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말 카슈끄지 죽음의 배경은] 사우디 왕실 권력다툼의 희생양?
[자말 카슈끄지 죽음의 배경은] 사우디 왕실 권력다툼의 희생양?
카슈끄지, 실권한 왕실 인사들과 잇단 인연…중세시대 가치관에 머문 사우디 왕가의 민낯 이른바 ‘카슈끄지 사건’이 중동 산유국이자 전제군주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사우디 국적의 언론인인 자말 카슈끄지(60)는 지난 10월 2일 터키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총영사관에 걸어 들어갔다가 영영 나오지 못했다. 미국에 머물던 그는 터키인 약혼녀와의 결혼을 위한 서류를 떼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카슈끄지는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33) 왕세자가 주도하는 왕실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그는 터키 경찰의 조사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훼손된 신체 부분도 발견됐다. 첫 결혼에서 얻은 2남2녀와 약혼녀인 하티제 젠기즈를 유족으로 남겼다. 1958년 사우디에서 태어난 카슈끄지는 여러 아랍어 매체에서 언론인으로 일했으며, 최근에는 미국 워싱턴포스트 오피니언란에 글을 기고해왔다. 카슈끄지의 실종과 사망 사건은 의혹투성이였다. 그가 10월 2일 이스탄불의 사우디 총영사관에 들어갔다가 연락이 두절된 이후 침묵으로 일관하던 사우디 당국은 처음에는 그의 죽음이 ‘사고’였다고 주장했다. 사우디 검찰은 카슈끄지가 총영사관 내부에서 사우디에서 파견된 정보요원들과 말다툼을 벌이다 주먹싸움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사망했다고 10월 20일 발표했다. 계획된 살인이 아니고 과실치사라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사우디 검찰은 용의자나 관련자 18명을 구금해 조사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 발표에 대해 국제사회는 믿을 수 없으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사우디 검찰은 10월 25일 “카슈끄지가 당한 일은 정황상 용의자들이 미리 계획해 의도적으로 벌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격적으로 말을 바꿨다. 사우디 국영 SPA통신에 따르면 사우디 검찰은 이를 발표하면서 “이번 사건과 관련해 터키와 합동실무조사단을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터키 측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근거로 들었다. 주목할 점은 아델 알주바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의 10월 21일 발언이다. 그는 이날 미국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용의자 중 누구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가까운 관계가 아니며 이들은 독단적으로 일을 벌였다”라고 강조했다. 사건의 불똥이 왕세자에게 번지지 않도록 ‘꼬리 자르기’에 나선 분위기다.
사우디의 발표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10월 23일 수도 앙카라에서 열린 집권여당 정의개발당의 의원 총회에서 카슈끄지가 계획적으로 살해됐다고 발언한 지 이틀 만에 이뤄졌다. 터키가 증거와 정황을 들이대며 압박을 가하자 사우디가 어쩔 수 없이 발표한 분위기가 역력해 보인다. 미국의 지나 해스펠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10월 22일 터키를 방문했으며 24일에는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해스펠 국장이 카슈끄지가 고문 당하고 살해되는 순간의 녹음을 들었다”라고 보도했다. 사우디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카슈끄지 살해 증거가 있다는 이야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사우디의 무함마드 왕세자는 10월 24일 에르도안 대통령과 통화했으며 그 후 사실상 정부가 통제하는 터키의 매체들은 무함마드 왕세자에 대한 의혹 보도를 자제하고 있다. 미국과 사우디의 힘이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카슈끄지 사건의 본질은 단순한 살인이나 절대왕정이 언론 자유를 주장하는 비판적 언론인의 입을 막으려고 제거한 수준을 넘어선다. 사건의 뒤에는 사우디 왕실 내부에서 벌어져온 거대한 음모와 원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카슈끄지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체제에 원한을 지닌 왕실 야당 인사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해왔다. 왕실 야당 인사들은 무함마드 빈 살만 때문에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밀려난 것은 물론 권력에서도 소외돼왔다. 카슈끄지가 언론인과 정보기관장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모신 사우디 왕족들은 한결같이 왕실 내 야당 인사였다. 이는 이번 사건의 본질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로 보인다.
