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마음 속의 왕자가 되고 싶다”
“사람들 마음 속의 왕자가 되고 싶다”
영국의 해리 왕자, 어머니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죽음으로 좌절한 후 삶에 의미 되찾는 과정을 뉴스위크 단독 인터뷰에서 밝혀 현대의 장례 행렬 중에서 가장 통렬한, 아니 가장 잔인한 장면이었다. 1997년 9월 6일 영국 런던의 중심가에서 열두 살 난 해리 왕자가 주먹을 꼭 쥔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어머니의 관 뒤를 따랐다. 그의 곁에는 형 윌리엄 왕세손, 아버지 찰스 왕세자, 할아버지 필립공(에딘버러 공작), 외삼촌 찰스 스펜서가 나란히 서서 무거운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로부터 일주일 전 아름답고 카르스마 강하고 예측 불가하던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은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처참하게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36세였다.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장례식이 치러진 지 20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주체할 수 없었던 비통함의 기억이 지금도 해리 왕자의 정신세계를 지배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황망한 가운데 나는 어머니의 관 뒤에서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고 그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주변에서 수많은 군중이 나를 쳐다봤다. TV로 나를 지켜본 시청자는 그 몇 천 배가 됐을 것이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아이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해선 안 된다. 요즘 같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해리 왕자는 그날 일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마음에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를 입고 지난 20년 동안 심적인 방황을 거듭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부유한 난봉꾼들과 어울리며 술·담배에 빠졌다. 한번은 변장 파티에 나치 복장을 입고 나가 영국 왕실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2012년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거의 알몸을 드러낸 여성들과 벌거벗고 파티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혀 구제불능이라는 비난도 들었다. 그는 수많은 여성이 탐내는 세계 최고의 신랑감인 동시에 왕실의 눈엣가시였다.
그러나 올해 32세인 그는 이제 사뭇 달라진 느낌이다. 왕자다운 매력과 소탈함, 자신감과 장난기가 뒤섞인 모습을 보인다. 그를 보면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떠오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처럼 반항적인 아웃사이더에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좋은 왕족 중 한 명으로 변신하는 데는 고통스런 자기성찰이 필요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이룬 것에 자부심을 가지며 더 노력하려고 애쓴다. 그는 뉴스위크에 “해리 왕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뉴스위크는 해리 왕자를 밀착 취재했다. 또 최근엔 켄싱턴궁에서 그를 단독 인터뷰했다. 그는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그 궁의 침실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에 산다. 그의 형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부부는 켄싱턴궁에 있는 방 22개짜리 아파트에서 거주한다.
해리 왕자를 찾아갔을 때 그는 편안한 차림으로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그는 다정하고 힘 있게 이야기하면서도 상당히 조심스러워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자신의 변화에 관해 말할 땐 긴장을 풀고 놀라울 정도로 솔직해졌다.
“20대 중반쯤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동안의 실수를 바로잡아야 했기에 많은 성찰이 필요했다.” 지난 4월 그는 팟캐스트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비통한 감정을 억누른 것이 2년간의 ‘완전한 정신적 혼돈 상태’로 이어졌으며 정서적 황폐함으로 여러 차례 신경쇠약 직전까지 갔다고 밝혔다. 28세가 됐을 땐 형 윌리엄 왕세손의 조언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기도 했다고 털어 놓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난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도 싫어 모래 속에 머리를 박고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거부하며 지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다시 모래 위로 머리를 내밀고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내 역할을 좋은 쪽으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나는 열의가 있고 힘이 솟구친다. 자선사업에 몰두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웃게 만드는 게 재미있고 보람도 있다. 때론 지금도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예전보다 마음을 더 잘 다스릴 수 있다. 그렇다고 장난기마저 사라지진 않았다. 난 장난을 즐기고 그것을 통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들과 소통한다.”
해리 왕자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상 목표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내게 평범한 삶을 보여주려고 무척 애쓰셨다. 나와 형을 데리고 노숙자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현실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은 게 너무도 다행이다. 사람들은 형과 나의 평범한 생활을 알면 아마도 놀랄 것이다. 나는 쇼핑도 직접한다. 동네 슈퍼마켓의 정육점을 나설 때 누군가 스마트폰으로 내 모습을 찍을까 걱정될 때도 있다. 하지만 가능하면 진짜 평범하게 살고 싶다. 운이 좋아 자녀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들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왕위에 오른다고 해도 쇼핑만큼은 직접하겠다.”
평범하게 살겠다는 해리 왕자의 결심은 그의 데이트에도 반영된 것 같다. 그의 여자친구 메이건 마클은 잘 나가는 할리우드 배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혼녀이자 활동적인 여권운동가일 뿐 아니라 특히 미국인이다. 그 어느 하나도 영국 왕족 배우자의 전형적인 조건에 맞지 않는다.
