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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개발 ‘실험실에서 컴퓨터로’

신약개발 ‘실험실에서 컴퓨터로’

인터넷 검색 알고리즘과 기계학습 이용하면 알츠하이머 등의 치료제 더 빠르고 저렴하게 개발할 수 있어
앨리스 장은 신약개발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 직접 회사를 세웠다. / 사진:TWITTER
미국의 생명공학 스타트업 버지 지노믹스(Verge Genomics)를 공동창업한 앨리스 장 CEO에 따르면 불치의 신경질환 치료제 개발에 인터넷 검색 알고리즘 기술이 큰 도움이 된다. 더구나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버지 지노믹스는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실험실에서 이뤄지는 신약개발 작업을 완전히 구식으로 만들 수도 있다. 장 CEO는 “지금 우리 회사는 신약개발의 무대를 실험실에서 컴퓨터로 옮기는 중”이라고 말했다.

요즘 대형 제약사에서 개발되는 대다수 신약은 장장 10~15년이 걸리며 약 20억 달러의 비용이 들어가는 오래고 힘든 실험실 연구와 임상시험을 거친다. 버지 지노믹스는 그런 아날로그 과정을 어떻게 디지털화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무엇이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될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우리는 잘 안다. 원가가 계속 떨어지고 공급 물량은 크게 늘어난다. 예를 들어 과거 우리는 음악이 듣고 싶으면 12달러나 주고 레코드 판을 구입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포티파이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면 거의 무료로 어떤 음악이든 편리하게 들을 수 있다. 버지 지노믹스는 제약 분야도 그와 비슷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장담한다. 그 약속이 이뤄진다면 시장에 쏟아지는 많은 신약을 지금 우리가 지불하는 터무니없는 가격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저가로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버지 지노믹스는 창업할 때부터 스타트업 세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특히 28세로 박사 과정에서 도중하차한 뒤 회사를 세운 여성 CEO인 앨리스 장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녀는 AI를 이용해 수백여 개의 유전자 간 네트워크를 분석함으로써 불치병이었던 신경 퇴행성 질환의 치료제 개발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겠다고 다짐했다. “캘리포니아대학(LA 캠퍼스, UCLA)에서 신경과학 박사 과정을 밟던 중 제약업계에서 신경질환을 치료하는 신약개발이 그토록 오래 걸린다는 사실에 좌절하면서 그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 직접 회사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언론으로선 군침 도는 기삿거리였다.

그녀에 따르면 대개 신약개발자들은 알츠하이머나 파킨슨 같은 질병의 발현을 차단하는 열쇠를 찾기 위해 한 번에 유전자 하나씩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질병은 유전자의 복잡한 네트워크 안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으로 발생한다. 지금으로선 그런 네트워크를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 장 CEO는 박사 과정 프로그램에서 문제 있는 유전자의 그런 네트워크를 찾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구글의 검색엔진에 사용되는 알고리즘에서 영감을 얻은 접근법이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키워드, 웹사이트, 사용자 활동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십억 건의 연결을 조사하는 방식이다.

장 CEO는 처음엔 UCLA에서 부상 후 신경의 재생을 도울 수 있는 유전자 네트워크를 찾는 데 그 기술을 사용했다. 쥐가 크게 다친 다리를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화합물을 발견한 것이 그녀의 첫 성공이었다. 그 쥐의 회복은 자연 치유 과정보다 4배나 빨랐다. 장 CEO는 “다른 연구자들은 수천 가지의 약을 사용해봤지만 회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효과 있는 약을 신속히 찾아낼 수 있었다.

장 CEO는 어려서부터 사회운동가의 사고방식 속에서 성장했다[그녀의 아버지는 1970년대 중국에서 ‘민주 벽 운동’(대자보를 통해 사회 문제의 불만을 표출한 운동)을 하다가 1980년대 미국으로 탈출했다]. 박사 학위 논문을 써봤자 소수의 과학자들만 읽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파급효과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자신의 연구를 상업화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졸업을 세 달 앞두고 학교를 떠났다. 부모님이 진노했다.” 그녀는 의공학자인 제이슨 천과 함께 버지 지노믹스를 창업했다. 두 사람은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와이 컴비네이터’에 사무실을 얻었다.

