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도나우 강변의 숨겨진 작은 보석, 브라티슬라바
[정태남의 TRAVEL & CULTURE] 도나우 강변의 숨겨진 작은 보석, 브라티슬라바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Bratislava)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브라티슬라바 행 기차 편으로 동쪽으로 향한다. 차창에는 오스트리아의 시골 풍경이 펼쳐지다가 국경을 넘기도 전에 멀리서 브라티슬라바 성의 실루엣이 신기루처럼 나타나기 시작한다. 빈을 떠난 기차는 목적지에 1시간 만에 도착한다. 이 정도 거리라면 이 두 도시는 사실 매일 출퇴근이 가능한 일일 생활권 안에 있다는 뜻이다. 사실 두 도시 간의 거리는 약 60km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의 수도와 수도 간의 거리가 이렇게도 가까운 곳이 지구상 어디에 있을까? 오스트리아와 이웃한 슬로바키아는 인구 450만이 넘지 않는 작은 나라이고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인구 45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이다. 이 도시의 핵심에 해당하는 구시가지는 모두 걸어 다녀도 될 정도로 작다. 한때 이곳에서 잠시 체류하던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프레스부르크는 그 자체가 환상적인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가 체류할 때 이곳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도시로 독일식으로는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헝가리식으로는 ‘포조니(Pozsony)’라고 불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와해된 다음 슬로바키아가 체코와 합쳐져 ‘체코슬로바키아’라는 국명으로 독립하면서 도시명은 슬라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브라티슬라바(Bratislava)로 바뀌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브라티슬라바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의 주변 도시였기 때문에 이곳에 세워진 옛 건물은 오스트리아에서 보는 건물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독일어와는 다른 슬라브어 계통의 언어인 슬로바키아어를 쓰고 있으니 엄연히 다른 민족이 사는 나라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브라티슬라바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오랜 기간 공산주의 지배를 거치면서 온통 회색으로 도배된 음울한 도시로 전락해 있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또 슬로바키아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분리된 다음 새로 들어선 민주 정부는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계획하에서 정부는 공산주의 시대에 국가에 몰수되었던 수많은 옛 건물들의 재산권을 거의 10년에 걸쳐 원래의 소유주를 찾아 돌려주고 또 소유주에게는 건물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도록 독려했다. 이리하여 최근 15여 년 사이에 브라티슬라바의 구시가지는 마치 잿더미 속에서 부활한 불사조처럼 옛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하여 천편일률적인 무채색이었다가 화사한 색으로 복원된 옛 건물에는 고급 매장, 고급 레스토랑과 카페 등이 들어섰고, 구시가지의 거리는 보행전용 구역이 되어 활기에 넘치게 되었다. 특히 관광객들이 많은 여름에 이곳을 거닐다 보면 지중해 연안의 도시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까지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새로 태어난 브라티슬라바 구시가지에서 핵심을 이루는 곳은 바로 중앙광장 흘라브네 나메스티에(Hlavne namestie)인데, 이 아담한 크기의 광장에 구석구석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또 최근에는 중심가의 분위기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재미있는 조각상들이 군데군데 세워졌다. 그러니까 브라티슬라바에는 지금도 환상적이 이야기가 쓰여져 가고 있는 것 같다. 구시가지 남서쪽에는 15세기 중반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수수한 성 마르틴 대성당의 첨탑이 하늘을 찌른다. 대성당 앞 길 건너편에는 해발 85m 정도의 바위 언덕이 도나우 강변에 우뚝 솟아 있고 그 정상부는 다소 무뚝뚝한 모습의 브라티슬라바 성이 아크로폴리스처럼 세워져 있다. 이 성은 도나우 강과 브라티슬라바 시가지를 마치 수호신처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성에 오르면 브라티슬라바 시가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서쪽으로는 국경 너머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내려다 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남쪽으로 헝가리 영토도 보인다. 그러니까 이 언덕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의 영토가 만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언덕은 카르파티아 산맥과 알프스 산맥 중간 지점에서 도나우 강을 지켜보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수천 년 동안 중부유럽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이미 기원전 3500년에 이미 이곳에 고대인의 요새가 세워져 있었다. 그후에는 켈트 족의 일파인 보이 족이 이 지역에 거주하다가 로마의 세력이 이곳까지 뻗게 되자 이 언덕은 기원전 9년부터 로마제국의 북동쪽 국경이 되었으며, 기원후 1~4세기에는 로마군이 이곳에 주둔했다. 그러니까 이 언덕이야말로 브라티슬라바의 역사가 시작된 지점인 셈이다.