그는 여자친구 마클을 최대한 보호하고 다른 연인들처럼 그녀와 지내고 싶어 한다. 지난해 11월 그의 요청에 따라 켄싱턴궁은 “신문 1면에 실리는 마클 씨에 관한 비방, 인종차별적인 온라인 댓글, SNS의 노골적인 성차별과 인종차별적 인신공격 등 온갖 욕설과 괴롭힘”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해리 왕자는 마클 씨의 안전을 우려하며 그녀를 보호해줄 수 없는 상황에 크게 좌절하고 있다. 마클 씨가 그와 사귄 지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공격을 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해리 왕자와 가까운 지인은 그가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일’이란 프로포즈를 뜻한다. “그들은 분명 서로 잘 어울리고 공통점도 많다. 하지만 아직은 서로를 속속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사귀지 못했다. 그처럼 아주 특이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평범한 연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차츰 알아봐야 한다. 연말까진 둘 사이에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평범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왕실의 신비로움과 ‘마법’이 사라질 것이라고 해리 왕자는 혹시라도 우려할까? 그는 “아주 힘든 균형잡기”라고 말했다. “그런 신비로움과 ‘마법’을 잃고 싶지 않다. 영국과 우리 세계는 왕실과 군주제가 필요하다.”
해리 왕자는 궁에 살며 차창이 어둡게 가려진 리무진을 타고 다니며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이 자칫하면 조롱 받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안다. 실제로 그는 특권을 자주 사용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다가 신변안전 문제로 전선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전쟁터에 계속 남고 싶은 생각에 군 지휘부를 찾아가 로비까지 했다. 또 더 최근엔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마클과 단 둘이 오붓하게 전시물을 관람하기 위해 어느날 밤 늦게까지 문을 열도록 박물관 측을 설득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평범한 남자가 되길 원치 않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가 왕실 일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동행 취재할 때 보면 그를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은 ‘진짜 왕자’와 얘기를 나눴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해리 왕자는 어린이와 부상한 참전군인 등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며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할 때는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완전히 몰입했다. 그는 사람들과 교감하는 능력을 타고났다. 특히 상이군인만이 아니라 모든 연령,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도록 용기를 북돋우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는 거의 20년 동안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지만 이젠 자신이 열정적이고 다정다감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내 열정이 지나칠 때도 있다”고 그는 빙긋이 웃었다. “그 때문에 예전엔 문제도 많이 일으켰다. 난 정면으로 나서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해리 왕자가 그처럼 ‘정면으로 나서고’ 싶어 하는 문제 중 하나는 영국 왕실의 개혁이다. 그와 윌리엄 왕세손 부부는 21세기에도 영국에 군주제를 유지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 “왕실은 국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해리 왕자는 말했다.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지난 60여 년 동안 조성한 긍정적인 분위기를 지속하고 싶다. 하지만 여왕이 하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진 않을 것이다.”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세손은 찰스 왕세자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 윌리엄 왕세손이 인기가 높긴 하지만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죽음과 왕실에 닥친 여러 불행한 일로 거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영국 군주제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는 특히 해리 왕자의 매력과 에너지가 도움이 됐다. “우린 영국 군주제의 현대화를 추구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다. 우리 왕실에서 왕이나 여왕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때가 되면 우린 우리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해리 왕자와 윌리엄 왕세손 부부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외 이미지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자선사업을 계속 추진할 계획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업을 좀 더 전문적으로 세분화할 생각이다. 지난해 이전까지 엘리자베스 여왕은 600여 개의 자선단체를 후원했다. 왕실 전체가 지원한 자선단체는 3000개에 이른다. 윌리엄 왕세손이 즉위할 때쯤 그 숫자는 크게 줄 것이다.
그러나 해리 왕자를 잘 아는 소식통은 그들이 자선사업에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먼저 철저히 조사한 뒤 적극 추진할 수 있는 특정 자선사업 몇 가지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영국 왕실이 자선사업을 한다고 자랑하는 저명인사 집단처럼 보이는 것을 절대 원치 않는다.” 해리 왕자도 “우린 시간을 현명하게 쓴다”고 말했다. “그냥 이곳저곳을 방문해 악수하고 사진만 찍으며 직접 관여하지 않는 그런 자선사업은 원치 않는다.”해리 왕자는 자신의 공적인 삶에 3가지 핵심적인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어머니의 유산을 기리고 확장하는 일이다. “어머니가 내게 바라던 일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안다. 어머니가 완성하지 못한 일을 진척시키고 싶다.” 20년 전 악수만 해도 에이즈가 전염될지 모른다는 비합리적인 두려움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다이애나 왕세자빈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에이즈바이러스(HIV) 환자의 손을 잡았다. 그 하나의 제스처가 에이즈를 향한 대중의 태도를 바꿨다(그녀는 TV 인터뷰에서 “사람들 마음 속의 왕세자빈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바베이도스의 에이즈위원회 행사에 참석한 해리 왕자도 수많은 사진기자들 앞에서 ‘용감하게’ HIV 검사를 받았다.
