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10대 기업 DNA,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9) 한진그룹
한국 10대 기업 DNA, 창업주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 (9) 한진그룹
포브스코리아와 한국경영사학회가 공동 진행하는 특별기획‘한국 10대 기업 핵심 DNA, 창업자들의 기업가정신을 찾아서’의 마지막 회는 대한민국의 하늘길을 연 한진그룹이다. 조중훈 창업회장과 현재 한진그룹 경영을 이끌고 있는 조양호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조명했다. 우리의 삶에 희노애락이 교차하듯 기업 경영도 궂은 날이 있고 기쁜 날이 있다. 연초의 어려움을 딛고 최근 한진그룹에 두 가지 경사가 있었다. 올해 창사 70돌을 맞아 4년 전부터 준비한 정석(靜石) 조중훈 선대회장의 전기 『사업은 예술이다』출간작업이 완료돼 기념식을 가진 것이다. 과거 포브스코리아 기자로 활동했던 이임광 전기작가가 4년 6개월 동안 40여 명의 한진그룹 원로 및 지인을 인터뷰해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아 쓴 역작이다.
조양호(66) 한진그룹 회장은 지난 11월 2일 하얏트인천 웨스트타워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한진그룹 창립 70주년 기념식에서 “사업을 예술처럼 여기며 스스로 또 하나의 길이 되셨던 선대회장님의 그 길을 따라 한진그룹은 계속 전진하며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며 “보다 많은 가치를 창출하며 국가와 고객에게 헌신하는 한진그룹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한진그룹 임직원들은 창사 70돌과 선대 회장의 전기 발간을 계기로 창업정신과 수송보국의 경영철학을 되새기고 한진그룹의 미래 70년을 만들어가는데 전 임직원이 한데 뭉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화려한 퍼포먼스 없이 치른 그룹의 고희연이었지만 나름 실속 있는 기념행사였다는 후문이다.
또 하나의 경사는, 조양호 회장이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을 받은 것이다. 조 회장은 지난 11월 4일 그랜드하얏트서울 호텔에서 방한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 훈장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조양호 회장이 2000년부터 민간 차원의 대불 협력창구인 ‘한-불 최고경영자클럽’ 한국측 위원장을 맡아 한불간 경제교류에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2013년부터 ‘한-불 상호교류의 해’ 한국측 조직위원장을 맡아 양국간 경제·문화·예술 교류 활성화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발표했다.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조 회장에게 직접 훈장을 수여하면서 “프랑스는 조양호 회장과 같은 친구를 갖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며 격려했다. 조 회장도 “이번 훈장 수훈은 선친부터 2대에 걸쳐 한-불 관계 발전 및 문화교류에 이바지해온 노력이 인정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몸을 낮췄다. 지금까지 그랑도피시에 등급의 훈장을 수훈한 한국인은 조중훈 선대회장 한 명뿐이었다. 이로써 한진 그룹의 두 거물은 대를 이어 한국인 최고 등급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보유한 영예로운 기업이 됐다.
이쯤 되면 한진그룹의 창업자인 정석 조중훈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진다. 정석은 1920년 서울 서대문에서 조명희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남 진해의 해원양성소(지금의 해양대학교) 기관과를 우등생으로 졸업한 17세의 조중훈은 관부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에 있는 선박회사에 취직한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20세가 되던 해에 2등 기관사 자격증을 따 낸다. 정석은 일본 조선소에서 1급 기술자 대우를 받은 덕분에 중국의 톈진과 상하이, 홍콩, 마카오, 마닐라 등 동남아시아 일대를 두루 돌아보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이 때의 경험은 그가 필생의 운송사업에 눈을 뜨게 한계기가 되었다.
1942년, 22세의 조중훈은 사업가의 꿈을 안고 일본에서 그동안 푼푼이 모아 저축한 돈으로 보링기계 한 대를 구입해 귀국한다. 정석은 큰 뜻을 품고 엔진 재생 전문 자동차 수리업체인 이연공업사를 차렸지만 첫 사업에서는 실패를 맛보고 만다. 이윽고 해방이 되자 25세의 청년 조중훈은 트럭 한 대를 구입해 ‘한진상사’ 라는 간판을 내건다. 1945년 11월 1일이었다. 인천시 해안동 2가 9번지가 바로 한진의 탯자리다. ‘한진’이란 ‘한민족의 전진’을 의미한다. 한국의 진보를 위하여 한진상사가 노력하겠다는 사업보국의 이념과 의지를 두 글자로 함축했다.
