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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친구도 똑같은 환자

적도 친구도 똑같은 환자

이탈리아 NGO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운영하는 병원은 민간인과 정부군뿐만 아니라 탈레반도 치료… 지난해 사망자와 부상자 약 5만 명
이탈리아 간호사 키아라 로디는 NGO 이머전시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일한다.
최근 어느 날 오후 아프가니스탄 남부 헬만드 주의 주도 라슈카르가에 있는 외과병원은 평소답지 않게 조용했다. 이탈리아의 비정부기구(NGO) 이머전시가 전쟁 피해자를 위해 설립한 병원이다. 그곳의 의료진은 정신없이 바빴던 한 주를 보낸 뒤 46℃까지 치솟는 기온 속에서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젊은 외국인 간호사 3명(이탈리아 여성 키아라 로디와 파멜라 푸치오, 영국 여성 시어란 던리비)은 환자들의 상태를 확인한 뒤 진한 커피와 담배로 피곤한 몸을 달래며 서류 작업을 시작했다. 빨리 퇴근할 수 있겠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평온한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새 환자 4명이 응급실에 들이닥쳤다. 인근 마르자에서 부상한 아프간 군인들이었다. 그들이 탄 트럭이 지뢰를 만났다. 발목이 잘려 허벅지에 지혈대를 묶은 1명은 병원에 도착하기 직전 사망했다. 부상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1명은 쇼크 상태였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응급실 바닥에 웅크렸다. 나머지 2명은 팔과 다리에 파편이 박혀 있었다. 간호사들이 파편을 제거하고 상처를 소독하는 동안 그들은 똑바로 앉아 아무 말 없이 동료의 시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병원 보조원들이 사망한 병사 시신을 들것에서 들어 올려 반투명 플라스틱으로 감싼 뒤 피가 흥건한 매트리스를 남겨둔 채 안치실로 옮겼다. 이 병원의 공동 관리자인 마시모 말란드라(40대의 이탈리아인)는 응급실에 들러 상황을 점검한 뒤 자리를 뜨며 음울한 표정으로 나지막히 “빌어먹을 헬만드”라고 중얼거렸다.

이머전시는 1999년 이탈리아 외과전문의 지노 스트라다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 피해자를 위해 설립한 국제 NGO다(이탈리아에서 그는 격렬한 반전 주장으로 여론을 분열시킨 인물이었다). 이머전시 병원의 임무는 간단하다. 출신과 소속을 불문하고 모든 전쟁 피해자에게 무료로 최선의 의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헬만드 주는 아프가니스탄의 아편 거래 중심지로서 오랫동안 극심한 폭력에 시달렸다. 2001년 이래 이곳에서 다국적군 장병 약 1000명이 사망했다. 다국적군 대부분이 철수한 지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 이곳 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헬만드 주의 14개 지구 중 3개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탈레반이 완전히 장악했고 일부 지구에선 탈레반과 정부군 사이의 전투가 치열하다.

헬만드 주에서 발생하는 끊임없는 폭력의 참상은 다른 어떤 곳보다 주도 라슈카르가에 있는 이머전시의 외과병원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 병실에는 어린 여아 굴다나가 총상을 입은 작은 다리와 머리에 붕대를 감고 가만히 누워 있다. 임신 4개월째인 샤구다(30)는 불발된 박격포탄으로 팔에 큰 부상을 입고 수술한 뒤 회복 중이다. 급조폭발물이 터지면서 왼발을 잃은 경찰관 아리풀라는 응급실로 실려 오며 “내 다리!”를 계속 외쳤다. 그와 함께 온 동료들은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고 말했다.