또 그는 2006년 아프리카 남부 레소토의 세이소 왕자와 함께 자선단체 센테발레(‘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뜻이다)를 세웠다. 세이소 왕자 역시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센테발레는 세계에서 HIV 감염율이 두 번째로 높은 레소토의 취약한 어린이들을 도와줌으로써 두 왕자 어머니들의 뜻을 기린다. 해리 왕자는 지뢰 반대 자선단체 HALO 트러스트도 후원한다. ‘ 세계의 지뢰를 없애자’는 운동에 앞장섰던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그의 두 번째 역할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돕는 일이다. 91세인 여왕은 자신의 공적 업무 중 일부를 하나씩 왕실의 ‘젊은 피’로 넘기고 있다. 해리 왕자는 “할머니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했다. “시간을 갖고 치열하게 생각한 뒤 결정하라고 하신다.”
세 번째 역할은 이전 세대 같은 보수적인 왕실이라면 절대 동의하지 않을 일이다. 해리 왕자는 정신건강 문제를 둘러싼 좋지 않은 인식을 불식하겠다고 결심했다. 그와 윌리엄 왕세손 부부가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하고 있는 일이다. “정부엔 자금이 있고 우리에겐 목소리가 있다”고 해리 왕자가 말했다.
그는 정신건강과 관련된 자선사업 노력이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기자와 함께 있을 때 그는 한번 이상 “타고난 천성도 바꿀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분명했다.
2012년 해리 왕자와 윌리엄 왕세손 부부는 왕실재단을 설립했다. 그 재단 사업 중 하나인 ‘풀 이펙트(Full Effect)’는 불우한 환경에서 갱단에 빠져들기 쉬운 아이들이 스포츠에 재미를 붙이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스포츠를 통해 좀 더 긍정적인 삶을 찾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해리 왕자가 영국 중부 도시 노팅엄의 풀이펙트 행사장을 방문할 때 동행 취재했다.그는 먼저 아홉 살짜리 아이들 약 20명이 모여 있는 노팅엄의 국립빙상센터 앞을 찾았다. 그 아이들은 해리 왕자의 ‘평범한’ 면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멋진 왕자의 화려한 행사를 원했다. 하지만 해리 왕자는 셔츠 차림에 소매를 걷어 붙였고 셔츠 자락은 진 바지 밖으로 반쯤 빠져 나와 있었다. 그는 아이들이 자신에게 예를 표하든 않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짧은 우스갯소리로 아이들을 웃기며 긴장을 풀게 했다. 아이들은 그가 럭비공을 던지고 축구공을 차고 다니는 모습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봤다.
약 20분 뒤 왕실재단의 다른 프로그램 행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포츠 코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에 참가한 16~24세 그룹과의 만남이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결손 가정 출신이었다. 한 명은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7명의 형제자매를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다음 해리 왕자는 세인트 앤의 러셀 청소년센터를 방문했다. 트레버 로즈가 운영하는 유명한 커뮤니티 리코딩 스튜디오가 있는 곳이다. 해리 왕자는 2013년부터 그곳을 자주 찾았다. 로즈는 “학교나 청소년센터, 스포츠센터에서 쫓겨난 아이들도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중 다수는 가출해 폭력에 시달렸고 술과 마약에 빠져 자신감도 자부심도 없다.”
해리 왕자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 십대 대다수는 왕자의 방문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로즈는 걱정하지 않았다. “불우한 아이들은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하지만 해리 왕자를 만나면 아이들이 마음을 열 것이다.”
곧 해리 왕자는 아이들과 악수하고 그들의 등을 치며 얼싸안아 주고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아이들이 그를 에워싸고 함께 셀카를 찍자고 졸랐다. 그는 아이들의 그런 부탁을 전혀 귀찮아 여기지 않고 선뜻 응했다.
로즈는 “왕자를 직접 만나고 왕자가 자신을 관심 깊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이들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해리가 왕자의 모범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는 그냥 악수하고 인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의 일부가 된다.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처럼 헌신적인 게 아닐까 싶다.” 해리 왕자는 영국의 사립 명문 이튼 칼리지를 다녔다(그는 그 학교를 싫어했다). 그 다음 10년 동안 군에 몸 담으면서 아프가니스탄 파견을 자원해 두 차례 파병됐다. 그는 처음엔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부대 소속이 된 것을 좋아했지만 곧 탈레반의 표적이 되면서 자신과 동료들을 큰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전출 명령을 받고 좌절했다.
하지만 그는 군복무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됐고 개인적인 임무도 발견했다. 부상한 군인들을 돕는 일이었다. 2014년 그는 상이용사를 위한 올림픽인 인빅터스 게임을 창설했다. 그 행사는 이제 매년 열리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얼마 전 그는 하루 약 5000건의 응급상황 신고를 받고 런던 도처로 구급대를 보내는 런던 앰뷸런스 서비스의 응급작전센터를 방문했다. 정신건강 문제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우려는 운동의 일환이었다. 그곳에선 정신적 충격과 우울증이 해리 왕자의 주제였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선 근무 경험을 동원해 구급차 배차요원과 응급구조사들과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는 아파치 헬기 조종사로서 부상병들을 후송한 경험을 돌이켰다. “그들을 내려주고 병원측에 인계하면 곧바로 다른 임무가 무전으로 떨어졌다. 즉시 그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후송한 부상병이 치료를 받고 살아 남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응급구조사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매일매일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내는지 아주 놀랍다.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공격당할 수도 있고 욕설을 들을 수도 있다. 인간으로서 그런 일을 겪으면 당연히 충격 받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참 잘 버텨낸다.”