한진상사는 처음에 인천항의 화물선에서 내려지는 물자들을 소비자의 손에까지 운반하는 운송사업을 시작했다. 1947년에는 교통부로부터 경기도 일원에 대한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정식으로 받아 수송사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창업한 지 5년이 지나자 한진상사는 종업원 40여 명과 트럭 15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중견기업으로 도약하려는 고빗길에서 6·25동란으로 모두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석은 특유의 낙관성으로 폐허 속에도 다시 트럭 한 대로 운송사업을 재개한다. 그동안 굳건하게 다져놓은 신용이 있었기에 투자자들로부터 무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옛 단골들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그래서 휴전 2년 후인 1955년에는 한국전쟁 이전의 사세를 거의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석은 수송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뜻의 수송보국(輸送報國)의 신념으로 한 평생 수송 외길을 걸었던 기업인이다. 이는 “교통과 수송은 인체의 혈관처럼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기간산업이므로 수송으로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철학이다. 정석은 61년 8월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매입, 서울-인천 구간에서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사업을 시작했다. 한진고속의 시초다. 이후 정석은 67년 7월, 자본금 2억원으로 해운업 진출을 위해 대진해운을 세웠다. 이와 함께 하역장비, 차량, 선박 등에 대한 막대한 보험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도 인수했다.
69년에는 대한항공공사(KAL)를 인수하게 된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수명이 다한 프로펠러 비행기 7대와 제트기 1대를 겨우 보유하고 있었다. 동남아 11개국 항공사 중 최하위 항공사였다. 하지만 정석은 박정희 대통령이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 아니냐.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전용기는 그만두고서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여행 한 번 해보는 게 내 소망이다”라는 간곡한 권유를 받아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정석은 당시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반대하는 회사 간부들에게 “돈을 벌자고 시작했다가 밑지는 사업도 있고, 밑지면서도 계속 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이다. 만인에게 유익한 사업이라면 만 가지 어려움과 싸워나가면서 키우고 발전시켜 나가는 게 기업의 진정한 보람 아니겠느냐!”며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임을 강조해 설득했다고 한다. 정석의 이러한 수송보국은 헛되지 않았다. 지금 대한항공은 항공화물수송 세계 3위, 항공여객수송 세계 12위의 거대 항공사가 됐다. 77년 5월 정석은 육해공 종합수송 그룹의 완성을 위해, 수산업에 치중하다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하게 된다.
이처럼 한진그룹이 설립하거나 인수한 회사들은 수송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이를 보조할 수 있는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지난 70년 동안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수송외길만 걸어온 한진그룹은 대한항공, 한진해운, 한진을 주축으로 육해공을 아우르는 종합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정석은 평소 기업을 운영하면서 “사업은 예술이다. 기업은 인간이다. 기업은 사회적 책임주의의 공익정신이며, 사업보국주의를 공익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이는 정석의 특징적인 기업가정신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정석을 대표하는 경영이념이 된 ‘사업은 예술이다’라는 명제는 사업가도 예술가의 신념과 노력으로 모든 사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조중훈 회장의 기업 경영 철학이 표현되어 있는 말이다. 정석은 남들이 터를 다져놓은 사업에 뛰어들지 않고 신념과 창의로 수송분야를 개척하면서 사업을 예술로 승화시킨 기업인이었다. 때문에 그가 사업은 예술이라고 한 것은 ‘예술가가 자기의 착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듯이, 기업가도 예술가적인 신념과 노력으로 모든 사업에 전념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기업활동을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기업이기는 하지만 결코 추해서는 안되며, 아름다운 결실을 맺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기업활동도 훌륭한 예술작품과 같이 균형과 조화, 개성과 창의력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정석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 예술가의 혼과 철학이 담긴 창작품은 수천년이 지나도 그 아름다움과 예술적 가치를 잃지 않듯이 경영자의 독창적 경륜을 바탕으로 발전한 기업은 오랫동안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면서 “사업은 예술과 같다”고 했던 것이다.