내가 라슈카르가의 이머전시 외과병원을 찾아갔을 때 그곳엔 좌절감이 깊이 배어 있었다. 위중한 상태로 몇 주 전 들어온 10세 소년이 며칠 전 사망했다. 호주 시드니에서 오랫동안 일하다가 헬만드 주에 최근 도착한 영국인 간호사 던리비는 “죽은 아이를 본 건 지난 주가 처음이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벌써 몇 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망했거나 부상한 민간인과 정부군, 탈레반은 모두 합해 약 5만 명으로 추산된다. 충격적인 통계지만 이머전시의 아프가니스탄 프로그램 조정관 루카 라다엘리는 “그 통계 수치조차 심하게 과소평가됐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올해는 상황이 더 심각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라슈카르가의 이머전시 외과병원은 병상을 90개에서 103개로 늘리는 중이다.믿을 만한 공공 의료시설이 없는 라슈카르가 같은 곳에선 이머전시가 선택 가능한 소수의 병원 중 하나다. 개발원 조금 1000억 달러 이상이 투입됐지만 아프가니스탄의 공중보건 시스템은 너무도 끔찍한 상황이다. 이머전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무료 병원 3곳과 응급처치소·진료소 46곳을 운영하며 기부금과 보조금으로 연간 1000만 달러를 들여 병원 직원 1500명 이상을 고용한다. 헬만드 주에서만 연간 약 200만 달러를 지출한다. 아프가니스탄에 배치된 미군 병사 1명 당 1년 동안 드는 비용과 거의 맞먹는다.

라슈카르가의 이머전시 병원에서 아프간 소년이 부상한 다리를 치료 받는다.
최근 예멘과 시리아 등 전쟁 지역에서 의료시설에 대한 공격이 잇따랐지만 이머전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을 중지할 생각이 없다. 지난해 10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북부 쿤두즈 소재 ‘국경 없는 의사회’ 병원을 공습해 의료진과 어린이를 포함해 42명이 사망했다. 미국이 사과했지만 최근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탐사 보도에 따르면 아프간 정부군이 그 병원을 탈레반 은신처라고 믿고 미군의 공습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2월엔 아프가니스탄 중부 와르다크 주에서 NGO 스웨덴-아프간 위원회가 운영하는 병원을 아프간 정부군 특공대가 공격해 최소 3명이 숨졌다.

라슈카르가의 이머전시 외과병원 직원들은 쿤두즈의 ‘국경 없는 의사회’ 병원이 공습을 당했지만 자신들은 두렵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머전시 본부는 병원에 강철 보강 벙커를 짓는다고 밝혔다. 지난 5월 말 미국이 공습하는 동안 헬만드 주의회는 라슈카르가마저 탈레반 수중에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머전시의 간부들은 대피할 계획은 아직 없으며 중립적인 NGO로서 앞으로도 출신과 성분을 따지지 않고 모든 전쟁 피해자에게 의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런 입장을 외부자들에게 자주 설명해야 한다. 라다엘리 조정관은 “많은 사람이 왜 탈레반을 치료해주는지 묻는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에선 내가 범죄자와 마피아, 마약중독자와 마약상을 치료해줬지만 아무도 왜 그들을 치료해주느냐고 묻지 않았다. 내 일은 누구든 따지지 않고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다.”

2013년 자살폭탄테러를 시도했다가 폭탄 조끼가 완전히 터지지 않아 실패한 탈레반 대원이 이머전시의 병원으로 실려왔다. 그가 표적으로 삼은 곳에 가족이 사는 아프간 의사와 간호사들은 격노했지만 그를 거부하지 않고 치료했다. 이머전시의 외과의사 샤왈리 알리자이는 “그게 의사로서 나의 역할이자 임무”라고 말했다.

이머전시 외과병원에서 보는 끔찍한 장면들은 라슈카르가의 일부일 뿐 평화로운 모습도 많다. 원래 이곳은 목가적이다. 넓은 헬만드 강이 이 작은 도시 가운데로 유유히 흐른다. 늦은 오후의 열기 속에서 초록색과 라일락 꽃무늬의 부르카 차림을 한 여성들은 인근 노천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어린 아이들은 오렌지 색 셔츠(무릎 아래까지 떨어지는 느슨한 상의로 ‘샬와르 카미즈’로 불린다)를 벗어 던지고 강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즐긴다.