그중 랭커셔 주 블랙풀의 응급구조사로 네 자녀의 아버지인 댄 판워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학대로 사망한 어린이가 포함된 아주 힘든 사건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판워스는 “완전히 깜깜한 곳”에 있는 느낌이었지만 직장을 잃을지 몰라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해리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자가 아니라 심리치료사처럼 그에게 말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털어놓는 게 정말 중요하다. 몇 주, 몇 달, 몇 년 동안 자신의 감정과 걱정거리를 마음 속에 담아두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고 허약해 보이는 게 결코 아니다. 직장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냥 속에 담아두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가면 스스로 일을 감당하지 못해 일자리를 잃게 된다.”
해리 왕자는 전우애를 느낄 수 있는 군인 출신들과 만날 때 공감대를 가장 잘 형성한다. 그는 참전용사 병원도 방문했다. 맑고 쌀쌀한 날이었다. 남자 몇 명이 치료 목적의 목공 프로젝트로 기다란 나무 버팀대를 만들며 모닥불 옆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던 참전용사들로 몸의 상처는 대부분 나았지만 우울증, 스트레스, 분노, 불안증, 알코올 중독 등 심리적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해리 왕자는 농담과 소탈한 행동으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는 그들에게 군에서 경험한 전우애와 ‘블랙 유머’가 그립다고 말했다.
그중 한 명인 마이크 데이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류탄 폭발로 척추 골절상과 머리와 몸 전신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당한 저격부대 지휘관 출신이었다. 해리 왕자는 그에게 곧장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의 정신적인 충격으로 지금 어떤 점이 가장 힘드나?”
데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난 더는 내가 아닌 것 같다”고 조용히 말했다.
아주 민감한 순간이었지만 해리 왕자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냥 존재하기보다 매 순간을 철저히 살아가기 위해 자신과 싸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
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에 한 번 이곳에 오는데 아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비서가 다음 약속 장소로 옮겨야 한다고 귀띔하자 해리 왕자는 참전용사들에게 “국가를 위해 훌륭한 일을 했다”며 사기를 북돋워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리 왕자는 나중에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그들과 군복무 경험을 공유한다. 그들에게서 나 자신을 볼 수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자신을 입증하고 뭔가 이룰 기회를 원한다.” 해리 왕자는 일할 때는 활기차고 친절하지만 가만히 있을 때는 종종 긴장하고 어두운 면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는 대단한 특권을 누리며 산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고통도 많이 받았다. 부모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 생활을 11년 동안 유지하면서 ‘왕자와 결혼해 오래도록 잘 살았다’는 동화가 악몽으로 변하자 별거를 선택했다. 찰스 왕세자는 오랜 애인이던 카밀라 파커 볼스에게로 돌아갔다. 다이애나 왕세자빈은 연인이 여럿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연인이 런던 해러즈 백화점을 소유했던 집안의 아들 도디 파예드였다. 파예드는 다이애나와 함께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해리 왕자는 가족에 관해 묻자 할머니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주 비범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어머니 다이애나 왕세자빈은? “유머 감각이 매우 뛰어났고 우리를 재미있게 해주며 보호해주려고 늘 애썼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찰스 왕세자와 새어머니 파커 볼스에 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관계가 다이애나 왕세자빈과 윌리엄·해리 왕자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었는지는 이제 세계가 다 안다.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죽음으로 생긴 공백은 가슴에 뚫린 구멍처럼 메워질 수 없었다. 해리 왕자는 정서적으로 기댈 사람 없이 성장했다. 형수 케이트가 어느 정도의 공백을 메워줬다. 그녀와 형 윌리엄 왕세손이 약혼하자 해리는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며 의지했다. 그는 자주 형네 아파트를 찾아갔고 케이트는 그를 위해 직접 요리를 했다(그는 특히 통닭구이를 좋아한다고 알려졌다).
해리와 윌리엄은 형제지만 성격이 판이하다. 한 왕실 소식통은 “정서적으로 두 사람은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해리는 외향적인 반면 윌리엄은 내성적이고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두 형제는 자신들이 처한 독특한 위치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읜 경험으로 유대감이 강하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의지하는 사이는 아니다. 윌리엄이 대학을 다닐 때 두 사람은 거의 만나지 않았다.”
해리 왕자와 가까운 다른 소식통도 두 형제 사이에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윌리엄이 공부는 더 잘했다. 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문제에선 해리가 윌리엄과 케이트를 능가한다. 특히 어린이를 다루는 면에서 그렇다. 해리는 아이들을 아주 좋아하고 자연스럽게 대하는 반면 윌리엄이나 케이트는 그와 다르다.” 하지만 윌리엄과 케이트 사이에 아기가 태어난 뒤로 훨씬 나아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해리 왕자는 좀 더 실용적이다. 그는 “손으로 못할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군복무가 그에게 잘 맞았던 이유 중 하나다. 2007년 말 해리는 아프가니스탄 헬만드 주에서 전방 항공통제관으로 활동했다. 전투기를 탈레반 표적으로 유도하는 역할이었다. 10주째로 들어섰을 때 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다는 비밀 정보가 언론에 의해 유출됐다. 그는 자신과 소속 부대의 안전 문제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해리는 “무척 분했다”고 말했다. “내겐 군복무가 최고의 피난처였다. 군에 있을 때는 실제로 뭔가를 이루고 있다고 느꼈다.”
