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시대와 닫힌 광장]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SNS 시대와 닫힌 광장]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채널로 세상 이해... 투명한 공론장 재건하는 지혜 모아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열린 광장인가? 언뜻 그렇게 보이지만, 실상은 상식과 멀어져 간다. 미디어의 다변화와 디지털 기기의 맞춤 기술은 사람들을 메아리방(Echo chamber)으로 가두고 있다. 이 방에는 가짜뉴스가 넘쳐나고, 사람들은 내가 보는 뉴스·정보와 다른 이가 보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다. 그럴수록 인터넷·모바일 가진 수평적 소통의 힘, 집단지성의 능력은 약화된다. 이번 19대 대선에서도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열린 광장을 재건할 방법은 없을까.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개표 결과가 공개되던 그 밤, 사람들의 눈과 귀가 모두 방송사의 TV화면 앞에 몰려 있었다. 이 시각에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앞서가며 당선이 점점 확정되어가는 그때, 인터넷포털 다음 뉴스의 최다 조회 수 기사 제목은 ‘박근혜 당선 확실 … 사상 첫 여성 대통령 탄생 앞둬’였다. 저녁 7시 21분 44초에 올라온 기사였다. 이 기사에는 그 시각 8189건의 댓글이 붙어 있었다. 댓글 중에서도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댓글은 ‘난 정말 이해가 안 된다’였다. 7209개의 공감을 받았다. 인터넷의 여론은 누가 보아도 문재인 후보의 승리였는데, TV에서 발표되는 대통령 당선자는 박근혜 후보였던 것이다.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의 충격과 상실감은 컸다. 거리에서, 가정에서 지지자별로 희비가 엇갈리는데 비해 인터넷 공간에서는 절망감만 감도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2017년 5월 9일.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개표 결과가 공개되자 새누리당 조원진 후보를 지지했던 친박단체 국민저항본부 다음 카페에는 ‘이해가 안되네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새누리당 진성 당원만 20만 명, 박사모 20만 명. 새누리당 회비 낸 사람들 숫자만 해도 얼마인데 이거 말도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자다 깨서 ‘고작 이 정도 표 얻는 데 보태라고 나하고 아들을 들볶았느냐’며 남편과 싸우고 있다는 글도 있었다(조원진 후보는 4만2949표를 얻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이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전체의 선택은 왜 달랐을까. 왜 우리는 우리 전체의 생각을 알 수 없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뉴미디어가 등장했던 과거를 회상해볼 필요가 있다.
라디오의 시대: 1938년 미국. 어느 날 라디오에서 외계인의 침공을 알리는 긴박한 속보가 발표됐다. 놀란 시민 수백 명이 길거리로 뛰쳐나왔고 짐을 싸서 피난길에 나섰다. 교회에 모여 지구의 종말을 슬퍼하며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심지어 극약을 준비해 ‘세상 다 끝났다’고 자살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경찰서와 방송국에 전화 문의가 쇄도했다. 라디오 드라마 ‘우주전쟁’ 때문에 생긴 소동이었다. 드라마의 첫 형식을 긴급 뉴스처럼 만들어서 오해는 더 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영화 같은 외계인 침공을 그렇게 쉽게 믿을 리가’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이 사건은 너무나 엄청나서 뉴욕타임스가 ‘라디오 시청자들이 전쟁 드라마를 진짜로 오해해 패닉에 빠졌다’고 헤드라인 제목을 뽑았던 사건이다. 당시 방송 내용도 그대로 남아 유튜브에도 소개되고 있다.