정석은 또 기업 경영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남을 모방하지 말고 자신의 혼을 담아야 한다. 그래야 창의력과 아이디어, 노력이 융합해 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생전에 조중훈 회장과 교분이 두터웠던 손길승 전 전경련 회장은 “조중훈은 성공한 사업가를 뛰어넘는다. 수송사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키우고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위대한 거장”이라고 칭송했다. 이런 평가를 보면 “사업은 예술이다”는 그의 신조가 단순히 예술적인 수사가 아니라 기업가인 그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석은 신용이 확실한 기업인이었다고 한다. 정석은 평소 “사업은 지고도 이기는 것이고,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다”라는 말을 즐겨했다. 한진이 주한미군 용역사업에 참여한 1956년 무렵 ‘지고도 이긴다’는 정석의 사업 신념이 빛을 발휘한 일화가 있다. 어느 트럭회사로부터 임차한 차량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파카 1300여 벌을 차떼기로 남대문 시장에 팔아 넘긴, 돌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조중훈 회장은 사태 해결을 위해 직원 한 명을 남대문 시장에 상주시키고는 도난 당한 물건이 시장에 유통되면 전부 사들이도록 했다. 정석의 문제 해결 능력과 신용을 지키려는 열의를 본 미군들은 그 후 한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이로써 조중훈 회장은 당장 3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큰 금전적 손해를 봤지만 미군으로부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용을 얻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을 독점, 계약고 290만 달러에 가용차량이 500대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석은 사업을 하면서 사람과 사람의 신뢰관계를 특히 중시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네트워크, 인맥관리의 달인이었다. 한번 거래를 맺은 고객과 신용을 유지했고, 인연을 맺은 미군들의 경조사에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이렇게 맺은 그의 인맥과 신용은 베트남 진출 추진 당시 미국 국방성에서도 정석 조중훈의 이름이 회자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 정석이 미군 용역 사업을 하면서 10년 동안 사귄 많은 수송계통의 장교들 이 나중에 베트남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미군의 주한근무는 1년 주기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산술적으로는 정석이 10년의 세월 동안 3천명에 가까운 미군장병들과 안면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들의 고된 해외생활에 정석이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고 철저하고 완벽한 인간관계와 인간적 유대를 쌓은 것이 무형의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한진그룹 기업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한진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의 군수물자 운송 용역을 맡았던 퀴논항 사업이었다. 정석은 1965년 12월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으로서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동남아 순방을 하게 된다. 마지막 방문지였던 베트남의 퀴논 항에서 하역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외항에 정박 중인 30여 척의 화물선들을 보는 순간, 군수품을 하역·수송하면 큰 사업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미국 국방성을 방문한 뒤 퀴논에 파병 중인 미군 담당자를 찾아간 정석은 끈질긴 설득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미군이 1주일에 한 척도 못 감당하는 물자 하역을 3일에 한 척씩 해내겠다”는 통큰 제안을 한다. “약속을 못 지키면 하루에 벌금 1만 달러를 내겠다”는 조건까지 달았다. 이렇게 해서 정석은 1966년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790만 달러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정석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했다. 총알과 포탄이 쏟아지는 퀴논항 하역장과 수송 도로에서도 그는 현장을 지켰다. 쏟아지는 포탄 때문에 운전을 주저하자 자신이 맨 앞 차량의 조수석에 앉아 현장을 이끌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퀴논항의 군수 물자 운송은 이후 한진의 큰 돈줄이 되었다. 한진이 66년 미군과 첫 계약을 하고 나서부터 71년까지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1억50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125~200달러 안팎으로 한진이 벌어들인 외화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정석은 당시를 회상하며 “금전적인 수입보다, 훈장보다 값진 소득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더라도 도전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고 말했다.(『사업은 예술이다』에서 인용)
정석의 두터운 신용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가 또 하나 있다. 73년 10월 발생한 중동전은 세계 항공업계를 일순간에 위기상황에 몰아넣었다. 당시 국제유가는 항공사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치솟았다. 당장 한 달 안에 대금을 결제하지 않으면 연료 공급이 중단될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73년에 새로 들여온 점보기를 담보로 내놓아야 할 만큼 상황은 다급했다. 당장 5000만 달러가 필요한 정석은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 은행에 도움을 요청하고, 업무상 인연을 맺었던 로제 총재에게 지불 보증을 부탁했다. 천하의 정석도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조중훈의 신용을 이미 알고 있던 로제 총재가 뜻밖에도 흔쾌히 승락했다. 한진이나 대한항공은 아무런 담보 가치가 없다고 봤지만 조중훈이라는 개인의 신용은 회사의 담보가치를 훨씬 뛰어넘는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조중훈 회장은 당시 간단한 신체검사 한 번으로 당시로서는 막대한 자금을 빌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정석의 이러한 신용제일주의가 낳은 열매는 보잉 747기 도입, 한·일, 한·불 민간외교 성사, 중동진출, 중국민 항기 송환문제 등 그룹 운영의 주요 고빗길마다 해결사 역할을 해주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간의 신뢰를 중시하고 신용을 그룹의 핵심적인 가치를 올리는데 헌신해온 정석 조중훈 회장의 경영 철학은 현재 한진그룹의 핵심 DNA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글로벌 물류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정석은 기회 있을 때마다 “기업은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기업이므로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기업의 책임으로 삼아야 하며, 한진그룹은 특정지역이나 특정인의 이익보다는 국민 모두의 편의를 위하여 봉사하는 공기업이라는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지금으로 말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다. 정석이 한진을 창업한 것도 기업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경영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익을 우선하는 정석의 정신은 국산 항공기 제작, 서울올림픽 유치작전, 그가 특히 진력을 기울였던 인하대학교 인수를 통한 인재양성, 한미병원(현인하병원) 인수 등 여러 부문에서 실제로 나타난다.