2012년 그의 아프가니스탄 복무가 다시 허용됐다. 그는 헬만드 주 캠프 배스티언 기지에서 공격용 아파치 헬기를 몰았다. “그냥 해리 왕자가 되기보다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예를 들어 아파치 헬기 조종 같은 것 말이다. 또 거기에 있을 땐 나도 참전군인으로서 내가 왕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해리 왕자는 2015년 귀국했다. 군생활을 박탈당했다고 느끼고 좌절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곧 좌절감을 딛고 다른 길을 적극 모색했다. 자신의 삶이 왕실의 일원이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다른 의미도 있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 스스로 뭔가를 빨리 이루고 싶다. 형의 자녀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기 전에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될 것 같다. 그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 앤젤라 레빈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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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장례식이 치러진 지 20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주체할 수 없었던 비통함의 기억이 지금도 해리 왕자의 정신세계를 지배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황망한 가운데 나는 어머니의 관 뒤에서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고 그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주변에서 수많은 군중이 나를 쳐다봤다. TV로 나를 지켜본 시청자는 그 몇 천 배가 됐을 것이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아이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해선 안 된다. 요즘 같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해리 왕자는 그날 일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마음에 치유되지 않는 깊은 상처를 입고 지난 20년 동안 심적인 방황을 거듭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부유한 난봉꾼들과 어울리며 술·담배에 빠졌다. 한번은 변장 파티에 나치 복장을 입고 나가 영국 왕실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기도 했다. 2012년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거의 알몸을 드러낸 여성들과 벌거벗고 파티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혀 구제불능이라는 비난도 들었다. 그는 수많은 여성이 탐내는 세계 최고의 신랑감인 동시에 왕실의 눈엣가시였다.
그러나 올해 32세인 그는 이제 사뭇 달라진 느낌이다. 왕자다운 매력과 소탈함, 자신감과 장난기가 뒤섞인 모습을 보인다. 그를 보면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떠오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처럼 반항적인 아웃사이더에서 세계에서 가장 인기 좋은 왕족 중 한 명으로 변신하는 데는 고통스런 자기성찰이 필요했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이룬 것에 자부심을 가지며 더 노력하려고 애쓴다. 그는 뉴스위크에 “해리 왕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거부하며 지냈다”
해리 왕자를 찾아갔을 때 그는 편안한 차림으로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그는 다정하고 힘 있게 이야기하면서도 상당히 조심스러워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자신의 변화에 관해 말할 땐 긴장을 풀고 놀라울 정도로 솔직해졌다.
“20대 중반쯤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동안의 실수를 바로잡아야 했기에 많은 성찰이 필요했다.” 지난 4월 그는 팟캐스트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비통한 감정을 억누른 것이 2년간의 ‘완전한 정신적 혼돈 상태’로 이어졌으며 정서적 황폐함으로 여러 차례 신경쇠약 직전까지 갔다고 밝혔다. 28세가 됐을 땐 형 윌리엄 왕세손의 조언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기도 했다고 털어 놓았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난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도 싫어 모래 속에 머리를 박고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거부하며 지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다시 모래 위로 머리를 내밀고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내 역할을 좋은 쪽으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나는 열의가 있고 힘이 솟구친다. 자선사업에 몰두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웃게 만드는 게 재미있고 보람도 있다. 때론 지금도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예전보다 마음을 더 잘 다스릴 수 있다. 그렇다고 장난기마저 사라지진 않았다. 난 장난을 즐기고 그것을 통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들과 소통한다.”
해리 왕자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상 목표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내게 평범한 삶을 보여주려고 무척 애쓰셨다. 나와 형을 데리고 노숙자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현실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은 게 너무도 다행이다. 사람들은 형과 나의 평범한 생활을 알면 아마도 놀랄 것이다. 나는 쇼핑도 직접한다. 동네 슈퍼마켓의 정육점을 나설 때 누군가 스마트폰으로 내 모습을 찍을까 걱정될 때도 있다. 하지만 가능하면 진짜 평범하게 살고 싶다. 운이 좋아 자녀를 갖게 된다면 그 아이들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왕위에 오른다고 해도 쇼핑만큼은 직접하겠다.”
평범하게 살겠다는 해리 왕자의 결심은 그의 데이트에도 반영된 것 같다. 그의 여자친구 메이건 마클은 잘 나가는 할리우드 배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혼녀이자 활동적인 여권운동가일 뿐 아니라 특히 미국인이다. 그 어느 하나도 영국 왕족 배우자의 전형적인 조건에 맞지 않는다.
