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란 핵협정 탈퇴와 제재 재개로 국제시장의 유가 치솟으면서 푸틴 대통령만 이득 봐 러시아도 유가를 떠받치기 위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 정책에 동참했다. 사진은 우신스크 부근의 유전. / 사진:AP-NEWSIS지난 5월 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이 핵합의를 어겼다며 관련 협정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단일 국가를 대상으로 한 최고 수준의 제재”를 재부과하겠다고 다짐했다. 제재의 가장 큰 표적 중 하나가 호황을 누리는 이란의 유전이다. 하루 4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해 유럽과 아시아에 연료를 공급하는 이란의 거대한 경제 엔진이다. 미국이 경제제재를 재개하면 오는 11월부터 이란산 원유 수입국은 6개월마다 전반기 수입량의 20%를 줄여야 한다.
이란 제재의 재개로 이란과 다른 국가들은 이처럼 심각한 상황을 크게 우려하지만 한 국가는 쾌재를 불렀다. 러시아다. 왜 러시아만 이런 상황을 그렇게 좋아할까? 간단히 말해 수요와 공급의 법칙 때문이다. 오는 11월 새로운 제재가 전면 시행되면 국제시장에서 이란이 생산하는 원유가 하루 100만 배럴 정도 사라지게 된다. 그처럼 공급이 줄어들면 가격이 뛸 수밖에 없다.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에너지 수출국이다. 석유와 천연가스가 러시아 수출의 약 50%를 차지한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유가 하락으로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 예산 적자가 불어나면서 러시아는 긴축 정책으로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제재 재개가 역설적으로 그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석유 분석가 알렉세이 가브리로프는 “우리에게 뜻밖의 선물을 안겨준 트럼프에게 고마워 해야 한다”며 “이란의 손실은 고스란히 러시아의 이득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선 뜻밖의 행운이다. 그에겐 유가 상승이 새로 얻은 ‘정치 생명선’이다. 지난 5월 7일 푸틴 대통령은 크렘린궁에서 취임식을 갖고 네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그 자리에 참석한 정치 엘리트들에게 “러시아는 독자적인 발전 의제를 만들어 어떤 장애물이나 상황의 개입을 받지 않고 오직 우리만이 우리 미래를 결정토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막후에서 그는 예산 적자를 메우기 위해 1250억 달러의 적립준비금을 급속히 소진하고 있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분리주의 반군을 지원하자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러시아에 첫 제재를 부과했다. 미국인 또는 미국 정부가 지분의 50% 이상을 소유한 기업에 대해 금융 거래를 금지하는 ‘특별지정 제재대상국’ 조치와 특정 분야 기업에 대해 모든 거래를 금지하는 ‘특정분야 제재’가 시작됐다. 이 조치로 러시아의 금융기관과 에너지 기업, 방산 기업 등은 국제금융시장에서 미국과의 모든 거래가 제한됐다. 그 이래 러시아 루블화의 가치는 반토막 났고 인플레이션이 두 자릿수로 치솟았다. 러시아 재벌들은 국제금융에서 배제됐다. 게다가 국제 유가의 하락이 러시아의 재정을 더 강하게 압박했다(유가는 최고 정점을 이뤘던 배럴당 110달러 이상에서 2014년 3~6월 30달러로 떨어졌다). 그런 손실을 메우고 국방·사회 지출을 유지하기 위해 푸틴 대통령은 석유 호황기에 크렘린이 비축해둔 준비금을 풀기 시작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미국·유럽과 장기적인 ‘의지력 싸움’을 벌인다고 믿는다. / 사진:XINHUA-NEWSIS그러나 지난 1월 러시아 재무부는 금고가 거의 비었다고 선언했다. 적립준비금이 170억 달러로 줄어들어 곧 완전히 소진될 것이라는 발표였다. 크렘린은 퇴직 정년을 여성 55세, 남성 60세에서 모두 65세로 상향 조정하는 내용의 연금 시스템 개혁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을 고려하면 지지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한 사안이었다.