우선 그의 경력을 살펴보자.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 본부가 있는 범아랍권 방송 채널인 알자지라 웹사이트에 따르면 카슈끄지는 사우디는 물론 아랍 여러 곳에서 아랍어로 기사를 써 왔다. 경력이 거의 30년이나 되는 언론인이자 정치 해설가였다. 카슈끄지는 한때 사우디 왕실의 이너서클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사우디의 중동과 국내 정치에 대한 비판의 지평을 넓히면서 왕실 핵심 인사들 사이에서 개혁주의자로 이름을 얻었다. 카슈끄지는 미국 인디아나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으며 공부를 마친 후 사우디의 영어 신문인 ‘사우디 가제트’의 미국 현지 특파원으로 기자 경력을 시작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는 영국 런던에 본사가 있는 사우디 정부 소유 일간지인 ‘아샤르크 알아우사트’에서 일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범아랍 일간지인 ‘알하야트’에도 8년 간 기사를 실었다. 알하야트는 20만 부를 발행하는 아랍어권 최대 신문으로 사우디 왕족인 할레드 빈 술탄 왕자가 소유하고 있다. 할레드는 사우디 국방차관 출신이다.
카슈끄지가 모셨던 할레드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할레드의 부친인 술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1924~2011년)는 비운의 인물이다. 2005년 왕세제(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아우)에 올랐으나 압둘라 국왕(1924~2015년, 재위 2005~2015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국왕이 되지 못했다. 1969년부터 2011년까지 42년 간 사우디 국방장관을 지내며 군대를 좌지우지했다. 술탄의 뒤를 이어 2011년 10월 왕세제에 오른 나야프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1934~2012년) 역시 2012년 6월 세상을 떠나면서 국왕이 되지 못했다. 나야프는 1975년부터 2012년까지 37년 간 내무장관을 지냈다.
이들의 죽음으로 최대 수혜자가 된 인물이 바로 살만 빈 아둘아지즈 알 사우드(83) 사우디 국왕이다. 살만은 1963년부터 2011년까지 48년 간 사우디 수도인 리야드가 포함된 리야드주 지사를 지내다 술탄 왕세제의 죽음으로 그가 맡던 국방장관 자리를 2011년 11월 물려받았다. 그러다 후임 왕세제인 나야프마저 국왕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자 2012년 6월 왕위 계승권자인 왕세제가 됐다. 왕세제와 국방장관을 동시에 맡으면서 그는 사우디와 이라크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는 등 강력한 추진력을 보이다 2015년 1월 압둘라 국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살만은 즉위 직후인 2015년 1월 형제 상속의 전통에 따라 이복 동생인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72)를 왕세제에 올렸지만 같은 해 4월에 전격적으로 갈아치웠다. 대신 살만의 동복형으로 국왕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나예프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59)를 왕세질(국왕의 조카로 왕위계승권자)로 세웠다. 부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2012녀 11월 내무장관을 맡고 있던 무함마드 빈 나예프는 2015년 4월 왕세질이 됐지만 그마저 2017년 6월 교체됐다. 살만 국왕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33)가 왕세자가 된 것이다. 부왕이 즉위하면서 국방장관직을 물려 받았던 무함마드 빈 살만은 왕세자가 되면서 국방부는 물론 내무부까지 장악하면서 사우디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권력 승계과정에서 술탄 전 왕제세, 나야프 전 왕세제, 무크린 전 왕세제, 무함마드 빈 나야프 전 왕세질을 따르던 무리는 일제히 찬밥 신세가 됐다. 