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8)
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8)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는 단순한 포털 기업이 아니다. 포털을 바탕으로 고도 산업으로 달려가고 있다. 바이두를 통해 리옌훙 회장은 중국 ‘인터넷 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중국이 발 빠르게 인터넷 경제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인공지능(AI)·자율주행자동차·이미지기술을 비롯한 첨단기술 산업을 육성해 제조업 중심의 경제를 과학기술 중심의 고도 산업으로 전환할 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2030년까지 AI에만 1조 위안(약 168조7500억원) 규모의 초대형 시장으로 키울 계획이다. 이런 야심만만한 산업 고도화 ‘중국몽(中國夢)’의 선두에 서 있는 기업인이 리옌훙(李彦宏·49) 바이두(百度) 회장이다. 바이두의 공동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리 회장은 중국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아선 안 되는 인물이다.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인 바이두는 단순한 포털 기업이 아니다. 포털을 바탕으로 고도 산업으로 달려가고 있다. 지난 8월 포드·다임러 등 50여 개 제휴사와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율주행차 플랫폼인 ‘아폴로 프로젝트 플랫폼’을 결성했다. 바이두는 특히 자율주행 자동차에 필요한 AI 관련 기술 개발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바이두는 이미 중국인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다. 스마트폰의 급속한 보급으로 모바일 정보가 생활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은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 뉴스, 검색, 엔터테인먼트, 클라우드 서비스, 지도 서비스 등 중국에서 모바일과 PC를 활용한 삶은 바이두를 빼고 생각할 수가 없다. 글로벌에서는 구글에 뒤진다고 하지만 중국에서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13억 인구를 바탕으로 사업을 벌이고 있는만큼 중국인의 삶을 지배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사태로 중국이 한국이 등을 돌리기 전까지 한국의 SM엔터테인먼트 등을 통해 한류 콘텐트로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한국과 더욱 가까워질 뻔한 기업인데 아쉽게도 관계가 잠시 소원한 상태다.
중국에서 이동할 때 바이두 지도는 필수품이다. 광활한 중국 땅 구석구석에서 바이두 지도는 국민 교통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해외에서 중국에 온 관광객도 큰 도움을 받는다. 중국에선 세계 최대의 포털사이트 구글이 검열 등의 문제로 철수하고 없기 때문에 구글 검색 서비스와 구글 지도에 의존했던 외국인은 중국 땅에 들어오는 즉시 힘들게 마련이다. 미리 바이두 앱을 깔고 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바이두는 중국 검색 시장에서 그야말로 ‘갑 중의 갑’이다.
중국에선 바이두가 없으면 인터넷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다. 바이두는 중국인의 인터넷 생활을 지배하는 거대한 공룡이기 때문이다. 바이두의 검색엔진은 중국어로 웹사이트와 오디오 파일, 사진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인기 있는 것이 MP3 검색이다. 중국인의 음악 감상에서 바이두가 필수인 이유다. 중국의 인터넷과 저작권 환경이 서구와 다르기 때문에 파일을 공유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바이두의 서비스는 57종이나 된다. 구글이 영어 사용자들의 인터넷 생활을 지배한다면 중국어 사용자의 웹 생활은 바이두가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두의 서비스에는 중국어판 위키피디아로 알려진 바이두 바이커(百度百科)도 포함된다. 위키피디아처럼 사용자들이 서로 협력해 올린 내용으로 구성되는 온라인 백과사전이지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와 달리 일정한 자격 기준을 가진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현재 중국에는 보안상의 이유로 위키피디아가 서비스되지 않는다.) 