그는 여자친구 마클을 최대한 보호하고 다른 연인들처럼 그녀와 지내고 싶어 한다. 지난해 11월 그의 요청에 따라 켄싱턴궁은 “신문 1면에 실리는 마클 씨에 관한 비방, 인종차별적인 온라인 댓글, SNS의 노골적인 성차별과 인종차별적 인신공격 등 온갖 욕설과 괴롭힘”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해리 왕자는 마클 씨의 안전을 우려하며 그녀를 보호해줄 수 없는 상황에 크게 좌절하고 있다. 마클 씨가 그와 사귄 지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공격을 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해리 왕자와 가까운 지인은 그가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일’이란 프로포즈를 뜻한다. “그들은 분명 서로 잘 어울리고 공통점도 많다. 하지만 아직은 서로를 속속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사귀지 못했다. 그처럼 아주 특이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평범한 연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차츰 알아봐야 한다. 연말까진 둘 사이에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평범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왕실의 신비로움과 ‘마법’이 사라질 것이라고 해리 왕자는 혹시라도 우려할까? 그는 “아주 힘든 균형잡기”라고 말했다. “그런 신비로움과 ‘마법’을 잃고 싶지 않다. 영국과 우리 세계는 왕실과 군주제가 필요하다.”
해리 왕자는 궁에 살며 차창이 어둡게 가려진 리무진을 타고 다니며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이 자칫하면 조롱 받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안다. 실제로 그는 특권을 자주 사용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다가 신변안전 문제로 전선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전쟁터에 계속 남고 싶은 생각에 군 지휘부를 찾아가 로비까지 했다. 또 더 최근엔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마클과 단 둘이 오붓하게 전시물을 관람하기 위해 어느날 밤 늦게까지 문을 열도록 박물관 측을 설득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평범한 남자가 되길 원치 않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가 왕실 일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동행 취재할 때 보면 그를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은 ‘진짜 왕자’와 얘기를 나눴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해리 왕자는 어린이와 부상한 참전군인 등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며 만나는 사람들과 얘기할 때는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완전히 몰입했다. 그는 사람들과 교감하는 능력을 타고났다. 특히 상이군인만이 아니라 모든 연령,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도록 용기를 북돋우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는 거의 20년 동안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지만 이젠 자신이 열정적이고 다정다감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내 열정이 지나칠 때도 있다”고 그는 빙긋이 웃었다. “그 때문에 예전엔 문제도 많이 일으켰다. 난 정면으로 나서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군주제는 국가에 긍정적인 힘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세손은 찰스 왕세자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 윌리엄 왕세손이 인기가 높긴 하지만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죽음과 왕실에 닥친 여러 불행한 일로 거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영국 군주제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는 특히 해리 왕자의 매력과 에너지가 도움이 됐다. “우린 영국 군주제의 현대화를 추구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다. 우리 왕실에서 왕이나 여왕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때가 되면 우린 우리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해리 왕자와 윌리엄 왕세손 부부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외 이미지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자선사업을 계속 추진할 계획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업을 좀 더 전문적으로 세분화할 생각이다. 지난해 이전까지 엘리자베스 여왕은 600여 개의 자선단체를 후원했다. 왕실 전체가 지원한 자선단체는 3000개에 이른다. 윌리엄 왕세손이 즉위할 때쯤 그 숫자는 크게 줄 것이다.
그러나 해리 왕자를 잘 아는 소식통은 그들이 자선사업에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먼저 철저히 조사한 뒤 적극 추진할 수 있는 특정 자선사업 몇 가지에 집중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영국 왕실이 자선사업을 한다고 자랑하는 저명인사 집단처럼 보이는 것을 절대 원치 않는다.” 해리 왕자도 “우린 시간을 현명하게 쓴다”고 말했다. “그냥 이곳저곳을 방문해 악수하고 사진만 찍으며 직접 관여하지 않는 그런 자선사업은 원치 않는다.”해리 왕자는 자신의 공적인 삶에 3가지 핵심적인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어머니의 유산을 기리고 확장하는 일이다. “어머니가 내게 바라던 일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안다. 어머니가 완성하지 못한 일을 진척시키고 싶다.” 20년 전 악수만 해도 에이즈가 전염될지 모른다는 비합리적인 두려움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다이애나 왕세자빈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에이즈바이러스(HIV) 환자의 손을 잡았다. 그 하나의 제스처가 에이즈를 향한 대중의 태도를 바꿨다(그녀는 TV 인터뷰에서 “사람들 마음 속의 왕세자빈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바베이도스의 에이즈위원회 행사에 참석한 해리 왕자도 수많은 사진기자들 앞에서 ‘용감하게’ HIV 검사를 받았다.
또 그는 2006년 아프리카 남부 레소토의 세이소 왕자와 함께 자선단체 센테발레(‘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뜻이다)를 세웠다. 세이소 왕자 역시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센테발레는 세계에서 HIV 감염율이 두 번째로 높은 레소토의 취약한 어린이들을 도와줌으로써 두 왕자 어머니들의 뜻을 기린다. 해리 왕자는 지뢰 반대 자선단체 HALO 트러스트도 후원한다. ‘ 세계의 지뢰를 없애자’는 운동에 앞장섰던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그의 두 번째 역할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돕는 일이다. 91세인 여왕은 자신의 공적 업무 중 일부를 하나씩 왕실의 ‘젊은 피’로 넘기고 있다. 해리 왕자는 “할머니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했다. “시간을 갖고 치열하게 생각한 뒤 결정하라고 하신다.”