당시 라디오는 한참 성장을 구가하던 뉴미디어였다. 당시는 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였고, 대공황이 발발한 시기였으며,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더욱이 라디오라는 뉴미디어는 늘 놀라운 소식을 가져오는 긴박한 수단이었다. 위급한 소식에 학습이 된 청취자들에게 ‘우주전쟁’ 긴급 속보는 그럴 듯하게 믿어졌던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부여된 당시의 상황과 수용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대의 주역인 젊은이와 지식인들은 이런 미디어 수용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미디어였던 라디오를 잘 활용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진행했던 대국민 담화 형식의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정담’은 수개월간 공황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국정을 설명하고 희망을 불어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TV의 시대: 1963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달리 광장. 46세의 젊은 미국 대통령이 달리는 무개차에서 세 발의 총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 장면은 온 국민이 지켜보는 TV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고 미국을 충격에 몰아 넣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비극은 역설적으로 TV의 시대를 만들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처음 개최된 TV 생방송 토론에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을 압도했고, 미국 최연소 대통령이 됐다. 잘생긴 외모와 아름다운 부인. 정치의 시각적 요소가 그와 TV를 통해 부합하면서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TV 영향력을 잘 활용한 그의 당시 TV 선거광고 역시 유튜브를 통해 다시 볼 수 있다.
라디오가 상상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 뉴미디어였다면, TV는 현실을 눈앞에 펼쳐 보여주는 새로운 미디어였다. 1969년 7월 20일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디딘 사건은 TV라는 뉴미디어가 가진 현장 중계의 힘을 그대로 보여줬다.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장면은 국내에 머물렀던 라디오와 달리 세계 인구 6000만 명이 동시에 시청할 수 있었다. TV는 세계적인 뉴미디어였다.
인터넷과 아고라: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한국도 역대 대통령들이 인터넷의 시대적 요청을 받아들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후보 시절 CUG(Closed User Group)라는 PC통신 서비스를 만들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이를 최초의 청와대 홈페이지로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홈페이지를 더 업그레이드 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정책홍보라는 개념을 도입해 국민과 인터넷을 통해 직접 소통하고자 했다.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을 반대하는 촛불시위에 수십만 명이 참여하면서 정부의 인터넷에 대한 인식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단순 홍보 채널로 인식하던 인터넷에서 갑자기 수많은 사람이 현장으로 몰려나올 만한 여론이 형성됐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이명박 정부는 뉴미디어 비서관을 신설하고 온라인 대변인을 각 부처에 임명하는 등 인터넷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인터넷은 ‘아고라’를 대표로 하는 포털 서비스 방식이었다. ‘아고라’는 포털 서비스 다음이 만든 게시판 형태의 서비스로 인터넷의 각종 주장과 토론, 청원, 댓글 등이 모두 한자리에서 이뤄졌다. 아고라는 여론의 집중지이자 뉴미디어였다. 정치 세력들과 사회 이슈에 관심 많은 사람은 아고라를 모니터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트위터로 이동한 광장: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2011년 12월, 아고라를 담당했던 다음커뮤니케이션의 팀장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이슈는 아고라를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아고라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이슈가 모이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아고라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말한 ‘아고라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일’은 바로 ‘나꼼수’ 집회였다. ‘나꼼수’는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의 줄임말이다. 한파 속에 5만 명의 군중이 여의도에 모였는데 아고라에는 그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서로 알고 모였던 것일까.
이보다 한 해 앞서 2010년 아프리카 북단의 튀니지에서 26살의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노점상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했다. 독재 정권에 기생해온 주류 언론은 이에 대해 침묵했다. 그러나 튀니지 국민에게는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스마트폰과 트위터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있었다. 트위터를 통해 정권의 부패와 억압을 알고 뜻을 모은 국민은 들불처럼 일어나 24년 동안 이어진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재스민 혁명’이었다.
