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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한국경제 | 국가 R&D 정책 혁신하자] 국가 R&D, 관치에서 민간 주도로 바꿔야

[리셋, 한국경제 | 국가 R&D 정책 혁신하자] 국가 R&D, 관치에서 민간 주도로 바꿔야

상품화 무관한 페이퍼 연구 비일비재... R&D 선정부터 상용화까지 기업이 이끌게 해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2013년 11월 스마트폰으로 자동차를 주차하고, 주차된 자동차를 사용자가 내렸던 위치까지 호출할 수 있는 ‘무인 발레 주차’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 기술은 2010년 당시 지식경제부가 산업원천기술개발사업의 목적으로 제시한 164개국 연구개발(R&D) 과제 중 하나였다. 4년간 총 64억원의 국가 예산이 투입됐다.

하지만 이 기술은 개발 성공 뒤 3년이 넘은 최근까지 ETRI 연구실 캐비닛에서 잠을 자고 있다. 성우모바일을 비롯한 5개 중소기업에서 ETRI 기술을 전수해 LG전자와 함께 모듈 양산을 하려 했으나 LG전자의 담당 임원이 바뀌면서 중단됐다. 그사이 무인 발레 주차 기술이 필요한 현대자동차는 2010년부터 자체적으로 자사 양산 차량에 단계적으로 도입했으며 최근 ETRI 수준의 무인 발레 주차 기술 수준에 도달했다. ETRI 사업화본부장을 지낸 현창희 연구위원은 “연구 기획 단계부터 기술이 필요한 기업의 참여가 있었다면 혈세 수십억원이 들어간 국책 연구과제가 헛일이 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ETRI의 무인 발레 주차는 연간 19조원이 넘는 세금을 쏟아붓고도 제대로 된 성장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가 R&D의 대표 사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한국의 국가 R&D 투자는 세계 1위 수준이다. 하지만 투자에 대한 성과는 기대치를 한참 못 미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의 이런 모습을 ‘코리아 R&D 패러독스’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현상이 최근 들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한국의 과학기술 수용성(새 기술을 흡수해 활용하는 능력) 평가지수는 2012년 세계 180개국 중 18위였으나 지난해에는 28위로 10계단이나 내려앉았다. 기업혁신 지수 역시 2012년 14위에서 지난해 20위로 떨어졌다. 게다가 국가 R&D 과제는 2011년 4만1600건에서 2015년 5만4400건으로 해가 갈수록 잘게 쪼개지고 있다. R&D에 선택과 집중이 이뤄지지 않고 ‘나눠 먹기’ 식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얘기다. 가짓수가 늘어나다 보니 관리·감독할 눈도 덩달아 많아지고 있다. 한국연구재단과 같은 연구 관리를 위한 전담기관 수는 2009년 10개에서 지난해 22개로 배 이상 늘어났고, 같은 기간 예산도 1조1900억원에서 2조400억원으로 71.4%나 불어났다.
 국가 R&D 과제 갈수록 나눠 먹기식 변질
원인이 뭘까. 전문가들은 국가 R&D의 큰 문제점으로 ‘관치(官治)’를 꼽는다. ‘ETRI의 무인 발레 주차’처럼 응용개발 기술에 대한 국가 R&D 과제 기획·선정에 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 배제돼 있다는 점이다. 국가 R&D는 관(官)이 주도해 큰 그림을 그리고 나면 산하에 있는 연구 관리 전담기관이 교수와 연구원 등을 불러 모아 세부 과제를 정하고 여기에 출연 연구소와 대학·기업 등이 응모해 과제를 따내는 방식이다.

지난해 8월 정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 주재로 제2차 과학기술전략회의를 열고 인공지능(AI) 육성 방안 등 대한민국 미래를 책임질 9대 국가 전략 프로젝트를 선정했다. 출연연의 한 관계자는 “9대 국가 전략 프로젝트는 단 2개월 동안 산하기관들을 쪼아 급조해 만든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며 “기업의 의견도 전문가의 식견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중앙일보·JTBC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 리셋 코리아 4차 산업혁명분과 위원들은 한 나라의 신성장엔진을 발굴하기 위한 국가 R&D가 이 같은 비효율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한국은 거세게 밀려오는 4차 산업혁명의 파고를 넘어설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김태유(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분과장은 “정부가 어젠다를 선정한 뒤 연구 아이템을 공모하는 방식이 여전하다”며 “국가 연구개발 기획과 과제 선정에 기초·원천 연구는 제쳐 놓더라도 응용개발 기술 연구개발만이라도 기술이 필요한 기업이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영주 한국화학연구원 본부장은 “정부의 연구개발 평가 관행이 양적·단기 성과 위주이기 때문에 연구 성과의 상용화보다는 연구 과제 수주와 논문·특허에만 몰두하는 구조가 돼 버렸다”며 “정부의 예산 지원도 기술 개발이 상용화로 이어질 수 있는 단계까지 지속돼야 한다”고 했다. 이경상 대한상의 경제조사본부장은 “연구개발 지원에 대기업을 배제한다든지 실업이 우려되는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이 빠지는 등 정무적 요인이 끼어드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다 보니 나눠 먹기식의 형식적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환진 과학기술연합 대학원대학교(UST) 교수는 “정부가 앞에서 이끌려 하지 말고 뒤에서 밀어주면서 민간이 주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독일 인더스트리 4.0이 주는 교훈 - 기업·연구소가 주도, 정부는 예산 지원만
2000년대 들어 미국 중심의 첨단 정보기술(IT) 기업들이 글로벌 생태계를 주도하면서 전통 제조업 중심이던 독일은 국가 경쟁력과 혁신 역량의 위기에 대한 대책이 절실했다. 세계 주요국이 벤치마킹 모델로 삼는 인더스트리 4.0은 그 고민의 결과였다.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 위원들은 인더스트리 4.0 전략의 내용보다 전략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10년 독일 정부가 주관해 만든 ‘10대 전진 프로젝트’ 중 하나인 인더스트리 4.0은 독일 제조업과 연구계의 합작품이다. 예산은 독일 연방교육연구부(BMBF)에서 댔지만 자동차 부품기업 보쉬와 과학공학한림원에서 총괄 작업을 하고, 지멘스·BMW·도이체텔레콤 등 대기업들과 연구기관들이 참여했다.

독일은 연구소가 수행하는 개별 국가 R&D 프로젝트에도 기업의 참여가 활발하다. R&D 과제 기획에서 기업의 연구인력을 형식적으로 참여하게 하고는 이를 산·학·연 공동연구라고 표현하는 한국 국가 R&D와는 대조적이다.

국가 R&D 과제를 선정하고 예산을 나누는 방식도 차이가 크다. 독일은 인더스트리 4.0과 같은 국가 R&D의 큰 전략을 짜고 나면, 막스플랑크 같은 연구소에 큰 덩어리의 예산을 던져준다. 개별 과제를 정하고 예산을 배분하는 것은 연구소의 몫이다. 반면 한국은 정부가 한국연구재단·산업기술평가관리원과 같은 부처 산하 연구관리 전담 기관을 통해 6만 개에 가까운 개별 과제를 정하고 출연연·대학 등이 과제에 응모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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