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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9) 하워드 휴즈

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9) 하워드 휴즈

하워드 휴즈(1905~1976)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과 새로운 사업에 대한 과감한 도전과 열정을 보여주며 온몸을 던진 경영인이었다. 오늘날 기업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하워드 휴즈의 삶은 아버지와 삼촌의 경험과 재능을 반반씩 물려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영화와 공학이 그것이다.
하워드 휴즈는 괴짜 부자다. 일생에 걸쳐 줄기차게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모험적인 기업인이다. 그의 삶을 다룬 <에비에이터> 란 영화가 2004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 연출,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영화로 나오긴 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는 여전히 생소한 인물이다. 휴즈는 영화와 항공이라는 상반된 분야에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전후 미국이 전 세계를 주름잡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기술산업에 도전해 스스로 새 역사를 썼다. 뜨거운 열정과 과감한 도전은 기본이다. 인습을 거부하고 새로운 사업에 도전했다. 삶 자체가 모험이었다. 새롭고 자유로운 발상을 집념어린 노력으로 현실로 이룬 인물이다. 평생 편안히 살 수 있는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이를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산업에 투자했다. 이를 통해 재산을 불렸을 뿐 아니라 인류의 삶을 바꿔나갔다.

휴즈는 평생 모험적인 투자를 그치지 않은 ‘애니멀 스피리트’의 기업인이었다. 영화산업과 항공산업은 물론 방위산업, 전자산업, 매스컴, 제조업 등 광범위한 사업에 투자하고 사업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부동산, 석유 탐사, 유전 운영, 광산업, 컨설팅, 엔터테인먼트 사업 등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에 과감하게 진출했다. 대부분 성공을 거둬 생전에 전세계에서 가장 재정적으로 성공한 기업인으로 평가받았다. 휴즈는 세상을 떠날 때 15억 달러의 재산을 남겼다. 당시 미국 GNP의 1190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다. 현재 가치로 62억5000만 달러에 해당한다.
 ‘고위험-고수익’ 개척산업에 도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에비에이터>.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가 주인공 하워즈 휴즈를 연기했다. / 중앙포토·채인택
휴즈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1920년대 후반부 거액의 제작비를 쏟아부어 관객들에게 새롭고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대형 영화 제작을 선도했다. 거액의 제작비를 바탕으로 다양한 상상을 영상으로 담는 데 성공한 신개념 고예산영화는 관객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휴즈의 영화는 연속 흥행몰이를 했으며 영상 문화의 수준을 높였다.

영화인으로 성공한 휴즈는 동시에 항공이라는 신산업에 뛰어들었다. 영화 자체도 모험산업이지만 새롭게 진입한 항공산업이야말로 ‘고위험-고수익’의 개척 산업이었다. 그는 과감한 도전으로 이 세계에서 위험을 회피하고 고수익을 얻는 데 성공했다. 1932년 휴즈 항공사를 설립한 그는 수많은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를 일사불란하게 지휘해 새로운 항공산업의 장을 열었다. 1930년대 말 엄청난 투자로 항공기 최고 속도의 기록을 여러 차례 갈아치우면서 고속 항공기의 시대를 열었다. 트랜스월드항공을 구입해서 확대하는 한편 에어웨스트항공사를 사들여 이름을 휴즈에어웨스트로 바꿨다. 휴즈는 자신이 직접 항공기를 조종하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고 후유증으로 만년에 기행과 불안증, 통증의 삶을 살았다. 그의 말년은 은둔과 기행으로 가득찼지만 기부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를 세우고 재산을 기부해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휴즈는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과 새로운 사업에 대한 과감한 도전과 열정을 보여주며 온몸을 던진 경영인이었다. 오늘날 기업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휴즈의 삶을 하나하나 파보자. 그는 1905년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워드 휴즈 시니어는 발명가였으며 삼촌 루퍼트 휴즈는 유명한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이었다. 휴즈의 아버지는 회전방식으로 바위를 뚫는 굴착기인 ‘샤프 휴즈’를 발명했다. 당시 석유 개발붐이 일던 텍사스에서 휴즈 공구사를 세운 그는 이 혁신적인 석유 시추용 드릴을 판매하는 대신 리스해서 이익을 극대화했다. 이어 뛰어난 사업 수단으로 전 세계 시장을 개척해 엄청난 수익을 얻었다. 창조적인 공학적 능력과 경영 아이디어를 동시에 갖춘 사업가였다. 휴즈의 삶은 아버지와 삼촌의 경험과 재능을 반반씩 물려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영화와 공학이 그것이다.