정석은 특히 초창기 경제발전 과정에서 항공사 경영을 통해 쌓은 광범위한 국제 인맥을 이용, 국익을 위해 민간외교관으로 활약하는 족적을 남겼다. 70년대 초에는 포항제철 건립을 위해 일본 정부와 차관 교섭을 벌이던 당시 일본 정·관계의 두터운 인맥을 활용해 민간차원의 지원활동을 펼쳐 포스코의 탄생에 큰 역할을 했다. 78년에는 포항종합제철 건설에 필요한 낮은 금리의 차관을 주선하고 오스트리아 제철설비기술 용역이 우리나라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공로로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일등금조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정석은 88올림픽 유치의 숨은 공로자이기도 했다. 정석은 1981년 88년 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는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 총회에 참석, 서울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는 프랑스 및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제 3세계 국가 IOC 위원들을 막후 설득하여 바덴바덴의 기적을 일군 산파 역할을 했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에서 참가하는 선수를 위해 특별 전용기까지 운항하겠다고 제안해 서울올림픽 지지를 이끌어낸 일화는 유명하다.
정석은 민간외교의 달인이었던듯 하다. 8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벨기에와의 공동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침으로써 벨기에 정부로부터 최고훈장인 레오폴드훈장을 수훈했다. 92년에는 몽골에 아무 조건 없이 B727 항공기를 제공, 유라시아 대륙 한가운데 고립돼있던 몽골에게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정석은 77년부터 20여 년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몽골 정부로부터 9개의 훈장을 받았다. 외교관이나 관료가 아닌 민간인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손길승 전 전경련 회장이 “정석 조중훈 회장은 세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이다. 프랑스와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조중훈 회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는 찬사가 과장이 아닌 셈이다.
기업가로서 모범을 보여준 정석 조중훈은 그러나 2002년 11월 17일 아쉽게도 타계하고 만다. 그는 생전에 모은 사재 가운데 1000억여원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희사했다. 그 중 500억원은 수송·물류 연구발전과 육영사업기금으로 학교법인 인하학원과 정석학원(현재 정석인하학원), 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현재 일우재단) 등 세 곳에 배분되었다. 이중 인하학원에 대한 기부금은 조중훈 회장이 생전에 강한 애착을 보인 최첨단 전자도서관인 인하대 정석학술정보관 건립기금으로 사용됐다. 정석 사후 한진그룹의 경영권은 장남인 조중훈 회장에게 이어졌다. 조양호 회장은 선대 회장의 수송보국 경영 철학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수송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뜻의 수송보국은 조양호 회장에 이르러 ‘수송을 통해 국가, 사회,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정신으로 그 의미가 확대됐다. 한진그룹은 지금도 수송보국의 창업정신에 입각해 ‘창의와 신념, 성의와 실천, 책임과 봉사’를 그룹 사훈으로 정하고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한진그룹은 현재 지주회사 한진칼을 비롯해 △항공 부문의 대한항공, 진에어, 한국공항 △해운부문의 한진해운 △육상운송의 ㈜한진 △관광·호텔·레저 부문의 한진관광, 정석기업, 칼호텔네트워크 △정보서비스 부문의 한진정보통신, 토파스여행정보 등 39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하늘길을 책임지는 대한항공은 그룹의 주력 계열사로 현재 여객기 129대, 화물기 28대 등 총 157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44개국 127개 도시를 취항하고 있는 글로벌 항공사로 발돋움 했다. 특히 대한항공은 초일류 항공사로 도약하기 위해 차세대 항공기 도입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하늘 위의 호텔’로 불리는 A380 10대 도입을 완료했고, 오는 2019년까지 항공기 운영대수를 180대 이상으로 확대하기로 하는 등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바닷길을 책임지는 한진해운은 컨테이너선, 벌크선 등 168척의 선박으로 전 세계 70여 개 정기 항로를 운영하여 연간 1억300톤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는 국내 최대 규모 해운 기업이자 세계적인 선사로 발전했다. 육로를 수송하는 ‘한진’은 그 자체로 우리나라 물류산업 성장의 역사다. 83년 국내최초로 정기 연안 해송사업을 개시해 수송모드를 다변화했으며, 92년에는 국내 최초로 택배시스템을 도입했다. 96년에는 세계 주요도시간 국제 특송 사업을 실시, 명실공한 종합물류기업으로 명성을 높였다. 한진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11개국 25개 도시에 물류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한진그룹을 이끌어가는 조양호 회장의 경영 철학은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는 ‘백년대계’ 경영으로 요약된다. 글로벌 경기 침체, 유가 급등 등 수송 기업으로서 시련의 시기 속에서도 더욱 탄탄하고 흔들림 없는 한진그룹으로 발전시키는 데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