영어로 가능한 서비스를의 대부분을 중국어로는 바이두를 통해 할 수 있다. 영어권에서 인터넷 사용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구글, 유튜브·페이스북·트위터 등이 중국어로는 바이두에서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바이두에는 토론 포럼이 있어 중국의 여론을 주도하는 역할도 한다. 이런 바이두를 통해 리 회장은 중국 ‘인터넷 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해 왔다. 하지만 리 회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허기를 느껴왔다. 자율주행 자동차와 AI 등 분야에 저돌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이유다. 리 회장의 바이두는 최근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바이두는 지난 8월 21일 중국 은행업감독관리위원회(은감회)로부터 다이렉트 은행 개설 계획을 승인받았다. 다이렉트 은행은 개인과 소기업인을 대상으로 지점 없이 온라인 뱅킹을 통해 예신과 수신은 물론 카드 영업, 방카슈랑스, 은행 간 영업 등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바이두가 중신(中信·CITIC)은행과 손잡고 개설할 ‘ai뱅크(中信百信銀行)’는 6개월 안에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거의 대부분의 금융업을 포괄하게 된다. ai뱅크는 중국에서 독립법인으로 운영되는 첫 다이렉트 은행이다. 자본금 20억 위안(약 3400억원)으로 바이두와 중신은행이 각각 30%와 70%의 지분을 보유한다. 이름부터가 인공지능(AI)을 거꾸로 쓴 것이 눈에 띈다. 바이두는 그동안 AI와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분야에서 축적한 기술을 ai뱅크 운영에 적극 활용해 종합적인 미래형 스마트 뱅크를 만들 방침이다. 인터넷 시대에 걸맞은 개성 있는 금융 서비스를 하겠다는 야심이다. ai뱅크는 모바일 서비스 업체 텐센트(騰迅)가 지분 30%를 보유한 인터넷 은행 위뱅크, 이미 2015년 문을 열어 277만 개 기업에 서비스를 제공해 온 알리바바 산하 마이뱅크 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경쟁을 마다하지 않는 것 또한 리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다.
리 회장은 지난 7월 발표된 포브스의 중화권 10대 부호에 139억 달러의 재산으로 10위를 차지했다. 2011년 1위를 차지하고, 지난해엔 126억 달러로 7위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2000년 검색엔진 업체로 시작해 인터넷과 고도 정보기술(IT) 기업을 거쳐 인공지능(AI)를 비롯한 미래형 첨단기술 업체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리 회장은 잠재력이 가장 강한 중국 기업인으로 봐도 손색이 없다. 중국 정치협상회의 위원이기도 한 리 회장은 부호 순위와 무관하게 중국 기업인 중 간판스타다. 특히 IT ai분야에서 중국에서는 가장 막강한 인물 중 하나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의 마윈(馬雲) 회장과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IT 기업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거대 중국에서 울트라급 기업을 운영하는 그런 그도 시작은 작았다. 2000년 1월18일에 베이징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춘의 낡은 여관방에서 6명의 직원과 함께 문을 열었다. 글로벌 기준으로는 후발 인터넷 기업이다. 하지만 이제는 2016년 12월 기준으로 4만3500명의 직원이 2016년 기준 705억4900만 위안의 매출을 올린 공룡기업으로 성장했다. 2005년 8월 5일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다. 아직은 사업이 글로벌로 뻗지는 못하고 중국 중심에 일본이 추가된 정도다. 2006년 12월 일본에 진출해 2008년 1월 23일부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게 글로벌 사업으로는 고작이다. 회사 이름부터가 다분히 중국 지향적이다. 바이두라는 이름도 중국 남송의 시인 신기질의 시 ‘청옥안·원석(靑玉案·元夕)’에 등장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를 천백 번 찾다가 불현듯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가 등불 아래에 있더라”라는 글의 첫 구절 ‘중리심타천백도(衆里尋他千百度)’에서 따왔다.