줄을 잘 섰으면 권력을 누렸을 이들은 무함마드 빈 살만에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카슈끄지가 알하야트의 소유주로서 모신 할레드는 현재의 무함마드 빈 살만 체제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카슈끄지는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알제리·쿠웨이트 등을 취재하면서 아랍권에서 언론인으로 나름 명성을 누렸다. 이 시기 그는 오사마 빈 라덴도 여러 차례 만나 인터뷰했다. 카슈끄지는 2003년 알와탄으로 옮긴 지 두 달 만에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해고됐다. 그의 편집 방침이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관측된다고 알자지라는 전했다. 그런 후 카슈끄지의 삶은 극적으로 변했다. 사우디 왕실의 유력 인사인 투르키 반 파이살(73) 왕자의 보좌관으로 변신한 것이다. 투르키 왕자는 사우디 3대 국왕인 파이살(1906~1975년, 재위 1964~1975년)의 아들이다. 파이살은 형제들과 힘을 합쳐 2대 국왕이자 형인 사우드(1902~1969년, 재위 1953~64년)를 1963년 열린 가족회의 결정을 통해 이듬해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파이살 국왕은 형을 몰아내고 3대 국왕에 올랐지만 조카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1944~75년)에게 암살당했다. 범인은 파이살이 형제들과 힘을 합쳐 왕좌에서 몰아낸 사우드와는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왕실 내부의 오랜 원한과는 상관이 있다. 당국은 암살범 파이살이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발표했지만 실상은 사우디 왕국을 이룬 알사우드 가문의 경쟁자였던 알라시드 가문의 오랜 원한이 암살을 촉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알라시드 가문은 1836~1921년 아라비아 반도의 자발 샴마르 토후국을 지배하며 알사우드 가문의 네지드 토후국과 경쟁했지만 끝내 정복당했다. 그 후 ‘멸문지화’ 수준의 화를 당해 구성원 대부분이 근거지에서 쫓겨나 이라크 등지로 망명을 떠났다. 가문의 딸인 와프타 빈트 무하마드 빈 탈랄은 사우디 왕실에 시집을 갔지만 가문의 원한을 아들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에게 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국왕 암살범 무사이드는 공개 참수돼 사우디 왕족 중 처음으로 사형을 당한 인물이 됐다. 사우디 왕실이 얼마나 궁중 권력투쟁, 원한, 보복 등의 중세적인 문화에 젖어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카슈끄지가 주군으로 삼았던 투르키 왕자는 부왕인 파이살이 세상을 떠난 1975년부터 2001년까지 26년 간 사우디 정보국장을 맡았다. 9·11테러가 벌어지기 11일 전에 정보국장에서 물러났다. 현재의 무함마드 빈 살만이 주도하는 살만 국왕 체제와는 원한이 있을 수밖에 없는 할레드 왕자가 운영하는 신문에서 일하다 권력 핵심에서 밀려난 투르키 왕자의 미디어 담당관을 지냈다는 사실은 카슈끄지의 성향을 짐작하는 키워드다. 카슈끄지는 투르키 왕자 밑에서 일하다 그가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함께 자리를 잃었다.
카슈끄지는 알아랍 채널의 이사가 됐는데 이는 또 다른 수모를 그에게 안겨줬다. 알아랍 채널은 사우디의 억만장자 비즈니스맨으로 유명한 왈리드 빈 탈랄 반 압둘아지즈 알사우드(63) 왕자가 바레인의 수도 마나에서 개국했던 방송사다. 이 방송사는 2015년 2월 1일 개국하자마자 바로 문을 닫아야 했다. 바레인의 이슬람 시아파 소속 전직 국회의원을 인터뷰한 게 이유였다. 바레인은 이슬람 수니파 왕실이 시아파가 다수인 국민을 통치하는 국가다. 아랍의 봄 당시 시아파의 반왕정 시위가 극렬했다. 바레인 왕실은 사우디의 파병으로 안전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나라에서 ‘비판적인 언론’을 지향하는 방송국의 문을 열고 첫 프로그램으로 왕실을 사실상 부정하는 시아파 야당 인사를 인터뷰한 것이다.