조양호 회장은 세계 항공산업을 공황에 빠뜨린 2001년 9·11 테러 때 유나이티드항공, 아메리칸항공 등 미국 최대 항공사들이 파산 위기에 몰리고, 이로 인해 보잉, 에어버스 등 항공기 제작사들이 경영난에 봉착했을 때도 머지않아 늘어나게 될 항공 수요와 항공기 시장 판도를 예견했다. 조 회장의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세계 항공시장은 2006년부터 회복세로 반전되었고 항공사들은 앞다퉈 항공기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늦게 항공기를 주문한 항공사들은 실제 항공기 도입까지 수년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반면 대한항공은 당시 주문한 A380 항공기를 2011년 6월 동북아 최초 도입을 시작으로 총 10대를 도입해 미주, 유럽 등 장거리 노선에 띄우며 고객 서비스 경쟁력을 대폭 높이고 있다. 올해 6월 조양호 회장이 B737MAX-8 50대, A321NEO 50대(각각 확정구매 30대, 옵션구매 20대씩) 등 국내 항공사상 최대 규모인 100대 도입 계약을 체결한 것도 대한항공의 제2의 도약의 발판을 준비하는, 조양호 회장 특유의 ‘앞을 내다보는 경영’의 좋은 실례로 꼽힌다. 한진그룹은 내년에도 국내외 육해공 물류거점을 확대하는 등 수송물류 사업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넓혀갈 예정이다. 아울러 안정적인 재무구조 구축, 수익성 위주 사업 운영 등 안정적인 성장을 위한 기업 역량도 확보해 나갈 방침이다. 한진그룹은 미래를 담보할 우수인력을 유치하는 한편 지주사완성으로 기업지배구조를 더욱 투명화 시키는데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진그룹은 특히 2013년 8월 지주사인 ‘한진칼’을 설립, 지주사 체제로 전환한 이후 순환출자 해소, 손자회사의 계열회사 지분 처분 등 공정거래법상 요건을 충족해나가고 있다. 한진은 이와 같은 노력과 경영전략으로 글로벌 물류업계를 선도하는 종합물류 전문기업으로 지속적으로 도약한다는 비전을 전 임직원들이 공유하고 있다.
한진그룹이 지금까지 글로벌 물류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수송외길을 지켜온 창업주 조중훈 회장의 기업가정신이 창업 후 70년 동안 변함없이 그룹 경영이념으로 투영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중훈 창업주의 수송보국 경영 철학을 이어받은 한진그룹은 특히 사회공헌활동을 지속적으로 발굴·참여하는데 애써왔다. 세계 3대 박물관 한국어 서비스 후원과 같은 문화 후원 활동, 중국·몽골 사막화 지역 나무 심기 봉사활동과 같은 그린경영, 재해·재난지원 및 어려운 이웃을 돕는 나눔경영, 스포츠 후원활동 등 다방면에서 노력해왔다. 조양호 회장이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노력인 것은 물론이다.
- 포브스코리아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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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66) 한진그룹 회장은 지난 11월 2일 하얏트인천 웨스트타워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한진그룹 창립 70주년 기념식에서 “사업을 예술처럼 여기며 스스로 또 하나의 길이 되셨던 선대회장님의 그 길을 따라 한진그룹은 계속 전진하며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며 “보다 많은 가치를 창출하며 국가와 고객에게 헌신하는 한진그룹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한진그룹 임직원들은 창사 70돌과 선대 회장의 전기 발간을 계기로 창업정신과 수송보국의 경영철학을 되새기고 한진그룹의 미래 70년을 만들어가는데 전 임직원이 한데 뭉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화려한 퍼포먼스 없이 치른 그룹의 고희연이었지만 나름 실속 있는 기념행사였다는 후문이다.
또 하나의 경사는, 조양호 회장이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을 받은 것이다. 조 회장은 지난 11월 4일 그랜드하얏트서울 호텔에서 방한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 훈장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조양호 회장이 2000년부터 민간 차원의 대불 협력창구인 ‘한-불 최고경영자클럽’ 한국측 위원장을 맡아 한불간 경제교류에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2013년부터 ‘한-불 상호교류의 해’ 한국측 조직위원장을 맡아 양국간 경제·문화·예술 교류 활성화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발표했다.
조양호 회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받아
이쯤 되면 한진그룹의 창업자인 정석 조중훈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진다. 정석은 1920년 서울 서대문에서 조명희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남 진해의 해원양성소(지금의 해양대학교) 기관과를 우등생으로 졸업한 17세의 조중훈은 관부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에 있는 선박회사에 취직한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20세가 되던 해에 2등 기관사 자격증을 따 낸다. 정석은 일본 조선소에서 1급 기술자 대우를 받은 덕분에 중국의 톈진과 상하이, 홍콩, 마카오, 마닐라 등 동남아시아 일대를 두루 돌아보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 이 때의 경험은 그가 필생의 운송사업에 눈을 뜨게 한계기가 되었다.