세 번째 역할은 이전 세대 같은 보수적인 왕실이라면 절대 동의하지 않을 일이다. 해리 왕자는 정신건강 문제를 둘러싼 좋지 않은 인식을 불식하겠다고 결심했다. 그와 윌리엄 왕세손 부부가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하고 있는 일이다. “정부엔 자금이 있고 우리에겐 목소리가 있다”고 해리 왕자가 말했다.
그는 정신건강과 관련된 자선사업 노력이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기자와 함께 있을 때 그는 한번 이상 “타고난 천성도 바꿀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분명했다.
2012년 해리 왕자와 윌리엄 왕세손 부부는 왕실재단을 설립했다. 그 재단 사업 중 하나인 ‘풀 이펙트(Full Effect)’는 불우한 환경에서 갱단에 빠져들기 쉬운 아이들이 스포츠에 재미를 붙이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스포츠를 통해 좀 더 긍정적인 삶을 찾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해리 왕자가 영국 중부 도시 노팅엄의 풀이펙트 행사장을 방문할 때 동행 취재했다.그는 먼저 아홉 살짜리 아이들 약 20명이 모여 있는 노팅엄의 국립빙상센터 앞을 찾았다. 그 아이들은 해리 왕자의 ‘평범한’ 면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멋진 왕자의 화려한 행사를 원했다. 하지만 해리 왕자는 셔츠 차림에 소매를 걷어 붙였고 셔츠 자락은 진 바지 밖으로 반쯤 빠져 나와 있었다. 그는 아이들이 자신에게 예를 표하든 않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짧은 우스갯소리로 아이들을 웃기며 긴장을 풀게 했다. 아이들은 그가 럭비공을 던지고 축구공을 차고 다니는 모습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봤다.
약 20분 뒤 왕실재단의 다른 프로그램 행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포츠 코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에 참가한 16~24세 그룹과의 만남이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결손 가정 출신이었다. 한 명은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7명의 형제자매를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다음 해리 왕자는 세인트 앤의 러셀 청소년센터를 방문했다. 트레버 로즈가 운영하는 유명한 커뮤니티 리코딩 스튜디오가 있는 곳이다. 해리 왕자는 2013년부터 그곳을 자주 찾았다. 로즈는 “학교나 청소년센터, 스포츠센터에서 쫓겨난 아이들도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중 다수는 가출해 폭력에 시달렸고 술과 마약에 빠져 자신감도 자부심도 없다.”
해리 왕자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 십대 대다수는 왕자의 방문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로즈는 걱정하지 않았다. “불우한 아이들은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하지만 해리 왕자를 만나면 아이들이 마음을 열 것이다.”
곧 해리 왕자는 아이들과 악수하고 그들의 등을 치며 얼싸안아 주고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아이들이 그를 에워싸고 함께 셀카를 찍자고 졸랐다. 그는 아이들의 그런 부탁을 전혀 귀찮아 여기지 않고 선뜻 응했다.
로즈는 “왕자를 직접 만나고 왕자가 자신을 관심 깊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이들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해리가 왕자의 모범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는 그냥 악수하고 인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의 일부가 된다.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처럼 헌신적인 게 아닐까 싶다.”
이튼 칼리지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하지만 그는 군복무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됐고 개인적인 임무도 발견했다. 부상한 군인들을 돕는 일이었다. 2014년 그는 상이용사를 위한 올림픽인 인빅터스 게임을 창설했다. 그 행사는 이제 매년 열리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얼마 전 그는 하루 약 5000건의 응급상황 신고를 받고 런던 도처로 구급대를 보내는 런던 앰뷸런스 서비스의 응급작전센터를 방문했다. 정신건강 문제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우려는 운동의 일환이었다. 그곳에선 정신적 충격과 우울증이 해리 왕자의 주제였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선 근무 경험을 동원해 구급차 배차요원과 응급구조사들과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는 아파치 헬기 조종사로서 부상병들을 후송한 경험을 돌이켰다. “그들을 내려주고 병원측에 인계하면 곧바로 다른 임무가 무전으로 떨어졌다. 즉시 그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후송한 부상병이 치료를 받고 살아 남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응급구조사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매일매일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내는지 아주 놀랍다.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공격당할 수도 있고 욕설을 들을 수도 있다. 인간으로서 그런 일을 겪으면 당연히 충격 받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참 잘 버텨낸다.”
그중 랭커셔 주 블랙풀의 응급구조사로 네 자녀의 아버지인 댄 판워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학대로 사망한 어린이가 포함된 아주 힘든 사건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판워스는 “완전히 깜깜한 곳”에 있는 느낌이었지만 직장을 잃을지 몰라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해리 왕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자가 아니라 심리치료사처럼 그에게 말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털어놓는 게 정말 중요하다. 몇 주, 몇 달, 몇 년 동안 자신의 감정과 걱정거리를 마음 속에 담아두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고 허약해 보이는 게 결코 아니다. 직장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냥 속에 담아두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가면 스스로 일을 감당하지 못해 일자리를 잃게 된다.”