나꼼수는 모바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아고라는 올드 미디어가 됐다. 140자의 짧은 메시지를 보내고 전달하는 트위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트위터는 아고라가 그랬듯이 스스로 새로운 미디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가장 빠른 뉴스를 트위터에서 얻었다. 당연히 그런 트위터는 선거에 응용됐다. 2010년 전국지방선거에서는 연예인과 유명 인사들이 투표 인증샷을 찍어보내는 운동이 크게 퍼졌다. 선거 이전 여당이 앞서가던 여론조사는 트위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야당이 경합하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모바일 세대의 확산: 2년 후인 2012년은 선거의 해였다. 4월에는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12월에는 18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많은 정당과 정치인은 여전히 트위터의 힘을 믿었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트위터 가입자는 이미 10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잡지 ‘시사IN’은 눈길을 끌 만한 특집을 다뤘다. ‘RT@트위터를 접수하라’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새로운 변화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노·장년 세대의 모바일 합류였다. 스마트폰이 일반화되면서 초기에는 젊은층이 대거 유입되었고 뒤이어 노·장년 세대들이 합류하면서 모바일 광장의 여론 지형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젊은이들의 생각이 전부가 아니었다. 노·장년층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면서 트위터 여론은 분기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하나는 트위터에 ‘봇’이라고 불리는 유령 계정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트위터의 개방된 기능을 악용(abusing) 하는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트위터는 집단지성으로 하나의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숫자로 서로 싸우는 전장이 되기 시작했다.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팔로워와 팔로잉을 해나갔다. 사람들은 트위터에서 더 많은 재전송(RT)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2012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은 트위터의 압도적인 우호적 지지에도 패배했다. 선거 직후 언론은 ‘SNS가 영향력을 잃은 이유’와 같은 제목의 질문을 던지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분석했다. 그러나 언론보다 늘 한 발짝 늦기 일쑤인 정치권은 트위터에서 어떻게 싸워 이길 것인가를 고민했다. 여전히 SNS에서 우호적인 여론이 왜 선거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 그 해 겨울 18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골목길 카카오톡: 그런데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성장하는 새로운 서비스가 있었다. 바로 카카오톡이었다. 2012년이 되면서 카카오톡 가입자는 급상승하면서 1000만 명을 돌파했고, 하루 메시지 발송 건수는 30억 건이 넘어섰다. 불과 2년 만에 30배 이상 커진 것이었다. 트위터와 달리 카카오톡은 매우 단순했고, 지인들끼리의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됐다. 노·장년층에게 안성맞춤이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의 온라인 정세는 보이는 트위터와 보이지 않는 카카오톡의 두 전장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보이는 트위터는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었다. 주로 젊은층과 지식인, 야당 지지자들이 우세한 광장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카카오톡은 노·장년층과 여당 지지자들의 골목길 속삭임이었다. 대선 결과 박근혜 후보는 득표율 51.6%로 당선됐다.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가장 높은 투표율 속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은 대통령이 됐다. 온라인의 보이는 전장을 누비던 야당 지지자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충격이 바로 2012년 12월 19일 밤 다음 뉴스 댓글의 최고 조회 수, 최고 공감 댓글로 나타난 것이다.
SNS 빅데이터 분석과 여론조사: 탄핵심판을 앞뒀던 올 3월 초. 박근혜 전 대통령은 ‘기각’을 확신하고 5단 케이크를 준비했었다고 한다. 청와대 참모들이 나름 최신 분석 방법을 동원해 ‘기각’될 것이라고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SNS 데이터 분석 전문 업체에 탄핵심판이 어떻게 될지 예측을 의뢰한 결과, 온라인에서의 반응은 ‘탄핵 기각’이 ‘탄핵 인용’보다 더 많았던 것을 근거로 여론이 우호적이라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최신의 조사방법이라 더욱 기각을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데이터를 가지고 다른 결과를 추론한 업체도 많았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을 당했다. ‘SNS 빅데이터 분석’이라는 최신 방식도 해석하기에 따라 결과가 달랐던 것이다.