1942년, 22세의 조중훈은 사업가의 꿈을 안고 일본에서 그동안 푼푼이 모아 저축한 돈으로 보링기계 한 대를 구입해 귀국한다. 정석은 큰 뜻을 품고 엔진 재생 전문 자동차 수리업체인 이연공업사를 차렸지만 첫 사업에서는 실패를 맛보고 만다. 이윽고 해방이 되자 25세의 청년 조중훈은 트럭 한 대를 구입해 ‘한진상사’ 라는 간판을 내건다. 1945년 11월 1일이었다. 인천시 해안동 2가 9번지가 바로 한진의 탯자리다. ‘한진’이란 ‘한민족의 전진’을 의미한다. 한국의 진보를 위하여 한진상사가 노력하겠다는 사업보국의 이념과 의지를 두 글자로 함축했다.
한진상사는 처음에 인천항의 화물선에서 내려지는 물자들을 소비자의 손에까지 운반하는 운송사업을 시작했다. 1947년에는 교통부로부터 경기도 일원에 대한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면허를 정식으로 받아 수송사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창업한 지 5년이 지나자 한진상사는 종업원 40여 명과 트럭 15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중견기업으로 도약하려는 고빗길에서 6·25동란으로 모두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석은 특유의 낙관성으로 폐허 속에도 다시 트럭 한 대로 운송사업을 재개한다. 그동안 굳건하게 다져놓은 신용이 있었기에 투자자들로부터 무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옛 단골들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그래서 휴전 2년 후인 1955년에는 한국전쟁 이전의 사세를 거의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국가기간산업 책임진 수송보국 기업
69년에는 대한항공공사(KAL)를 인수하게 된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수명이 다한 프로펠러 비행기 7대와 제트기 1대를 겨우 보유하고 있었다. 동남아 11개국 항공사 중 최하위 항공사였다. 하지만 정석은 박정희 대통령이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 아니냐.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전용기는 그만두고서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여행 한 번 해보는 게 내 소망이다”라는 간곡한 권유를 받아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정석은 당시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반대하는 회사 간부들에게 “돈을 벌자고 시작했다가 밑지는 사업도 있고, 밑지면서도 계속 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이다. 만인에게 유익한 사업이라면 만 가지 어려움과 싸워나가면서 키우고 발전시켜 나가는 게 기업의 진정한 보람 아니겠느냐!”며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임을 강조해 설득했다고 한다. 정석의 이러한 수송보국은 헛되지 않았다. 지금 대한항공은 항공화물수송 세계 3위, 항공여객수송 세계 12위의 거대 항공사가 됐다. 77년 5월 정석은 육해공 종합수송 그룹의 완성을 위해, 수산업에 치중하다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진해운을 해체하고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하게 된다.
이처럼 한진그룹이 설립하거나 인수한 회사들은 수송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이를 보조할 수 있는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지난 70년 동안 갖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수송외길만 걸어온 한진그룹은 대한항공, 한진해운, 한진을 주축으로 육해공을 아우르는 종합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정석은 평소 기업을 운영하면서 “사업은 예술이다. 기업은 인간이다. 기업은 사회적 책임주의의 공익정신이며, 사업보국주의를 공익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이는 정석의 특징적인 기업가정신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정석을 대표하는 경영이념이 된 ‘사업은 예술이다’라는 명제는 사업가도 예술가의 신념과 노력으로 모든 사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조중훈 회장의 기업 경영 철학이 표현되어 있는 말이다.
사업을 예술로 승화시킨 정석 조중훈
정석은 또 기업 경영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남을 모방하지 말고 자신의 혼을 담아야 한다. 그래야 창의력과 아이디어, 노력이 융합해 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생전에 조중훈 회장과 교분이 두터웠던 손길승 전 전경련 회장은 “조중훈은 성공한 사업가를 뛰어넘는다. 수송사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키우고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위대한 거장”이라고 칭송했다. 이런 평가를 보면 “사업은 예술이다”는 그의 신조가 단순히 예술적인 수사가 아니라 기업가인 그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석은 신용이 확실한 기업인이었다고 한다. 정석은 평소 “사업은 지고도 이기는 것이고,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다”라는 말을 즐겨했다. 한진이 주한미군 용역사업에 참여한 1956년 무렵 ‘지고도 이긴다’는 정석의 사업 신념이 빛을 발휘한 일화가 있다. 어느 트럭회사로부터 임차한 차량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파카 1300여 벌을 차떼기로 남대문 시장에 팔아 넘긴, 돌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조중훈 회장은 사태 해결을 위해 직원 한 명을 남대문 시장에 상주시키고는 도난 당한 물건이 시장에 유통되면 전부 사들이도록 했다. 정석의 문제 해결 능력과 신용을 지키려는 열의를 본 미군들은 그 후 한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이로써 조중훈 회장은 당장 3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큰 금전적 손해를 봤지만 미군으로부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용을 얻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을 독점, 계약고 290만 달러에 가용차량이 500대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석은 사업을 하면서 사람과 사람의 신뢰관계를 특히 중시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네트워크, 인맥관리의 달인이었다. 한번 거래를 맺은 고객과 신용을 유지했고, 인연을 맺은 미군들의 경조사에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이렇게 맺은 그의 인맥과 신용은 베트남 진출 추진 당시 미국 국방성에서도 정석 조중훈의 이름이 회자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 정석이 미군 용역 사업을 하면서 10년 동안 사귄 많은 수송계통의 장교들 이 나중에 베트남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미군의 주한근무는 1년 주기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산술적으로는 정석이 10년의 세월 동안 3천명에 가까운 미군장병들과 안면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들의 고된 해외생활에 정석이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고 철저하고 완벽한 인간관계와 인간적 유대를 쌓은 것이 무형의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베트남 퀴논항 미군물자 수송 승부수