휴즈는 어린 시절부터 과학과 기술에 흥미와 열정을 보였다. 11살 때인 1916년 텍사스주 휴스턴의 첫 아마추어 무선통신사가 됐다. 1925년 국제아마추어무선연합(IARU)이 결성되기도 전에 활동했다. 12살 때는 아버지가 발명한 증기 엔진의 부품을 활용해 당시 ‘모터 달린 자전거’로 불렸던 모터사이클을 만들어서 타고 다녔다. 휴스턴 최초로 이를 몰고 다닌 사람으로 지역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14살 때 첫 비행 교습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캘텍)에서 수학과 항공공학 코스를 청강했다. 금수저 출신의 영재였지만 그는 그 재능을 안락한 삶이 아닌 모험적인 신사업 개발에 사용했다.

휴즈는 10대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1922년 어머니 엘린이 자궁외 임신으로 숨진 데 이어 아버지인 하워드 휴즈 시니어도 1924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부모의 사망으로 휴즈 공구사를 비롯한 재산을 물려받은 그는 19세 생일 이후 법적으로 재산 전체를 관리할 수 있게 됐다. 부모의 갑박스러운 사망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 19세 때인 1925년 자신의 재산으로 의학연구소를 세우겠다는 내용의 서류를 작성하고 서명했다.

휴즈는 어린 시절 실력과 열정을 동시에 인정받은 골프 유망주였다. 20대에 핸디4를 기록할 정도였다. 최상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과 수시로 라운딩을 즐겼으나 공식 시합에는 나가지 않아 프로선수가 되지는 않았다. 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서서히 식으면서 그는 다른 몰두할 일을 찾아나섰다.

휴즈는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라이스 대학을 다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학업을 중단했다. 연인이던 엘라 라이스와 결혼한 뒤 텍사스주를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영화 제작자의 경력을 시작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한 그는 정열적으로 영화사를 새롭게 썼다. 1927년 <모두가 연기하고 있어요> 로 시작한 영화제작은 흥행에서 연속 성공을 거뒀다. 이듬해 제작한 <아라비아의 기사들> 은 흥행에서 짭잘한 수입을 거뒀을 뿐 아니라 아카데미 코미디 부문 첫 감독상까지 거머쥐었다. 1928년 제작한 <라켓> 과 1931년 작품인 <프론트 페이지> 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과 거둔 영화인
[지옥의 천사들] 영화의 한 장면. 하늘에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직접 촬용해 영화관에서 보여주자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휴즈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현란한 볼거리를 마련함으로써 관객을 끄는 ‘대형 영화’가 그것이다. ‘소액 투자, 안정 제작, 소규모 이익’ 구조의 당시 할리우드 영화계를 ‘고투자 고위험 고수익’ 구조로 이끌었다. 오늘날 블록버스터로 불리는 거대 예산 영화의 원조 격이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항공과 영화를 결합한 작품으로 미국 영화상 사실상 최초의 거대 예산 영화를 제작했다. 항공전을 소재로 한 영화 <지옥의 천사들> (1930)이 그것이다. 비행기를 타본 사람도 많지 않은 시대에 하늘에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직접 촬용해 영화관에서 보여줬으니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380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자해 800만 달러를 벌어 들였다. 할리우드의 이전 흥행기록을 모두 바꿔버린 대흥행작이 됐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어 아카데미상 촬영상 후보에도 올랐다. 휴즈는 이 작품에 몰두해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까지 맡았다. 영화와 항공이라는 휴즈의 두 가지 열정을 모두 구비한 작품이었다. 이를 위해 휴즈는 전쟁터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프로펠러 전투기를 87대나 구입했다. 이를 조종할 최고의 비행사들도 고용했다. 조종사 면허를 보유한 휴즈 자신도 스스로 비행기를 몰고 스턴트 연기에 나섰는데 사고로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주목할 점은 이 영화가 영화 역사에서 무성영화와 발성영화(토키영화)의 전환기에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애초에 무성영화로 촬영됐다. 하지만 새로 등장한 발성영화의 기술에 끌린 휴즈는 흥행면에서도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해 무성영화로 촬영한 분량을 전량 폐기하고 유성영화로 새롭게 촬영했다. 제작비가 천문학적으로 올라간 이유 중 하나다. 휴즈가 보여준 불가능에 대한 도전정신이 아로새겨진 작품이다. ‘영화계의 도깨비’라는 별명은 이 작품을 계기로 얻어졌다.

휴즈의 도전 정신을 보여준 또 다른 사건이 검열과의 싸움이었다. 미국에서는 ‘헤이스 규칙(Hays Code)’으로 불리는 영화 검열 제도가 1934년부터 1968년까지 시행됐다. 미국의 상업영화에서 도덕적으로 수용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규정했다. 이 규칙에 따르면 영화에는 폭력적인 장면이나 성적 묘사는 물론 ‘하느님’, ‘예수님’이란 말의 앞뒤에 욕설이 나와서도 안 된다. 심지어 목사를 조롱하는 장면도 불가능했다. 서로 다른 인종간의 남녀관계나 목사에 대한 조롱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규제가 심했다. 노출 장면은 당연히 배격됐다. 당시 인기를 끌던 누아르 영화가 주로 타격을 입었다. 휴즈는 이에 과감하게 맞섰다.