여론조사는 더욱 혼란스럽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투표와 미국 대통령 선거는 세계 모든 언론과 여론조사 방식의 전통을 무너뜨렸다. 국내에서도 유선과 무선에 따라 응답자들의 정치적 반응이 다르게 나오고 있다. 전화기에 선이 달려 있는 경우 여당이 유리하고 선이 없으면 야당이 유리한 응답이 나온다는 것은 예전이라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현상일 것이다. 도대체 전화기 선이 여야 지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미디어 격차가 만드는 정보의 격차: 미디어의 격차가 정보의 격차를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채널을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한다. 선이 달린 전화기에 걸려오는 설문조사에 답변하는 사람들은 주로 집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문을 보는 사람, 종합편성채널 뉴스를 보는 사람,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사람이 각각 다른 정보를 받아들이고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디어의 다변화와 디지털 기기의 맞춤 기술은 자신의 목소리가 확대·재생산되어 들리는 메아리방(Echo chamber) 안으로 사람들을 가두기 시작했다. 이 방에 들어간 이은 첨단 인터넷 기술이 자신에게만 맞춰서 보여주는 정보만을 전부인 것으로 착각한다. 내가 보는 뉴스와 남이 보는 뉴스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필터 때문에 생기는 거품(Filter bubble)으로 자신의 생각이 다수의 생각과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칸막이 광장으로 바뀌었다. 각자 헤드폰을 쓰고 대화하는 텔레마케터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됐다. 그 결과 18대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더 많은 글을 쓰는 쪽이 이기던 댓글 전쟁은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제 교묘한 가짜뉴스를 누가 더 잘 만드는가 하는 싸움으로 바뀌었다. 선관위가 적발한 가짜뉴스만 3만 건이 넘어섰고, 각 선거 캠프에서는 가짜 뉴스를 찾아내고 팩트를 확인해 대응하는 조직이 중요해졌다.
투명한 공론장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자신만이 아는 가짜뉴스를 들고 세상을 구하러 뛰어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다. 평범한 사람마저 설문조사에 마음을 숨기고 응답하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심지어 거꾸로 대답하기도 한다. 극단주의자들은 이렇게 공론장이 무너진 디지털 환경에서 민주주의와 사회 시스템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이미 몇몇 나라에서는 지도자로 뽑히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성별·연령별·소득별로 서로 다른 인터넷 골목길에 모여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여론은 파편화되고 은폐되고 있으며 격정적이다.
미디어 혼돈의 시대, 합리적인 담론을 잃어버린 공론장은 어떻게 재건해야 할까. 그로 인한 갈등과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인터넷이 가진 수평적 소통의 힘, 집단지성의 능력, 공유와 참여의 가치는 어떻게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선거는 끝났지만, 이제 우리 공동체는 그 해답을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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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열린 광장인가? 언뜻 그렇게 보이지만, 실상은 상식과 멀어져 간다. 미디어의 다변화와 디지털 기기의 맞춤 기술은 사람들을 메아리방(Echo chamber)으로 가두고 있다. 이 방에는 가짜뉴스가 넘쳐나고, 사람들은 내가 보는 뉴스·정보와 다른 이가 보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다. 그럴수록 인터넷·모바일 가진 수평적 소통의 힘, 집단지성의 능력은 약화된다. 이번 19대 대선에서도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열린 광장을 재건할 방법은 없을까.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개표 결과가 공개되던 그 밤, 사람들의 눈과 귀가 모두 방송사의 TV화면 앞에 몰려 있었다. 이 시각에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를 앞서가며 당선이 점점 확정되어가는 그때, 인터넷포털 다음 뉴스의 최다 조회 수 기사 제목은 ‘박근혜 당선 확실 … 사상 첫 여성 대통령 탄생 앞둬’였다. 저녁 7시 21분 44초에 올라온 기사였다. 이 기사에는 그 시각 8189건의 댓글이 붙어 있었다. 댓글 중에서도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댓글은 ‘난 정말 이해가 안 된다’였다. 7209개의 공감을 받았다. 인터넷의 여론은 누가 보아도 문재인 후보의 승리였는데, TV에서 발표되는 대통령 당선자는 박근혜 후보였던 것이다.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의 충격과 상실감은 컸다. 거리에서, 가정에서 지지자별로 희비가 엇갈리는데 비해 인터넷 공간에서는 절망감만 감도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2017년 5월 9일.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개표 결과가 공개되자 새누리당 조원진 후보를 지지했던 친박단체 국민저항본부 다음 카페에는 ‘이해가 안되네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새누리당 진성 당원만 20만 명, 박사모 20만 명. 새누리당 회비 낸 사람들 숫자만 해도 얼마인데 이거 말도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자다 깨서 ‘고작 이 정도 표 얻는 데 보태라고 나하고 아들을 들볶았느냐’며 남편과 싸우고 있다는 글도 있었다(조원진 후보는 4만2949표를 얻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이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전체의 선택은 왜 달랐을까. 왜 우리는 우리 전체의 생각을 알 수 없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뉴미디어가 등장했던 과거를 회상해볼 필요가 있다.