2015년 버지 지노믹스는 창업투자금 400만 달러를 확보하고 신경과학자와 컴퓨터과학자들로 팀을 꾸렸다. 그들의 임무는 신경질환과 관련된 유전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정교한 AI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네트워크 분석이 끝나자 그들은 버지 지노믹스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기존의 약 중에서 네트워크에 속한 모든 유전자를 일괄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찾았다. 질병의 발현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사람이 단일 실험을 실시하는 데 걸리는 시간 안에 잠재적인 치료제 수백만 건을 찾아낼 수 있다.모든 AI가 그렇듯이 버지 지노믹스의 기술에서도 AI가 학습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근년 들어 저렴하고 편리해진 유전자 검사 덕분에 그런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예를 들어 컬러 지노믹스는 99달러에 특정 암의 발병 위험을 확인하는 유전자 검사 서비스를 제공한다. 2001년만해도 유전체 하나의 염기서열을 확인하는 데 든 비용은 약 1억 달러였다. 버지 지노믹스는 자체 AI를 학습시킬 방대한 유전자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해 지난해 9월 컬럼비아대학 등 4개 대학과 제휴했고, 11월엔 미국 국가보건원(NIH), 스크립스 연구소, 독일 드레스덴공과대학과 손잡았다.

신약개발을 위한 AI 기반 접근법을 발전시키면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신속히 개발할 수 있다. / 사진:GETTY IMAGES BANK
장 CEO는 버지 지노믹스가 루게릭병 치료제를 5년 안에 임상시험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현재로선 루게릭병을 치료하는 약이 없다. 그녀는 “먼저 하나의 질병 치료제를 개발하고 나면 그 다음은 아주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버지 지노믹스를 비롯한 신생 제약사들이 신약개발을 위한 AI 기반 접근법을 발전시키면 알츠하이머 같은 신경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새로운 약이 빨리 등장할 수 있으리라 예상된다. “우리 소프트웨어 플랫폼은 획기적인 약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 CEO는 말했다.

AI를 이용한 신약개발에 뛰어든 회사는 버지 지노믹스 외에도 많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AI 연구자들이 설립한 에이텀와이즈는 600만 달러의 창업투자금을 확보한 뒤 스탠퍼드대학·IBM·머크 등의 연구소·회사 20여 곳과 제휴했다. 에이텀와이즈의 기술은 기계학습을 사용해 잠재적인 치료제 분자가 신체 내부의 표적 분자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결합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실험실에서 실제 테스트하기 전에 약의 효과를 예측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그런 기술은 효과적인 치료제를 발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

IBM 연구자들은 기존 치료제의 부작용에서 나타나는 패턴을 확인하는 AI 도구를 개발하는 중이다. 이를 통해 그 약이 원래의 표적 외에 치료할 수 있는 다른 질병이 무엇인지 추정할 수 있다. ID 지노믹스는 박테리아 종류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 항생제가 어느 것인지 예측하기 위해 기계학습을 사용한다. 최적의 항생제를 찾으면 환자가 더 적은 약으로 더 빨리 회복할 수 있다.

장 CEO는 머지않아 소프트웨어와 컴퓨팅으로 무장한 신세대 업체들이 제약업계에서 급부상할 것으로 내다본다. 모건스탠리의 최신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신약개발을 디지털화할 경우 승인되는 치료제 하나 당 평균 약 3억3000만 달러의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보고서의 공동 저자인 리키 골드워서는 대형 제약사도 결국은 이런 추세에 합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으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구시대 공룡 신세로 쇠락할 게 뻔하다는 뜻이다.

치료제 가격이 하락하면 소비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더구나 미국인 550만 명이 시달리는 알츠하이머병 같은 불치의 신경질환과 싸우는 데 AI가 결정적인 무기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건 가격 인하보다 훨씬 더 큰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인터넷 검색 기술이 그렇게 활용될 경우 앞으로 ‘내 열쇠가 어디 있지?’ 같은 질문에 구글이 답해주기를 기대하는 건 너무 시시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 케빈 메이니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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