미국 국방성을 방문한 뒤 퀴논에 파병 중인 미군 담당자를 찾아간 정석은 끈질긴 설득작업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미군이 1주일에 한 척도 못 감당하는 물자 하역을 3일에 한 척씩 해내겠다”는 통큰 제안을 한다. “약속을 못 지키면 하루에 벌금 1만 달러를 내겠다”는 조건까지 달았다. 이렇게 해서 정석은 1966년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790만 달러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정석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했다. 총알과 포탄이 쏟아지는 퀴논항 하역장과 수송 도로에서도 그는 현장을 지켰다. 쏟아지는 포탄 때문에 운전을 주저하자 자신이 맨 앞 차량의 조수석에 앉아 현장을 이끌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퀴논항의 군수 물자 운송은 이후 한진의 큰 돈줄이 되었다. 한진이 66년 미군과 첫 계약을 하고 나서부터 71년까지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1억50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125~200달러 안팎으로 한진이 벌어들인 외화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정석은 당시를 회상하며 “금전적인 수입보다, 훈장보다 값진 소득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더라도 도전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고 말했다.(『사업은 예술이다』에서 인용)
정석의 두터운 신용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가 또 하나 있다. 73년 10월 발생한 중동전은 세계 항공업계를 일순간에 위기상황에 몰아넣었다. 당시 국제유가는 항공사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치솟았다. 당장 한 달 안에 대금을 결제하지 않으면 연료 공급이 중단될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73년에 새로 들여온 점보기를 담보로 내놓아야 할 만큼 상황은 다급했다. 당장 5000만 달러가 필요한 정석은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 은행에 도움을 요청하고, 업무상 인연을 맺었던 로제 총재에게 지불 보증을 부탁했다. 천하의 정석도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조중훈의 신용을 이미 알고 있던 로제 총재가 뜻밖에도 흔쾌히 승락했다. 한진이나 대한항공은 아무런 담보 가치가 없다고 봤지만 조중훈이라는 개인의 신용은 회사의 담보가치를 훨씬 뛰어넘는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조중훈 회장은 당시 간단한 신체검사 한 번으로 당시로서는 막대한 자금을 빌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정석의 이러한 신용제일주의가 낳은 열매는 보잉 747기 도입, 한·일, 한·불 민간외교 성사, 중동진출, 중국민 항기 송환문제 등 그룹 운영의 주요 고빗길마다 해결사 역할을 해주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간의 신뢰를 중시하고 신용을 그룹의 핵심적인 가치를 올리는데 헌신해온 정석 조중훈 회장의 경영 철학은 현재 한진그룹의 핵심 DNA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글로벌 물류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국익 우선
정석은 특히 초창기 경제발전 과정에서 항공사 경영을 통해 쌓은 광범위한 국제 인맥을 이용, 국익을 위해 민간외교관으로 활약하는 족적을 남겼다. 70년대 초에는 포항제철 건립을 위해 일본 정부와 차관 교섭을 벌이던 당시 일본 정·관계의 두터운 인맥을 활용해 민간차원의 지원활동을 펼쳐 포스코의 탄생에 큰 역할을 했다. 78년에는 포항종합제철 건설에 필요한 낮은 금리의 차관을 주선하고 오스트리아 제철설비기술 용역이 우리나라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공로로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일등금조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정석은 88올림픽 유치의 숨은 공로자이기도 했다. 정석은 1981년 88년 올림픽 개최지가 결정되는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 총회에 참석, 서울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는 프랑스 및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제 3세계 국가 IOC 위원들을 막후 설득하여 바덴바덴의 기적을 일군 산파 역할을 했다. 특히 아프리카 대륙에서 참가하는 선수를 위해 특별 전용기까지 운항하겠다고 제안해 서울올림픽 지지를 이끌어낸 일화는 유명하다.
정석은 민간외교의 달인이었던듯 하다. 8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벨기에와의 공동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침으로써 벨기에 정부로부터 최고훈장인 레오폴드훈장을 수훈했다. 92년에는 몽골에 아무 조건 없이 B727 항공기를 제공, 유라시아 대륙 한가운데 고립돼있던 몽골에게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정석은 77년부터 20여 년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몽골 정부로부터 9개의 훈장을 받았다. 외교관이나 관료가 아닌 민간인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손길승 전 전경련 회장이 “정석 조중훈 회장은 세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이다. 프랑스와 중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조중훈 회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는 찬사가 과장이 아닌 셈이다.