라디오의 시대: 1938년 미국. 어느 날 라디오에서 외계인의 침공을 알리는 긴박한 속보가 발표됐다. 놀란 시민 수백 명이 길거리로 뛰쳐나왔고 짐을 싸서 피난길에 나섰다. 교회에 모여 지구의 종말을 슬퍼하며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심지어 극약을 준비해 ‘세상 다 끝났다’고 자살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경찰서와 방송국에 전화 문의가 쇄도했다. 라디오 드라마 ‘우주전쟁’ 때문에 생긴 소동이었다. 드라마의 첫 형식을 긴급 뉴스처럼 만들어서 오해는 더 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영화 같은 외계인 침공을 그렇게 쉽게 믿을 리가’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이 사건은 너무나 엄청나서 뉴욕타임스가 ‘라디오 시청자들이 전쟁 드라마를 진짜로 오해해 패닉에 빠졌다’고 헤드라인 제목을 뽑았던 사건이다. 당시 방송 내용도 그대로 남아 유튜브에도 소개되고 있다.
당시 라디오는 한참 성장을 구가하던 뉴미디어였다. 당시는 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였고, 대공황이 발발한 시기였으며,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더욱이 라디오라는 뉴미디어는 늘 놀라운 소식을 가져오는 긴박한 수단이었다. 위급한 소식에 학습이 된 청취자들에게 ‘우주전쟁’ 긴급 속보는 그럴 듯하게 믿어졌던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부여된 당시의 상황과 수용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대의 주역인 젊은이와 지식인들은 이런 미디어 수용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미디어였던 라디오를 잘 활용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진행했던 대국민 담화 형식의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정담’은 수개월간 공황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국정을 설명하고 희망을 불어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TV의 시대: 1963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달리 광장. 46세의 젊은 미국 대통령이 달리는 무개차에서 세 발의 총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 장면은 온 국민이 지켜보는 TV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고 미국을 충격에 몰아 넣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비극은 역설적으로 TV의 시대를 만들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처음 개최된 TV 생방송 토론에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을 압도했고, 미국 최연소 대통령이 됐다. 잘생긴 외모와 아름다운 부인. 정치의 시각적 요소가 그와 TV를 통해 부합하면서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TV 영향력을 잘 활용한 그의 당시 TV 선거광고 역시 유튜브를 통해 다시 볼 수 있다.
라디오가 상상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 뉴미디어였다면, TV는 현실을 눈앞에 펼쳐 보여주는 새로운 미디어였다. 1969년 7월 20일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디딘 사건은 TV라는 뉴미디어가 가진 현장 중계의 힘을 그대로 보여줬다.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장면은 국내에 머물렀던 라디오와 달리 세계 인구 6000만 명이 동시에 시청할 수 있었다. TV는 세계적인 뉴미디어였다.
인터넷과 아고라: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한국도 역대 대통령들이 인터넷의 시대적 요청을 받아들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후보 시절 CUG(Closed User Group)라는 PC통신 서비스를 만들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이를 최초의 청와대 홈페이지로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홈페이지를 더 업그레이드 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정책홍보라는 개념을 도입해 국민과 인터넷을 통해 직접 소통하고자 했다.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을 반대하는 촛불시위에 수십만 명이 참여하면서 정부의 인터넷에 대한 인식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단순 홍보 채널로 인식하던 인터넷에서 갑자기 수많은 사람이 현장으로 몰려나올 만한 여론이 형성됐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이명박 정부는 뉴미디어 비서관을 신설하고 온라인 대변인을 각 부처에 임명하는 등 인터넷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인터넷은 ‘아고라’를 대표로 하는 포털 서비스 방식이었다. ‘아고라’는 포털 서비스 다음이 만든 게시판 형태의 서비스로 인터넷의 각종 주장과 토론, 청원, 댓글 등이 모두 한자리에서 이뤄졌다. 아고라는 여론의 집중지이자 뉴미디어였다. 정치 세력들과 사회 이슈에 관심 많은 사람은 아고라를 모니터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트위터로 이동한 광장: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2011년 12월, 아고라를 담당했던 다음커뮤니케이션의 팀장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이슈는 아고라를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아고라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이슈가 모이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아고라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말한 ‘아고라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일’은 바로 ‘나꼼수’ 집회였다. ‘나꼼수’는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의 줄임말이다. 한파 속에 5만 명의 군중이 여의도에 모였는데 아고라에는 그 내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서로 알고 모였던 것일까.
