시 2005년 불문과와 독문과를 통합해 EU문화정보학과로 만들었다가 2008년 이 전공조차 폐지했다. 그 밖에도 사례는 무수히 많다.
올해 들어 이 문제가 보다 크게 부각된 이유 중 하나는 학과 통폐합의 규모가 일부 학과에 대해 암암리에 실시되던 과거에 비해 너무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큰 원동력은 적극 대응에 나선 건국대 영화과였다. 유명 연예인들이 건국대 영화과 통폐합 지지를 선언하면서 화제를 일으켰다. 바꿔 말하면 사안 자체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서가 아니라 연예인들의 힘이 있었던 덕분에 비로소 화제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한성대, 서울예대, 심지어 건국대 내의 다른 통폐합 대상 학과조차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충남대, 배재대 등 수도권 바깥의 수많은 대학은 말할 것도 없다.
학교측의 입장은 간단하다. 대학 경쟁력 향상을 위해선 경쟁력 없는 학과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경쟁력이란 취업률에 다름 아니다. 중앙대는 학과제 폐지안을 내놓으면서 “산업과 대학 간 미스매치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건국대 역시 “취업을 포함한 학과 경쟁력 향상에 힘쓰겠다”고 했다. 이들의 말은 곧 대학이 기업의 요구를 충족하는 졸업생을 배출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위해선 기업이 필요로 하지 않는 학과를 줄여 보다 ‘경쟁력’ 있는 학문에 투자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학문의 차원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서강대 유기풍 총장은 “국내 대학 어디도 돈이 중요하다는 걸 가르치는 곳이 없다”고 한 인터뷰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 자꾸 기업가와 부자를 적대시하는 풍조가 생기는 겁니다. 대학이 학생에게 제대로 가르쳐줘야 합니다.” 한국경제신문은 지난해 9월 사설에서 인문학 전공자가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반시장주의, 반자본주의를 인문학으로 위장하는 강남좌파식 교수들’로 인해 ‘지독한 반기업 정서’에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러니 성숙한 민주주의의 버팀목인 건전한 직업인 육성을 기대할 수 없다.’ 대학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은 물론 친기업적 정신까지 주입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한국 대학이 친기업의 세계로 ‘진격’하는 시기에 적절한 신간이 나왔다. ‘진격의 대학교’는 최근 대학의 실태를 고발하는 일종의 사례집이다. 오찬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이 1226장에 달하는 학생들의 제출물, 교수·강사·교직원들의 제보, 수업 중 만났던 학생들과의 토론 자료를 집대성했다.
저자가 거창한 분석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사례 수집에 집중한 데는 이유가 있다. “대학의 기업화라는 이 책의 주제는 낯설지 않다”고 저자는 서론에서 밝힌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 ‘별 수 있어?’라는 체념적 순응뿐이다. 이 문제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게 하려면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라며 충격을 받을 만한 사례를 드러내는 수밖에 없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대학을 졸업한지 몇 년 되지 않은 나조차 충격에 빠지게 할 만큼 놀라운 사례로 가득하다.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어떤 대학생들은 ‘신입생 길잡이’라는 수업에서 어떻게 웃어야 면접 때 좋은 인상을 주는지, 어떤 자기소개서가 인사담당자의 눈을 사로잡는지를 배운다. 신입생은 반드시 들어야 하는 강의다. ‘비즈니스와 생활예절’이라는 수업에선 “지시사항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원은 상사가 좋아하지 않는다” “상사를 수행할 때는 상사의 오른쪽 두세 걸음 뒤에서 걷는다” 따위의 문장에 밑줄을 쳐가며 공부한다. 나비넥타이 매는 법을 실습하고 실기평가까지 받는다. ‘진로탐색’ 수업에선 각 대기업의 인재상과 요구 스펙을, ‘스포츠면접 대비법’ 수업에선 ‘애드벌룬 배구, 피구, 족구, 2인3각, 단체줄넘기’ 등 기업이 합숙면접 때 종종 테스트하는 운동 종목을 배운다.
오 연구원은 대학이 기업에서 요구하는 “특정한 가치만 추종하는 의사결정을 강요”하며, 그 속에서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특정한 가치로 무장된 시민은 곧 “죽은 시민”이다. 모든 시민이 친기업 정서로 일치단결하고, 기업이 요구하지 않는 지식은 무시하고, 기업에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진격의 대학교’는 그런 사회가 우리 눈앞까지 다가와 있음을 숱한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기업 논리에 사로잡힌 곳은 대학뿐만이 아니다.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서 기업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대학 하나만 문제시하고 개혁해서 될 일은 아니다. 오늘날 대학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돌출된 괴물이 아니라 그 사회의 일부이자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거창한 해결 방안이나 개혁 과제를 내놓지 않는 이유다. “이 책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말을 프롤로그에서 한 번,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취업이 안 된다는 이유로 학과를 폐지하지 않는 것, 대안 찾기는 그 지점부터 시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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