외과병원이 강에서 약 1.5㎞ 밖에 안 떨어져 있지만 라슈카르가의 그런 목가적인 모습을 본 외국인 직원은 단 1명뿐이다. 그들은 엄격한 보안 규정에 따라 병원과 공동 숙소만 오가면서 지낸다. 몇 년 전 판즈시르에 있던 헬만드 주의 의료 조정관 베스나 네스토보리치는 지방 진료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도 드문 기회라 아직도 자랑하느라 바쁘다.라슈카르가 외과병원의 외국인 의료진 8명은 희고 붉게 칠한 사륜구동 차량 2대에 나눠타고 출퇴근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선 범죄자들이 외국인을 자주 납치한다. 서방 NGO는 테러리스트의 표적이다. 외국인은 현지인의 호기심을 자아내며 종종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 그러나 라슈카르가 주민은 이머전시의 차는 적대시하지 않는다.

아침 회진에서 X선 필름을 살펴보는 아프간 의사.
그렇다고 이머전시가 늘 환영 받았던 건 아니다. 2010년 이탈리아 직원 3명과 아프간 직원 6명이 아프간 당국에 체포됐다. 당시 헬만드 주지사가 병원에 자살폭탄 조끼와 무기가 숨겨져 있다며 그들이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한 것이다. 그는 또 이머전시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데도 부상한 아프간 군인들의 팔다리를 절단한다며 탈레반을 돕는다고 주장했다.

이머전시를 설립한 스트라다는 당시 아프간 당국이 헬만드 주에서 이머전시를 쫓아내려고 병원 직원들을 체포했다고 비난했다. 지금 이머전시는 그 사건을 언급하기 꺼린다. 라다엘리 조정관은 “누군가 우리가 헬만드 주에 있는 걸 원치 않았다”고 돌려 말했다. “아무튼 우리의 결백이 밝혀졌다는 게 요점이다. 지금 우리는 아프간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라슈카르가의 이머전시 외과병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선 보기 드문 최신 설비와 해바라기 꽃 가득한 마당, 일부 아프간 직원의 이탈리아어 억양 섞인 영어에 놀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외국인 직원들의 열정과 헌신에 감명 받았다. 그들은 헌신적인 아프간 동료들을 도와주고 이끌었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출신인 레오나르도 라디치는 이머전시 병원의 보급품 책임자다. 외국인 직원이 항상 휴대하는 무전기를 그도 허리에 차고 다녔다. 무전기에선 새 환자의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밤중에도 가끔씩 무전기가 그들을 깨운다.

최근 라디치는 말라리아에 걸려 하루를 결근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해 무전기를 통해 환자 13명이 병원에 도착했다는 알림을 듣고는 그냥 누워 있을 수 없어서 아픈 몸을 끌고 병원에 갔다.

외국인 직원 대다수는 서방의 병원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을 찾고 싶다는 생각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왔다고 말했다. 그들은 리비아·쿠르디스탄·소말리아 같은 곳에서도 이머전시를 위해 일한 경험이 있다. 아일랜드 출신의 마취전문의 조셉 러믈리 박사는 미국 뉴욕의 한 병원에서 10년 이상 일하던 어느 날 갑자기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앞으로 20년을 더 여기서 이렇게 일하고 싶은가?”

그들은 인생의 목적을 찾으려고 아프가니스탄에 왔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낭만적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라다엘리 조정관은 “사람들이 TV나 영화, 비디오게임에 익숙해져 전쟁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전쟁 영화에서 총에 맞는 사람은 영웅처럼 단 한 방으로 깨끗하게 숨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머리를 연보라색으로 물들이고 문신과 혀 피어싱을 한 이탈리아인 간호사 키아라 로디도 그 말에 동의했다. “이건 너무도 어리석은 전쟁이다. 아프간인은 갈등을 해결하려면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며 자란다. 내가 여기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 대니얼 모일런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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