사실 알 왈리드 왕자는 성공한 사업가지만 그의 집안은 사우디 왕실에 원한이 상당하다. 알 왈리드의 부친인 탈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87) 왕자는 일찍이 왕위계승에서 탈락한 인물이다. 사우디가 아닌 레바논 출신 여성과 결혼해 알 왈리드를 낳았기 때문이다. 탈랄은 자유적이고 개방적인 사고 방식의 소유자로 1958~64년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자유왕자 운동’을 벌였다. 알 왈리드는 2017년 11월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왕자·장관 등 사우디 주요 인사를 잡아가둔 ‘궁중쿠데타’ 당시 호텔에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카슈끄지가 모신 세 번째 주군도 사우디 왕실의 권력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체제에 대항하는 야당인 셈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카슈끄지는 적극적인 비판자로 나섰다. 아랍권 방송에 출연하면서 무함마드 빈 살만이 약속한 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특히 알아랍의 소유주였던 알 왈리드 등을 구금하고 탄압한 사건에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카슈끄지는 2017년 9월 사우디 정부가 ‘무슬림 형제단’을 테러 단체로 규정하자 격렬하게 항의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국가와 통치하고 사회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범아랍권 단체로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아랍권 여러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카슈끄지는 사우디 정부의 사고 방식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개혁, 변화, 아랍의 봄, 그리고 자유를 믿거나 자신의 종교와 국가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 무슬림 형제단의 일부”라며 “무슬림형제단은 고귀한 사고를 가르치는 학교”라고 주장했다. 사우디 왕실에 등을 지고 맹렬하게 비난을 퍼부은 카슈끄지는 자유언론의 옹호자로 전제군주제에 반대한 인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가 모시던 인물들도 왕실 인사이긴 마찬가지다. 다만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인물들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카슈끄지의 한계도 보인다. 큰 그림을 보자면 결국 그도 무함마드 빈 살만과 편만 달랐을 뿐 왕실 권력투쟁의 한 쪽에 가담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할 말을 하는 언론인을 탄압하고 심지어 입을 막으려고 목숨까지 빼앗을 것은 21세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그 나라가 엄청난 석유 자원과 오일 달러를 들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카슈끄지는 언론자유를 요구하고 전제군주제에 대한 개혁을 촉구해왔다. 그가 누구와 손을 잡았든 결국 카슈끄지는 21세기에도 중세시대의 가치관에 머물고 있는 사우디 왕실을 현대 세계로 이끌려는 가치 싸움에서 희생된 인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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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왕실의 ‘꼬리 자르기’
이 발표에 대해 국제사회는 믿을 수 없으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사우디 검찰은 10월 25일 “카슈끄지가 당한 일은 정황상 용의자들이 미리 계획해 의도적으로 벌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격적으로 말을 바꿨다. 사우디 국영 SPA통신에 따르면 사우디 검찰은 이를 발표하면서 “이번 사건과 관련해 터키와 합동실무조사단을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터키 측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근거로 들었다. 주목할 점은 아델 알주바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의 10월 21일 발언이다. 그는 이날 미국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용의자 중 누구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가까운 관계가 아니며 이들은 독단적으로 일을 벌였다”라고 강조했다. 사건의 불똥이 왕세자에게 번지지 않도록 ‘꼬리 자르기’에 나선 분위기다.