휴즈는 1932년 영화역사에서도 유명한 <스카페이스> 를 제작했다. 조직폭력배의 어두운 삶과 근친상간 등 파격적인 내용이 포함된 작품이다. 1983년 브라이언 팔마 감독이 알 파치노, 미셸 파이퍼 등을 기용해 리메이크한 걸작이다. 이 <스카페이스> 와 1943년 제작한 <무법자> 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생한 폭력 장면과 과감한 노출 의상으로 검열에 걸려 개봉이 지연됐다. 휴즈는 검열에 타협해 영화에서 문제 장면을 삭제하는 대신 버텼다. 이처럼 검열에 개의치 않는 휴즈의 과감한 영상 도전은 이후 영화산업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휴즈는 1954년에는 메이저 스튜디오를 처음으로 단독 소유한 영화인이 됐다. 하지만 이듬해 자신이 소유한 RKO 영화의 TV 방영권을 제너럴 타이어사에 넘기고 영화산업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1957년에는 영화에서 완전히 손을 털고 나갔다. 매카시즘 등 복잡한 정치상황이 작용한 결과다. 영화산업에 발을 담근 뒤로 진 할로우, 캐서린 헵번, 에바 가드너 등 할리우드를 주름잡은 여배우들을 줄줄이 발굴했다. 대부분 그의 연인으로 있다가 떠났다.
 고속 항공기 시대를 여는 초석이 되다
불시착한 H1 실버불렛과 하워드 휴즈. 그는 이후 끊임없이 도전해 고속 비행이 가능한 H-1레이서를 개발, 1935년 9월 자신이 직접 항공기를 몰고 시속 563km의 당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 중앙포토·채인택
휴즈는 공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항공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업도 함께 벌였다. 물려받은 휴즈 공구사에서 항공사업부를 설치해 자신이 비행할 고속 항공기를 개발했다. 인재 욕심이 많았던 그는 우수한 엔지니어를 영입해 최고 속도로 비행하는 항공기 개발에 몰두했다. 그 결과 고속 비행이 가능한 H-1레이서를 개발, 1935년 9월 자신이 직접 이 항공기를 몰고 시속 563km의 당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이어 이 비행기를 몰고 북미대륙 횡단에 성공했다. 1938년 7월에는 자신이 세운 휴즈항공사에서 록히드 L-14 수퍼 엘렉트라를 개조해 91시간 만에 세계 일주 비행에 성공했다. 이는 비행 역사에 기록되는 과감한 도전이자 기록이었다. 그의 집념은 고속 항공기 시대를 여는 초석이 됐다.

기술력을 인정받은 휴즈 항공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 당국으로부터 고고도 고속정찰기 XF-11의 개발과 100대 주문을 받았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제기 2대의 제작에 그쳤다. 전쟁이 끝난 뒤 휴즈 항공사는 고정익보다 회전익 항공기, 즉 헬기 개발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성공을 거뒀다. 가장 안정적인 헬기라는 휴즈500을 개발하고 공격용 헬기, 공대공 미사일 등 다양한 무기체계를 개발해 미군에 납품했다. 강력한 기술력이 바탕이 됐다. 휴즈 항공사는 나중에 맥도넬 더글러스로 넘어갔으며 휴즈500은 MD-500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기술 중심으로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던 휴즈 항공사는 라이벌인 시코르스키 항공사와 함께 헬기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모험을 마다 않는 과감한 기업가 정신과 함께 휴즈가 남긴 최고의 유산이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HHMI)다. 하워드 휴즈의 기부를 통해 설립된 비영리 의학연구소다. 1953년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 설립됐으나 현재는 메릴랜드주 체비체이스에 있다. ‘생명 그 자체의 기원’을 포함한 기초의학 연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휴즈는 일생에 걸쳐 과학과 기술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물론 10대 청소년기에 2년 간격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경험 때문에 의학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이미 만 19세에 작성한 유언장에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 일부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의학연구소를 반드시 설립하라고 써뒀을 정도로 의학연구소 설립과 운영에 열정을 보였다.

휴즈는 자신이 설립했던 휴즈 항공사 주식을 전량 기부해 연구소의 운영을 지원했다. 하워드 휴즈 의학연구소는 연구소는 현재 자산이 182억 달러로 세계 2위 규모의 생의학 연구소로 자리 잡고 있다. 과학자의 연구를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지원 원칙은 과학발전의 자율성을 높여 과학자의 ‘애니멀 스피리트’를 자극하는 요소로 평가된다. 모험가 휴즈가 세운 연구소다운 운영 원칙이다. 기부를 빌미로 간섭하려는 일부 부자들에게 무언의 교훈을 준다.

채인택 -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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