리 회장은 중국에서 수재형 해외파 기업인의 대표 주자다. 베이징대에서 전자계산학을 전공하고 미국 버펄로 뉴욕주립대에 유학해 컴퓨터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해외에서는 로빈 리라는 영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는 1968년 산시(山西)성 동부의 양취안(陽泉)시에서 공장 노동자인 부모 사이에서 1남4녀 중 넷째이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공부를 잘해 인구 115만의 도시 양취안의 제1고교를 차석으로 입학했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컴퓨터 수업을 좋아했으며 시 정부에서 개최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다. 1987년 중국의 대입시험인 가오카오(高考)에서 양취안 지역 수석을 차지해 베이징대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컴퓨터공학 박사학위 취득을 목표로 1991년 가을 미국 유학을 떠났지만 1994년 석사학위를 받은 뒤 학업을 중단했다.
대신 그는 직장을 택했다. 대학 시절 일본 기업 마쓰시타의 미주지사에서 인턴생활을 했던 그는 1994년 5월 다우존스의 뉴저지 지사에 해당하는 IDD 인포메이션 서비스에 들어가 1997년 6월까지 일했다. 이 회사에서 그는 월스트리트저널의 온라인판을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검색엔진의 알고리즘 개선을 위한 작업에도 참여했다. IDD에서 일하던 1996년 그는 검색엔진 페이지 순위를 파악할 수 있는 랭크덱스 사이트 순위 알고리즘을 개발해 특허를 얻었다. 그는 나중에 바이두의 검색엔진에 이 기술을 사용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뒤 리는 인포시크라는 검색회사로 옮겨 1997년 7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일했다. 이 회사에 다니면서 사진 검색 기능을 개발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기술 개발로 창업의 터전을 마련한 셈이다.
1998년 그는 『실리콘밸리에서의 비즈니스 전쟁(Business War in Silicon Valley)』이라는 책을 썼다. 실리콘밸리의 비즈니스 형태를 관찰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는 평론가·연구가·저술가에 머물지 않고 직접 창업에 나섰다. 행동하는 기술자인 셈이다. 1999년 말 중국에 돌아온 그는 2000년 1월 베이징대 인근 낡은 여관방에서 6명의 직원과 함께 바이두를 공동 창업했다. 베이징대 학우인 후용(徐勇·영어이름 에릭 후)이 공동창업자였다. 두 사람은 중국 국적으로 미국 유학을 한 뒤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미국 기업을 경험한 뒤 귀국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후용은 1982년 베이징대 생물계에 입학해 1989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록펠러 장학금을 받고 미국 텍사스 A&M대에 유학해 박사학위를 받고 버클리대에서 박사후과정을 마쳤다. 1999년 중국으로 귀국했으며 2000년 리 회장과 함께 바이두를 창업했지만 2004년 회사를 떠났다.
홀로 남은 리 회장은 바이두를 중국 최대의 검색엔진 업체로 키웠다. 바이두는 중국 검색엔진 시장의 최대 80%를 차지하는 공룡으로 성장했으며 단독 업체로는 세계 2위 규모로 컸다. 바이두는 2005년 8월 5일 나스닥에 상장했다. 2007년에는 중국 기업으로는 최초로 나스닥100 지수에 포함됐다. 그해 리 회장은 CNN머니가 매년 발표하는 50대 주목할 만한 인물에 이름을 올렸다. 엔지니어 출신인 리 회장은 비즈니스에서 기술을 유난히 강조한다. 바이두의 성공비결로 ‘기술의 힘’을 들 정도다. 실제로 바이두는 검색창에 언어식별 기술, 이미지 식별 기술 등 다양한 첨단기술을 적용해 중국을 넘어 세계적인 기술 경쟁력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예로 길가에서 발견한 식물의 사진을 찍어 바이두의 이미지 인식을 거치면 식물의 이름은 물론 생물학적 데이터를 곧바로 확보할 수 있다. 리 회장의 희망은 바이두를 글로벌 인터넷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IT강국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애국적인 중국 기업인, 중국 엔지니어들의 보편적인 야심이다. 리 회장은 여기서 더 나아가 바이두를 세계적인 기술 기업으로 진화시킬 꿈도 꾸고 있다. 이를 위해 최근 들어 인공지능에 대거 투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 상반기 미국에 인공지능연구소를 세웠다. 이를 통해 개발한 첨단 인공지능기술로 구글을 넘어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 중이다. 그는 인공지능 분야의 세계적인 학자인 애드루 응을 초빙해 ‘바이두 대뇌’라는 인공지능 개발을 해오고 있다. 바이두의 인공두뇌는 현재 200억 개에 이르는 실험용 신경세포를 바탕으로 2~3세 수준의 인지능력까지 갖췄다. 그는 조만간 이를 10대 청소년의 지능 수준으로 높여 혁명적인 인공지능 인터넷 시스템을 내놓을 계획이다. 바이두와 리 회장 자신도 신경세포의 진화처럼 끝없이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얌전했던 수재가 공격적인 미래형 기업인으로 진화하고 있다.