사우디의 발표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10월 23일 수도 앙카라에서 열린 집권여당 정의개발당의 의원 총회에서 카슈끄지가 계획적으로 살해됐다고 발언한 지 이틀 만에 이뤄졌다. 터키가 증거와 정황을 들이대며 압박을 가하자 사우디가 어쩔 수 없이 발표한 분위기가 역력해 보인다. 미국의 지나 해스펠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10월 22일 터키를 방문했으며 24일에는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해스펠 국장이 카슈끄지가 고문 당하고 살해되는 순간의 녹음을 들었다”라고 보도했다. 사우디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카슈끄지 살해 증거가 있다는 이야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사우디의 무함마드 왕세자는 10월 24일 에르도안 대통령과 통화했으며 그 후 사실상 정부가 통제하는 터키의 매체들은 무함마드 왕세자에 대한 의혹 보도를 자제하고 있다. 미국과 사우디의 힘이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거대한 음모와 원한의 그림자
우선 그의 경력을 살펴보자.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 본부가 있는 범아랍권 방송 채널인 알자지라 웹사이트에 따르면 카슈끄지는 사우디는 물론 아랍 여러 곳에서 아랍어로 기사를 써 왔다. 경력이 거의 30년이나 되는 언론인이자 정치 해설가였다. 카슈끄지는 한때 사우디 왕실의 이너서클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사우디의 중동과 국내 정치에 대한 비판의 지평을 넓히면서 왕실 핵심 인사들 사이에서 개혁주의자로 이름을 얻었다. 카슈끄지는 미국 인디아나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으며 공부를 마친 후 사우디의 영어 신문인 ‘사우디 가제트’의 미국 현지 특파원으로 기자 경력을 시작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는 영국 런던에 본사가 있는 사우디 정부 소유 일간지인 ‘아샤르크 알아우사트’에서 일했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범아랍 일간지인 ‘알하야트’에도 8년 간 기사를 실었다. 알하야트는 20만 부를 발행하는 아랍어권 최대 신문으로 사우디 왕족인 할레드 빈 술탄 왕자가 소유하고 있다. 할레드는 사우디 국방차관 출신이다.
카슈끄지가 모셨던 할레드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할레드의 부친인 술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1924~2011년)는 비운의 인물이다. 2005년 왕세제(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아우)에 올랐으나 압둘라 국왕(1924~2015년, 재위 2005~2015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국왕이 되지 못했다. 1969년부터 2011년까지 42년 간 사우디 국방장관을 지내며 군대를 좌지우지했다. 술탄의 뒤를 이어 2011년 10월 왕세제에 오른 나야프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1934~2012년) 역시 2012년 6월 세상을 떠나면서 국왕이 되지 못했다. 나야프는 1975년부터 2012년까지 37년 간 내무장관을 지냈다.
이들의 죽음으로 최대 수혜자가 된 인물이 바로 살만 빈 아둘아지즈 알 사우드(83) 사우디 국왕이다. 살만은 1963년부터 2011년까지 48년 간 사우디 수도인 리야드가 포함된 리야드주 지사를 지내다 술탄 왕세제의 죽음으로 그가 맡던 국방장관 자리를 2011년 11월 물려받았다. 그러다 후임 왕세제인 나야프마저 국왕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자 2012년 6월 왕위 계승권자인 왕세제가 됐다. 왕세제와 국방장관을 동시에 맡으면서 그는 사우디와 이라크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는 등 강력한 추진력을 보이다 2015년 1월 압둘라 국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살만은 즉위 직후인 2015년 1월 형제 상속의 전통에 따라 이복 동생인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72)를 왕세제에 올렸지만 같은 해 4월에 전격적으로 갈아치웠다. 대신 살만의 동복형으로 국왕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나예프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59)를 왕세질(국왕의 조카로 왕위계승권자)로 세웠다. 부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2012녀 11월 내무장관을 맡고 있던 무함마드 빈 나예프는 2015년 4월 왕세질이 됐지만 그마저 2017년 6월 교체됐다. 살만 국왕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33)가 왕세자가 된 것이다. 