이러한 유서 깊은 언덕 위에 세워진 브라티슬라바 성의 기원은 9세기 대(大)모라비아 시대의 요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모라비아는 기원후 833년에 건국된 이래로 그 영역이 현재 슬로바키아의 서부 및 북부, 체코의 동부, 폴란드의 남부, 헝가리 서부, 독일 동부의 일부에 이르는 대국으로 발전했었지만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지는 바람에 100년도 못 되어 동방으로부터 건너온 이민족인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903~906년에 멸망하고, 슬로바키아는 마자르족이 세운 나라 헝가리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게 된다. 그후 오스만 튀르크(Osman Türk·터키)가 헝가리를 점령하자 1541년 헝가리는 수도를 브라티슬라바로 옮겼다. 그리하여 약 150년 동안 성 마르틴 대성당에서는 헝가리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으며, 브라티슬라바 성의 모서리에 세워진 4개의 탑 중에서 남동쪽에 있는 가장 큰 탑은 헝가리의 왕관을 보존하는 신성한 곳으로 사용되었다. 그후 헝가리는 유럽에서 오스만 튀르크 세력을 1697년에 몰아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재위 1740~1780)는 자신은 헝가리 귀족들을 존중하여 오스트리아의 빈뿐만 아니라 헝가리가 관할하는 이곳에도 궁전을 갖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 성은 1761년부터 1766년까지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궁전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1811년에 소실된 후 완전히 폐허가 되어 오랜 기간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957년에야 비로소 옛 모습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여 바로크 양식으로(부분적으로는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탄생했다. 그리고 오랜 복원작업이 완전히 끝난 2010년 6월 6일에는 성 입구에 대모라비아의 영토를 역사상 최대로 넓힌 왕 스바토플룩 1세(846~894)의 기마상이 제막되었다. 이 기마상은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오다가 1993년에야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룩한 슬로바키아인들을 결속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 이 성은 현재 슬로바키아 의회의 일부와 슬로바키아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성은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에스엔페(SNP) 다리와 묘하고도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다리는 고풍스러운 도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아주 파격적이고 특이한 디자인의 비대칭형이다. 경사진 교각에 연결된 케이블로 지탱되는 특이한 구조의 이 다리는 공산주의 시대이던 1970년대에 세워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 형태가 매우 미래지향적이다. 이 다리는 주변의 다른 다리들과는 달리 마치 발을 도나우강에 담그기가 싫은 듯 다리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물에 박은 교각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어떻게 보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마디로 이 다리의 특징은 과감한 구조와 날렵한 디자인이 놀라울 정도로 일체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다리가 지닌 또 하나의 매력이라면 주탑 위 85m 높이에 설치된 전망 레스토랑과 테라스인데 마치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비행접시가 다리 위에 내려앉은 것처럼 보여서 주탑은 ‘UFO 타워’라고 불린다.