※ 채인택은…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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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두 서비스 57종 달해
중국에서 이동할 때 바이두 지도는 필수품이다. 광활한 중국 땅 구석구석에서 바이두 지도는 국민 교통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해외에서 중국에 온 관광객도 큰 도움을 받는다. 중국에선 세계 최대의 포털사이트 구글이 검열 등의 문제로 철수하고 없기 때문에 구글 검색 서비스와 구글 지도에 의존했던 외국인은 중국 땅에 들어오는 즉시 힘들게 마련이다. 미리 바이두 앱을 깔고 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바이두는 중국 검색 시장에서 그야말로 ‘갑 중의 갑’이다.
중국에선 바이두가 없으면 인터넷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다. 바이두는 중국인의 인터넷 생활을 지배하는 거대한 공룡이기 때문이다. 바이두의 검색엔진은 중국어로 웹사이트와 오디오 파일, 사진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인기 있는 것이 MP3 검색이다. 중국인의 음악 감상에서 바이두가 필수인 이유다. 중국의 인터넷과 저작권 환경이 서구와 다르기 때문에 파일을 공유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바이두의 서비스는 57종이나 된다. 구글이 영어 사용자들의 인터넷 생활을 지배한다면 중국어 사용자의 웹 생활은 바이두가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두의 서비스에는 중국어판 위키피디아로 알려진 바이두 바이커(百度百科)도 포함된다. 위키피디아처럼 사용자들이 서로 협력해 올린 내용으로 구성되는 온라인 백과사전이지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와 달리 일정한 자격 기준을 가진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현재 중국에는 보안상의 이유로 위키피디아가 서비스되지 않는다.) 영어로 가능한 서비스를의 대부분을 중국어로는 바이두를 통해 할 수 있다. 영어권에서 인터넷 사용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구글, 유튜브·페이스북·트위터 등이 중국어로는 바이두에서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바이두에는 토론 포럼이 있어 중국의 여론을 주도하는 역할도 한다. 이런 바이두를 통해 리 회장은 중국 ‘인터넷 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해 왔다.
자율주행 자동차, AI 분야에 저돌적 진출
리 회장은 지난 7월 발표된 포브스의 중화권 10대 부호에 139억 달러의 재산으로 10위를 차지했다. 2011년 1위를 차지하고, 지난해엔 126억 달러로 7위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2000년 검색엔진 업체로 시작해 인터넷과 고도 정보기술(IT) 기업을 거쳐 인공지능(AI)를 비롯한 미래형 첨단기술 업체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리 회장은 잠재력이 가장 강한 중국 기업인으로 봐도 손색이 없다. 중국 정치협상회의 위원이기도 한 리 회장은 부호 순위와 무관하게 중국 기업인 중 간판스타다. 특히 IT ai분야에서 중국에서는 가장 막강한 인물 중 하나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의 마윈(馬雲) 회장과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IT 기업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베이징 중관춘 낡은 여관방에서 바이두 신화 시작
리 회장은 중국에서 수재형 해외파 기업인의 대표 주자다. 베이징대에서 전자계산학을 전공하고 미국 버펄로 뉴욕주립대에 유학해 컴퓨터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해외에서는 로빈 리라는 영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는 1968년 산시(山西)성 동부의 양취안(陽泉)시에서 공장 노동자인 부모 사이에서 1남4녀 중 넷째이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공부를 잘해 인구 115만의 도시 양취안의 제1고교를 차석으로 입학했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컴퓨터 수업을 좋아했으며 시 정부에서 개최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다. 1987년 중국의 대입시험인 가오카오(高考)에서 양취안 지역 수석을 차지해 베이징대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컴퓨터공학 박사학위 취득을 목표로 1991년 가을 미국 유학을 떠났지만 1994년 석사학위를 받은 뒤 학업을 중단했다.