해리 왕자는 전우애를 느낄 수 있는 군인 출신들과 만날 때 공감대를 가장 잘 형성한다. 그는 참전용사 병원도 방문했다. 맑고 쌀쌀한 날이었다. 남자 몇 명이 치료 목적의 목공 프로젝트로 기다란 나무 버팀대를 만들며 모닥불 옆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던 참전용사들로 몸의 상처는 대부분 나았지만 우울증, 스트레스, 분노, 불안증, 알코올 중독 등 심리적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해리 왕자는 농담과 소탈한 행동으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는 그들에게 군에서 경험한 전우애와 ‘블랙 유머’가 그립다고 말했다.
그중 한 명인 마이크 데이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류탄 폭발로 척추 골절상과 머리와 몸 전신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당한 저격부대 지휘관 출신이었다. 해리 왕자는 그에게 곧장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의 정신적인 충격으로 지금 어떤 점이 가장 힘드나?”
데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난 더는 내가 아닌 것 같다”고 조용히 말했다.
아주 민감한 순간이었지만 해리 왕자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냥 존재하기보다 매 순간을 철저히 살아가기 위해 자신과 싸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
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에 한 번 이곳에 오는데 아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비서가 다음 약속 장소로 옮겨야 한다고 귀띔하자 해리 왕자는 참전용사들에게 “국가를 위해 훌륭한 일을 했다”며 사기를 북돋워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리 왕자는 나중에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그들과 군복무 경험을 공유한다. 그들에게서 나 자신을 볼 수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자신을 입증하고 뭔가 이룰 기회를 원한다.”
숨겨진 마음의 상처
해리 왕자는 가족에 관해 묻자 할머니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주 비범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어머니 다이애나 왕세자빈은? “유머 감각이 매우 뛰어났고 우리를 재미있게 해주며 보호해주려고 늘 애썼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찰스 왕세자와 새어머니 파커 볼스에 관해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관계가 다이애나 왕세자빈과 윌리엄·해리 왕자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었는지는 이제 세계가 다 안다.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죽음으로 생긴 공백은 가슴에 뚫린 구멍처럼 메워질 수 없었다. 해리 왕자는 정서적으로 기댈 사람 없이 성장했다. 형수 케이트가 어느 정도의 공백을 메워줬다. 그녀와 형 윌리엄 왕세손이 약혼하자 해리는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며 의지했다. 그는 자주 형네 아파트를 찾아갔고 케이트는 그를 위해 직접 요리를 했다(그는 특히 통닭구이를 좋아한다고 알려졌다).
해리와 윌리엄은 형제지만 성격이 판이하다. 한 왕실 소식통은 “정서적으로 두 사람은 아주 다르다”고 말했다. “해리는 외향적인 반면 윌리엄은 내성적이고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두 형제는 자신들이 처한 독특한 위치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읜 경험으로 유대감이 강하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의지하는 사이는 아니다. 윌리엄이 대학을 다닐 때 두 사람은 거의 만나지 않았다.”
해리 왕자와 가까운 다른 소식통도 두 형제 사이에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윌리엄이 공부는 더 잘했다. 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문제에선 해리가 윌리엄과 케이트를 능가한다. 특히 어린이를 다루는 면에서 그렇다. 해리는 아이들을 아주 좋아하고 자연스럽게 대하는 반면 윌리엄이나 케이트는 그와 다르다.” 하지만 윌리엄과 케이트 사이에 아기가 태어난 뒤로 훨씬 나아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해리 왕자는 좀 더 실용적이다. 그는 “손으로 못할 일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군복무가 그에게 잘 맞았던 이유 중 하나다. 2007년 말 해리는 아프가니스탄 헬만드 주에서 전방 항공통제관으로 활동했다. 전투기를 탈레반 표적으로 유도하는 역할이었다. 10주째로 들어섰을 때 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다는 비밀 정보가 언론에 의해 유출됐다. 그는 자신과 소속 부대의 안전 문제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해리는 “무척 분했다”고 말했다. “내겐 군복무가 최고의 피난처였다. 군에 있을 때는 실제로 뭔가를 이루고 있다고 느꼈다.”
2012년 그의 아프가니스탄 복무가 다시 허용됐다. 그는 헬만드 주 캠프 배스티언 기지에서 공격용 아파치 헬기를 몰았다. “그냥 해리 왕자가 되기보다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예를 들어 아파치 헬기 조종 같은 것 말이다. 또 거기에 있을 땐 나도 참전군인으로서 내가 왕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해리 왕자는 2015년 귀국했다. 군생활을 박탈당했다고 느끼고 좌절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곧 좌절감을 딛고 다른 길을 적극 모색했다. 자신의 삶이 왕실의 일원이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다른 의미도 있다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 스스로 뭔가를 빨리 이루고 싶다. 형의 자녀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기 전에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될 것 같다. 그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 앤젤라 레빈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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