이보다 한 해 앞서 2010년 아프리카 북단의 튀니지에서 26살의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노점상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했다. 독재 정권에 기생해온 주류 언론은 이에 대해 침묵했다. 그러나 튀니지 국민에게는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스마트폰과 트위터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있었다. 트위터를 통해 정권의 부패와 억압을 알고 뜻을 모은 국민은 들불처럼 일어나 24년 동안 이어진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재스민 혁명’이었다.
나꼼수는 모바일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사람들은 컴퓨터가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아고라는 올드 미디어가 됐다. 140자의 짧은 메시지를 보내고 전달하는 트위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트위터는 아고라가 그랬듯이 스스로 새로운 미디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가장 빠른 뉴스를 트위터에서 얻었다. 당연히 그런 트위터는 선거에 응용됐다. 2010년 전국지방선거에서는 연예인과 유명 인사들이 투표 인증샷을 찍어보내는 운동이 크게 퍼졌다. 선거 이전 여당이 앞서가던 여론조사는 트위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야당이 경합하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모바일 세대의 확산: 2년 후인 2012년은 선거의 해였다. 4월에는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12월에는 18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많은 정당과 정치인은 여전히 트위터의 힘을 믿었다. 스마트폰 사용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트위터 가입자는 이미 10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잡지 ‘시사IN’은 눈길을 끌 만한 특집을 다뤘다. ‘RT@트위터를 접수하라’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새로운 변화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노·장년 세대의 모바일 합류였다. 스마트폰이 일반화되면서 초기에는 젊은층이 대거 유입되었고 뒤이어 노·장년 세대들이 합류하면서 모바일 광장의 여론 지형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젊은이들의 생각이 전부가 아니었다. 노·장년층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면서 트위터 여론은 분기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하나는 트위터에 ‘봇’이라고 불리는 유령 계정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트위터의 개방된 기능을 악용(abusing) 하는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트위터는 집단지성으로 하나의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숫자로 서로 싸우는 전장이 되기 시작했다.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팔로워와 팔로잉을 해나갔다. 사람들은 트위터에서 더 많은 재전송(RT)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2012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은 트위터의 압도적인 우호적 지지에도 패배했다. 선거 직후 언론은 ‘SNS가 영향력을 잃은 이유’와 같은 제목의 질문을 던지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분석했다. 그러나 언론보다 늘 한 발짝 늦기 일쑤인 정치권은 트위터에서 어떻게 싸워 이길 것인가를 고민했다. 여전히 SNS에서 우호적인 여론이 왜 선거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이 그 해 겨울 18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골목길 카카오톡: 그런데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성장하는 새로운 서비스가 있었다. 바로 카카오톡이었다. 2012년이 되면서 카카오톡 가입자는 급상승하면서 1000만 명을 돌파했고, 하루 메시지 발송 건수는 30억 건이 넘어섰다. 불과 2년 만에 30배 이상 커진 것이었다. 트위터와 달리 카카오톡은 매우 단순했고, 지인들끼리의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됐다. 노·장년층에게 안성맞춤이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의 온라인 정세는 보이는 트위터와 보이지 않는 카카오톡의 두 전장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보이는 트위터는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었다. 주로 젊은층과 지식인, 야당 지지자들이 우세한 광장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카카오톡은 노·장년층과 여당 지지자들의 골목길 속삭임이었다. 대선 결과 박근혜 후보는 득표율 51.6%로 당선됐다.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가장 높은 투표율 속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은 대통령이 됐다. 온라인의 보이는 전장을 누비던 야당 지지자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충격이 바로 2012년 12월 19일 밤 다음 뉴스 댓글의 최고 조회 수, 최고 공감 댓글로 나타난 것이다.
