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와 의사봉(議事棒)
CEO와 의사봉(議事棒)
검은 법복을 차려 입은 판사가 심판대에 앉아 근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땅땅땅.” 법정 드라마에서 자주 나올 법한 상황인데, 대부분 억울한 누명을 쓴 주인공이 피고가 되어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무죄를 선고받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여기서 퀴즈 하나. 위 상황의 옥에 티는? 정답은 ‘땅땅땅’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현재 우리 법원에서는 나무망치를 세 번 내리쳐 판결 종료를 알리는 의사봉(법정에서는 ‘법봉’이라고 한다)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1960년대 이후로 사법부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자는 취지에 따라 이 과정을 폐기해 버렸기 때문이다. 얼마 전 겪었던 탄핵정국에서도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을 때는 정세균 의장이 의사봉을 들었지만,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 때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의 책상 위에는 나무망치가 없었다.
의사봉은 의장이 회의를 진행할 때 사용하는 도구다. 국회 등 의결기관의 의장이 개최·개의·산회 등을 선언할 때 이를 두드려 시점을 알리고 안건의 가결과 부결을 알릴 때도 쓴다. 또 회의장이 소란해 회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킬 때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의사봉은 보통 세 번 내려친다. 사실 의사봉은 법적 효력이 전혀 없다. 그래서 한 번을 치거나 두 번을 치거나 아니 심지어 의사봉을 치지 않아도 회의 진행이나 안건의 성립, 결과 선포에 문제가 되는 일은 없다. 예전 뉴스에서 가끔 보이던 국회의 다이내믹한 풍경들. 국회의원들이 법안 날치기 통과를 막기 위해 의사봉을 감추어놓거나 의사봉을 내리치는 의장을 향해 돌진해 이를 빼앗으려는 모습은 그저 강력한 반대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였던 것이다. 의사봉은 영어로 ‘개블(gavel)’이라고 하는데 ‘회의의 시작부터 종료까지의 기간, 즉 회기(會期)’를 나타내는 표현은 ‘개블 투 개블(gavel to gavel)’로 쓰고 있다.
의사봉은 상장기업의 CEO와도 관련이 있다. 모든 경영자는 해마다 봄이 되면 이 의사봉을 잡고 수 십 번을 내리쳐야만 하는 날을 맞이한다. 주주총회 이야기다. 필자도 얼마 전 열린 ‘수퍼 주총 데이’ 때 의장을 맡아 의사봉을 잡았다. 10년 넘게 하고 있는 일인데도, 이 나무망치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 건지 의사봉만 잡으면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며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말을 끝내자마자 두드리는 것이 좋을까? 한 1초 후에 두드릴까? 간격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연이어 치면 너무 급하게 보여 날치기 통과를 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여유를 두면 좀 권위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강도는 얼마나 세게 해야 하나? 살살 치면 소심하게 보이고 너무 세면 오버스러운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런 고민 속에서 개회와 정족수 확인, 안건 상정과 통과, 폐회까지 총 24번의 망치질을 마쳤다. 올해도 참관했던 이에게 물어보니 역시 망치질의 스피드가 일관성이 없었나 보다. 개회와 정족수 확인, 첫 번째 안건 통과 때까지는 빠르게 두드리다가 몇 개의 안건이 통과되고 나서는 다시 여유를 찾더란다.
세상 시름을 다 짊어진 경영자의 고민이란 것이 의사봉을 두드리는 템포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연초에 페이스가 엉키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혼선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평정심인데 이것이 쉽지는 않다. 이렇게 고심하다가 반기가 지나고 실적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이 확인이 되면, 그때서야 여유를 찾고 다음 해를 고민하게 된다.
얼마나 더 주총의 의장을 맡아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의사봉을 두드릴 수 있을까? 정말 마음 편하게 나무망치를 두드릴 수 있는 날은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하게 되는 순간과 동시에 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세상 모든 CEO의 마음 편한 망치질을 응원한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의사봉은 의장이 회의를 진행할 때 사용하는 도구다. 국회 등 의결기관의 의장이 개최·개의·산회 등을 선언할 때 이를 두드려 시점을 알리고 안건의 가결과 부결을 알릴 때도 쓴다. 또 회의장이 소란해 회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킬 때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의사봉은 보통 세 번 내려친다. 사실 의사봉은 법적 효력이 전혀 없다. 그래서 한 번을 치거나 두 번을 치거나 아니 심지어 의사봉을 치지 않아도 회의 진행이나 안건의 성립, 결과 선포에 문제가 되는 일은 없다. 예전 뉴스에서 가끔 보이던 국회의 다이내믹한 풍경들. 국회의원들이 법안 날치기 통과를 막기 위해 의사봉을 감추어놓거나 의사봉을 내리치는 의장을 향해 돌진해 이를 빼앗으려는 모습은 그저 강력한 반대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였던 것이다. 의사봉은 영어로 ‘개블(gavel)’이라고 하는데 ‘회의의 시작부터 종료까지의 기간, 즉 회기(會期)’를 나타내는 표현은 ‘개블 투 개블(gavel to gavel)’로 쓰고 있다.
의사봉은 상장기업의 CEO와도 관련이 있다. 모든 경영자는 해마다 봄이 되면 이 의사봉을 잡고 수 십 번을 내리쳐야만 하는 날을 맞이한다. 주주총회 이야기다. 필자도 얼마 전 열린 ‘수퍼 주총 데이’ 때 의장을 맡아 의사봉을 잡았다. 10년 넘게 하고 있는 일인데도, 이 나무망치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 건지 의사봉만 잡으면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며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말을 끝내자마자 두드리는 것이 좋을까? 한 1초 후에 두드릴까? 간격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연이어 치면 너무 급하게 보여 날치기 통과를 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여유를 두면 좀 권위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강도는 얼마나 세게 해야 하나? 살살 치면 소심하게 보이고 너무 세면 오버스러운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런 고민 속에서 개회와 정족수 확인, 안건 상정과 통과, 폐회까지 총 24번의 망치질을 마쳤다. 올해도 참관했던 이에게 물어보니 역시 망치질의 스피드가 일관성이 없었나 보다. 개회와 정족수 확인, 첫 번째 안건 통과 때까지는 빠르게 두드리다가 몇 개의 안건이 통과되고 나서는 다시 여유를 찾더란다.
세상 시름을 다 짊어진 경영자의 고민이란 것이 의사봉을 두드리는 템포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연초에 페이스가 엉키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혼선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평정심인데 이것이 쉽지는 않다. 이렇게 고심하다가 반기가 지나고 실적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이 확인이 되면, 그때서야 여유를 찾고 다음 해를 고민하게 된다.
얼마나 더 주총의 의장을 맡아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의사봉을 두드릴 수 있을까? 정말 마음 편하게 나무망치를 두드릴 수 있는 날은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하게 되는 순간과 동시에 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세상 모든 CEO의 마음 편한 망치질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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