기업가로서 모범을 보여준 정석 조중훈은 그러나 2002년 11월 17일 아쉽게도 타계하고 만다. 그는 생전에 모은 사재 가운데 1000억여원을 공익재단과 그룹 계열사에 희사했다. 그 중 500억원은 수송·물류 연구발전과 육영사업기금으로 학교법인 인하학원과 정석학원(현재 정석인하학원), 재단법인 21세기한국연구(현재 일우재단) 등 세 곳에 배분되었다. 이중 인하학원에 대한 기부금은 조중훈 회장이 생전에 강한 애착을 보인 최첨단 전자도서관인 인하대 정석학술정보관 건립기금으로 사용됐다.
조양호 회장 ‘백년대계’경영으로 성과
한진그룹은 현재 지주회사 한진칼을 비롯해 △항공 부문의 대한항공, 진에어, 한국공항 △해운부문의 한진해운 △육상운송의 ㈜한진 △관광·호텔·레저 부문의 한진관광, 정석기업, 칼호텔네트워크 △정보서비스 부문의 한진정보통신, 토파스여행정보 등 39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하늘길을 책임지는 대한항공은 그룹의 주력 계열사로 현재 여객기 129대, 화물기 28대 등 총 157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44개국 127개 도시를 취항하고 있는 글로벌 항공사로 발돋움 했다. 특히 대한항공은 초일류 항공사로 도약하기 위해 차세대 항공기 도입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하늘 위의 호텔’로 불리는 A380 10대 도입을 완료했고, 오는 2019년까지 항공기 운영대수를 180대 이상으로 확대하기로 하는 등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바닷길을 책임지는 한진해운은 컨테이너선, 벌크선 등 168척의 선박으로 전 세계 70여 개 정기 항로를 운영하여 연간 1억300톤 이상의 화물을 수송하는 국내 최대 규모 해운 기업이자 세계적인 선사로 발전했다. 육로를 수송하는 ‘한진’은 그 자체로 우리나라 물류산업 성장의 역사다. 83년 국내최초로 정기 연안 해송사업을 개시해 수송모드를 다변화했으며, 92년에는 국내 최초로 택배시스템을 도입했다. 96년에는 세계 주요도시간 국제 특송 사업을 실시, 명실공한 종합물류기업으로 명성을 높였다. 한진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 11개국 25개 도시에 물류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한진그룹을 이끌어가는 조양호 회장의 경영 철학은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는 ‘백년대계’ 경영으로 요약된다. 글로벌 경기 침체, 유가 급등 등 수송 기업으로서 시련의 시기 속에서도 더욱 탄탄하고 흔들림 없는 한진그룹으로 발전시키는 데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
조양호 회장은 세계 항공산업을 공황에 빠뜨린 2001년 9·11 테러 때 유나이티드항공, 아메리칸항공 등 미국 최대 항공사들이 파산 위기에 몰리고, 이로 인해 보잉, 에어버스 등 항공기 제작사들이 경영난에 봉착했을 때도 머지않아 늘어나게 될 항공 수요와 항공기 시장 판도를 예견했다. 조 회장의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세계 항공시장은 2006년부터 회복세로 반전되었고 항공사들은 앞다퉈 항공기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늦게 항공기를 주문한 항공사들은 실제 항공기 도입까지 수년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반면 대한항공은 당시 주문한 A380 항공기를 2011년 6월 동북아 최초 도입을 시작으로 총 10대를 도입해 미주, 유럽 등 장거리 노선에 띄우며 고객 서비스 경쟁력을 대폭 높이고 있다. 올해 6월 조양호 회장이 B737MAX-8 50대, A321NEO 50대(각각 확정구매 30대, 옵션구매 20대씩) 등 국내 항공사상 최대 규모인 100대 도입 계약을 체결한 것도 대한항공의 제2의 도약의 발판을 준비하는, 조양호 회장 특유의 ‘앞을 내다보는 경영’의 좋은 실례로 꼽힌다.
새로운 미래로 도약하는 종합물류그룹
한진그룹이 지금까지 글로벌 물류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수송외길을 지켜온 창업주 조중훈 회장의 기업가정신이 창업 후 70년 동안 변함없이 그룹 경영이념으로 투영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중훈 창업주의 수송보국 경영 철학을 이어받은 한진그룹은 특히 사회공헌활동을 지속적으로 발굴·참여하는데 애써왔다. 세계 3대 박물관 한국어 서비스 후원과 같은 문화 후원 활동, 중국·몽골 사막화 지역 나무 심기 봉사활동과 같은 그린경영, 재해·재난지원 및 어려운 이웃을 돕는 나눔경영, 스포츠 후원활동 등 다방면에서 노력해왔다. 조양호 회장이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 것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노력인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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