대신 그는 직장을 택했다. 대학 시절 일본 기업 마쓰시타의 미주지사에서 인턴생활을 했던 그는 1994년 5월 다우존스의 뉴저지 지사에 해당하는 IDD 인포메이션 서비스에 들어가 1997년 6월까지 일했다. 이 회사에서 그는 월스트리트저널의 온라인판을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를 맡았다. 그러면서 검색엔진의 알고리즘 개선을 위한 작업에도 참여했다. IDD에서 일하던 1996년 그는 검색엔진 페이지 순위를 파악할 수 있는 랭크덱스 사이트 순위 알고리즘을 개발해 특허를 얻었다. 그는 나중에 바이두의 검색엔진에 이 기술을 사용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뒤 리는 인포시크라는 검색회사로 옮겨 1997년 7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일했다. 이 회사에 다니면서 사진 검색 기능을 개발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기술 개발로 창업의 터전을 마련한 셈이다.
1998년 그는 『실리콘밸리에서의 비즈니스 전쟁(Business War in Silicon Valley)』이라는 책을 썼다. 실리콘밸리의 비즈니스 형태를 관찰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는 평론가·연구가·저술가에 머물지 않고 직접 창업에 나섰다. 행동하는 기술자인 셈이다. 1999년 말 중국에 돌아온 그는 2000년 1월 베이징대 인근 낡은 여관방에서 6명의 직원과 함께 바이두를 공동 창업했다. 베이징대 학우인 후용(徐勇·영어이름 에릭 후)이 공동창업자였다. 두 사람은 중국 국적으로 미국 유학을 한 뒤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미국 기업을 경험한 뒤 귀국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후용은 1982년 베이징대 생물계에 입학해 1989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록펠러 장학금을 받고 미국 텍사스 A&M대에 유학해 박사학위를 받고 버클리대에서 박사후과정을 마쳤다. 1999년 중국으로 귀국했으며 2000년 리 회장과 함께 바이두를 창업했지만 2004년 회사를 떠났다.
홀로 남은 리 회장은 바이두를 중국 최대의 검색엔진 업체로 키웠다. 바이두는 중국 검색엔진 시장의 최대 80%를 차지하는 공룡으로 성장했으며 단독 업체로는 세계 2위 규모로 컸다. 바이두는 2005년 8월 5일 나스닥에 상장했다. 2007년에는 중국 기업으로는 최초로 나스닥100 지수에 포함됐다. 그해 리 회장은 CNN머니가 매년 발표하는 50대 주목할 만한 인물에 이름을 올렸다. 엔지니어 출신인 리 회장은 비즈니스에서 기술을 유난히 강조한다. 바이두의 성공비결로 ‘기술의 힘’을 들 정도다. 실제로 바이두는 검색창에 언어식별 기술, 이미지 식별 기술 등 다양한 첨단기술을 적용해 중국을 넘어 세계적인 기술 경쟁력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예로 길가에서 발견한 식물의 사진을 찍어 바이두의 이미지 인식을 거치면 식물의 이름은 물론 생물학적 데이터를 곧바로 확보할 수 있다.
미국과 어깨 나란히 하는 IT강국이 꿈
※ 채인택은…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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