이곳에서는 브라티슬라바 시가지와 도나우 강의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는데 특히 도나우 강 유역에 어둠이 깔릴 때 이 다리에서 바라본 야간 조명을 받은 브라티슬라바 성은 마치 등불처럼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미래를 꿈꾸는 슬로바키아 사람들의 자긍심을 비추는 등불이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슬로바키아가 현재 유럽 여러 나라들 중에서 외국인 투자환경이 가장 좋은 나라 중의 하나이자,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힌다는 사실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내고 있는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및 옛 건축 복원 전문가들과 오랜 기간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오페라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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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모습으로 부활한 브라티슬라바
브라티슬라바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오랜 기간 공산주의 지배를 거치면서 온통 회색으로 도배된 음울한 도시로 전락해 있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또 슬로바키아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분리된 다음 새로 들어선 민주 정부는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계획하에서 정부는 공산주의 시대에 국가에 몰수되었던 수많은 옛 건물들의 재산권을 거의 10년에 걸쳐 원래의 소유주를 찾아 돌려주고 또 소유주에게는 건물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도록 독려했다. 이리하여 최근 15여 년 사이에 브라티슬라바의 구시가지는 마치 잿더미 속에서 부활한 불사조처럼 옛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하여 천편일률적인 무채색이었다가 화사한 색으로 복원된 옛 건물에는 고급 매장, 고급 레스토랑과 카페 등이 들어섰고, 구시가지의 거리는 보행전용 구역이 되어 활기에 넘치게 되었다. 특히 관광객들이 많은 여름에 이곳을 거닐다 보면 지중해 연안의 도시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까지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새로 태어난 브라티슬라바 구시가지에서 핵심을 이루는 곳은 바로 중앙광장 흘라브네 나메스티에(Hlavne namestie)인데, 이 아담한 크기의 광장에 구석구석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또 최근에는 중심가의 분위기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재미있는 조각상들이 군데군데 세워졌다. 그러니까 브라티슬라바에는 지금도 환상적이 이야기가 쓰여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슬로바키아의 역사를 증언하는 브라티슬라바 성
이 성에 오르면 브라티슬라바 시가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서쪽으로는 국경 너머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내려다 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남쪽으로 헝가리 영토도 보인다. 그러니까 이 언덕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헝가리의 영토가 만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언덕은 카르파티아 산맥과 알프스 산맥 중간 지점에서 도나우 강을 지켜보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수천 년 동안 중부유럽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이미 기원전 3500년에 이미 이곳에 고대인의 요새가 세워져 있었다. 그후에는 켈트 족의 일파인 보이 족이 이 지역에 거주하다가 로마의 세력이 이곳까지 뻗게 되자 이 언덕은 기원전 9년부터 로마제국의 북동쪽 국경이 되었으며, 기원후 1~4세기에는 로마군이 이곳에 주둔했다. 그러니까 이 언덕이야말로 브라티슬라바의 역사가 시작된 지점인 셈이다.
이러한 유서 깊은 언덕 위에 세워진 브라티슬라바 성의 기원은 9세기 대(大)모라비아 시대의 요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모라비아는 기원후 833년에 건국된 이래로 그 영역이 현재 슬로바키아의 서부 및 북부, 체코의 동부, 폴란드의 남부, 헝가리 서부, 독일 동부의 일부에 이르는 대국으로 발전했었지만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쇠약해지는 바람에 100년도 못 되어 동방으로부터 건너온 이민족인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903~906년에 멸망하고, 슬로바키아는 마자르족이 세운 나라 헝가리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게 된다. 그후 오스만 튀르크(Osman Türk·터키)가 헝가리를 점령하자 1541년 헝가리는 수도를 브라티슬라바로 옮겼다. 그리하여 약 150년 동안 성 마르틴 대성당에서는 헝가리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으며, 브라티슬라바 성의 모서리에 세워진 4개의 탑 중에서 남동쪽에 있는 가장 큰 탑은 헝가리의 왕관을 보존하는 신성한 곳으로 사용되었다. 그후 헝가리는 유럽에서 오스만 튀르크 세력을 1697년에 몰아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재위 1740~1780)는 자신은 헝가리 귀족들을 존중하여 오스트리아의 빈뿐만 아니라 헝가리가 관할하는 이곳에도 궁전을 갖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 성은 1761년부터 1766년까지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궁전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1811년에 소실된 후 완전히 폐허가 되어 오랜 기간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957년에야 비로소 옛 모습으로 복원되기 시작하여 바로크 양식으로(부분적으로는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으로) 다시 탄생했다. 그리고 오랜 복원작업이 완전히 끝난 2010년 6월 6일에는 성 입구에 대모라비아의 영토를 역사상 최대로 넓힌 왕 스바토플룩 1세(846~894)의 기마상이 제막되었다. 이 기마상은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오다가 1993년에야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룩한 슬로바키아인들을 결속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으리라. 이 성은 현재 슬로바키아 의회의 일부와 슬로바키아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브라티슬라바의 명소 에스엔페(SNP) 다리
이곳에서는 브라티슬라바 시가지와 도나우 강의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는데 특히 도나우 강 유역에 어둠이 깔릴 때 이 다리에서 바라본 야간 조명을 받은 브라티슬라바 성은 마치 등불처럼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미래를 꿈꾸는 슬로바키아 사람들의 자긍심을 비추는 등불이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슬로바키아가 현재 유럽 여러 나라들 중에서 외국인 투자환경이 가장 좋은 나라 중의 하나이자,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힌다는 사실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내고 있는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및 옛 건축 복원 전문가들과 오랜 기간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오페라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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