그로써 푸틴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대로 러시아를 이끌어가고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능력은 오로지 유가에 달렸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났다. 이제 유가가 급등하면서(5월 23일 기준으로 원유 가격이 배럴당 80달러로 3년 반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크렘린이 더욱 대담해져 우크라이나와 시리아 사태 개입을 자제할 이유가 없어진다고 내다본다. 지난 4년 동안 세입이 줄어들었지만 푸틴 대통령은 국방비 지출을 러시아 국내총생산(GDP)의 5%로 늘렸다(그에 비해 나토는 회원국에 GDP의 2%를 국방비로 할당할 것을 요구하지만 대다수는 그보다 훨씬 적게 지출한다).
영국 런던 소재 블루베이 에셋 매니지먼트의 선임 전략가 티머시 애시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미국·유럽과 ‘장기적인 의지력 싸움’을 벌인다고 믿는다. 그는 “유가 상승이 서방과의 그런 싸움에서 더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이란 제재 재개가 유가 상승을 지속시킬 수 있다고 분석가들은 판단한다.
이란 제재를 재개한다는 소식은 세계 석유 매장량의 47%를 가진 중동 전역을 긴장시켰다. 남미에선 또 다른 주요 산유국인 베네수엘라가 비틀거린다. 미국 정부는 5월 20일 치러진 베네수엘라 대선을 부정선거라고 비난하면서 베네수엘라 석유회사들을 상대로 제재를 발표했다. 곧 더 강한 제재가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더 많은 양의 원유가 국제시장에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오는 11월 제재가 전면 시행되면 국제시장에서 이란이 생산하는 원유가 하루 100만 배럴 정도 사라지게 된다. / 사진:XINHUA-NEWSIS한편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지난 2년 동안 점진적인 유가 부양을 위해 공급을 3% 줄이는 감산에 합의했다. 2016년엔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재로 러시아도 OPEC의 감산 정책에 동참해 하루 30만 배럴씩 생산을 줄였다. 프랑스 석유 대기업 토탈의 CEO 파트릭 푸야네는 앞으로 몇 달 안에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지난 5월 말 석유업계 지도자들 앞에서 “우린 또 다시 지정학이 석유시장을 지배하는 세계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유가가 러시아에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러시아 경제는 원유에 의존하지만 유가가 지나치게 높으면 석유보다 더 효율적이고 비용이 적게 드는 전기 엔진과 배터리에 대한 투자가 촉진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러시아 석유산업의 최대 전략적 경쟁 대상인 미국의 셰일가스 생산을 촉진할 수도 있다. 런던 소재 컨설팅업체 매크로 어드바이저리의 크리스 위퍼 분석가는 “러시아로선 유가의 적정선이 배럴당 50~55달러 정도”라고 말했다. 크렘린의 예산 균형을 맞추기에 충분할 정도로 높으면서도 대체 에너지원이나 기술에 대한 투자를 촉발하지 않을 정도인 수준을 뜻한다. 그래야 러시아의 장기적인 미래가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란 제제 재개로 유가가 오르면서 재미를 톡톡히 보는 상황에서도 다른 유럽국들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핵협정 탈퇴에 반대하고 나섰다. 셰일 석유·가스가 부채질하는 걷잡을 수 없는 과열-거품붕괴 주기가 올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낳은 역설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미국이 이란 핵합의를 파기함으로써 “국제법을 짓밟았다”고 비난했다. 거기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이란 석유산업에 대한 러시아의 대규모 투자가 타격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이란의 천연가스 매장지 개발 프로젝트만이 아니라 이란에서 시리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 회랑 건설 계획에도 거액을 투자했다.
그러나 현재 유가가 배럴당 80달러에 이르면서 러시아의 단기적인 미래는 밝아보인다. 러시아는 연방 예산균형을 맞추는 데 필요한 것보다 월 100억 달러를 더 벌어들일 것이다. 다국적 투자사 골드먼삭스는 올해의 러시아 경제성장률을 3.3%로 예측했다. EU와 미국보다 높다. 러시아의 올해 첫 분기 인플레이션도 2%로 떨어졌다. 러시아 해커들이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한 데 대해 최근 미국이 또 다시 크렘린을 응징하기 위한 새로운 제재를 부과했는데도 러시아 경제가 단기적으로 살아나는 상황이다.
푸틴 대통령은 “스파시보!”라고 말할 뿐이다. 러시아어로 ‘고맙다’는 뜻이다.
- 오웬 매튜스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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