SNS 빅데이터 분석과 여론조사: 탄핵심판을 앞뒀던 올 3월 초. 박근혜 전 대통령은 ‘기각’을 확신하고 5단 케이크를 준비했었다고 한다. 청와대 참모들이 나름 최신 분석 방법을 동원해 ‘기각’될 것이라고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SNS 데이터 분석 전문 업체에 탄핵심판이 어떻게 될지 예측을 의뢰한 결과, 온라인에서의 반응은 ‘탄핵 기각’이 ‘탄핵 인용’보다 더 많았던 것을 근거로 여론이 우호적이라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최신의 조사방법이라 더욱 기각을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데이터를 가지고 다른 결과를 추론한 업체도 많았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을 당했다. ‘SNS 빅데이터 분석’이라는 최신 방식도 해석하기에 따라 결과가 달랐던 것이다.
여론조사는 더욱 혼란스럽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투표와 미국 대통령 선거는 세계 모든 언론과 여론조사 방식의 전통을 무너뜨렸다. 국내에서도 유선과 무선에 따라 응답자들의 정치적 반응이 다르게 나오고 있다. 전화기에 선이 달려 있는 경우 여당이 유리하고 선이 없으면 야당이 유리한 응답이 나온다는 것은 예전이라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현상일 것이다. 도대체 전화기 선이 여야 지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미디어 격차가 만드는 정보의 격차: 미디어의 격차가 정보의 격차를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채널을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한다. 선이 달린 전화기에 걸려오는 설문조사에 답변하는 사람들은 주로 집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문을 보는 사람, 종합편성채널 뉴스를 보는 사람,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사람이 각각 다른 정보를 받아들이고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디어의 다변화와 디지털 기기의 맞춤 기술은 자신의 목소리가 확대·재생산되어 들리는 메아리방(Echo chamber) 안으로 사람들을 가두기 시작했다. 이 방에 들어간 이은 첨단 인터넷 기술이 자신에게만 맞춰서 보여주는 정보만을 전부인 것으로 착각한다. 내가 보는 뉴스와 남이 보는 뉴스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필터 때문에 생기는 거품(Filter bubble)으로 자신의 생각이 다수의 생각과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칸막이 광장으로 바뀌었다. 각자 헤드폰을 쓰고 대화하는 텔레마케터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게 됐다. 그 결과 18대 대통령 선거 때만 해도 더 많은 글을 쓰는 쪽이 이기던 댓글 전쟁은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제 교묘한 가짜뉴스를 누가 더 잘 만드는가 하는 싸움으로 바뀌었다. 선관위가 적발한 가짜뉴스만 3만 건이 넘어섰고, 각 선거 캠프에서는 가짜 뉴스를 찾아내고 팩트를 확인해 대응하는 조직이 중요해졌다.
투명한 공론장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자신만이 아는 가짜뉴스를 들고 세상을 구하러 뛰어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다. 평범한 사람마저 설문조사에 마음을 숨기고 응답하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심지어 거꾸로 대답하기도 한다. 극단주의자들은 이렇게 공론장이 무너진 디지털 환경에서 민주주의와 사회 시스템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이미 몇몇 나라에서는 지도자로 뽑히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성별·연령별·소득별로 서로 다른 인터넷 골목길에 모여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여론은 파편화되고 은폐되고 있으며 격정적이다.
미디어 혼돈의 시대, 합리적인 담론을 잃어버린 공론장은 어떻게 재건해야 할까. 그로 인한 갈등과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인터넷이 가진 수평적 소통의 힘, 집단지성의 능력, 공유와 참여의 가치는 어떻게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선거는 끝났지만, 이제 우리 공동체는 그 해답을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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