부왕이 즉위하면서 국방장관직을 물려 받았던 무함마드 빈 살만은 왕세자가 되면서 국방부는 물론 내무부까지 장악하면서 사우디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권력 승계과정에서 술탄 전 왕제세, 나야프 전 왕세제, 무크린 전 왕세제, 무함마드 빈 나야프 전 왕세질을 따르던 무리는 일제히 찬밥 신세가 됐다. 줄을 잘 섰으면 권력을 누렸을 이들은 무함마드 빈 살만에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카슈끄지가 알하야트의 소유주로서 모신 할레드는 현재의 무함마드 빈 살만 체제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카슈끄지는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알제리·쿠웨이트 등을 취재하면서 아랍권에서 언론인으로 나름 명성을 누렸다. 이 시기 그는 오사마 빈 라덴도 여러 차례 만나 인터뷰했다. 카슈끄지는 2003년 알와탄으로 옮긴 지 두 달 만에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해고됐다. 그의 편집 방침이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관측된다고 알자지라는 전했다. 그런 후 카슈끄지의 삶은 극적으로 변했다. 사우디 왕실의 유력 인사인 투르키 반 파이살(73) 왕자의 보좌관으로 변신한 것이다. 투르키 왕자는 사우디 3대 국왕인 파이살(1906~1975년, 재위 1964~1975년)의 아들이다. 파이살은 형제들과 힘을 합쳐 2대 국왕이자 형인 사우드(1902~1969년, 재위 1953~64년)를 1963년 열린 가족회의 결정을 통해 이듬해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파이살 국왕은 형을 몰아내고 3대 국왕에 올랐지만 조카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1944~75년)에게 암살당했다. 범인은 파이살이 형제들과 힘을 합쳐 왕좌에서 몰아낸 사우드와는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왕실 내부의 오랜 원한과는 상관이 있다. 당국은 암살범 파이살이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발표했지만 실상은 사우디 왕국을 이룬 알사우드 가문의 경쟁자였던 알라시드 가문의 오랜 원한이 암살을 촉발했다는 주장도 있다. 알라시드 가문은 1836~1921년 아라비아 반도의 자발 샴마르 토후국을 지배하며 알사우드 가문의 네지드 토후국과 경쟁했지만 끝내 정복당했다. 그 후 ‘멸문지화’ 수준의 화를 당해 구성원 대부분이 근거지에서 쫓겨나 이라크 등지로 망명을 떠났다. 가문의 딸인 와프타 빈트 무하마드 빈 탈랄은 사우디 왕실에 시집을 갔지만 가문의 원한을 아들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에게 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국왕 암살범 무사이드는 공개 참수돼 사우디 왕족 중 처음으로 사형을 당한 인물이 됐다. 사우디 왕실이 얼마나 궁중 권력투쟁, 원한, 보복 등의 중세적인 문화에 젖어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카슈끄지가 주군으로 삼았던 투르키 왕자는 부왕인 파이살이 세상을 떠난 1975년부터 2001년까지 26년 간 사우디 정보국장을 맡았다. 9·11테러가 벌어지기 11일 전에 정보국장에서 물러났다. 현재의 무함마드 빈 살만이 주도하는 살만 국왕 체제와는 원한이 있을 수밖에 없는 할레드 왕자가 운영하는 신문에서 일하다 권력 핵심에서 밀려난 투르키 왕자의 미디어 담당관을 지냈다는 사실은 카슈끄지의 성향을 짐작하는 키워드다. 카슈끄지는 투르키 왕자 밑에서 일하다 그가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함께 자리를 잃었다.
카슈끄지는 알아랍 채널의 이사가 됐는데 이는 또 다른 수모를 그에게 안겨줬다. 알아랍 채널은 사우디의 억만장자 비즈니스맨으로 유명한 왈리드 빈 탈랄 반 압둘아지즈 알사우드(63) 왕자가 바레인의 수도 마나에서 개국했던 방송사다. 이 방송사는 2015년 2월 1일 개국하자마자 바로 문을 닫아야 했다. 바레인의 이슬람 시아파 소속 전직 국회의원을 인터뷰한 게 이유였다. 바레인은 이슬람 수니파 왕실이 시아파가 다수인 국민을 통치하는 국가다. 아랍의 봄 당시 시아파의 반왕정 시위가 극렬했다. 바레인 왕실은 사우디의 파병으로 안전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나라에서 ‘비판적인 언론’을 지향하는 방송국의 문을 열고 첫 프로그램으로 왕실을 사실상 부정하는 시아파 야당 인사를 인터뷰한 것이다.
사실 알 왈리드 왕자는 성공한 사업가지만 그의 집안은 사우디 왕실에 원한이 상당하다. 알 왈리드의 부친인 탈랄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87) 왕자는 일찍이 왕위계승에서 탈락한 인물이다. 사우디가 아닌 레바논 출신 여성과 결혼해 알 왈리드를 낳았기 때문이다. 탈랄은 자유적이고 개방적인 사고 방식의 소유자로 1958~64년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자유왕자 운동’을 벌였다. 알 왈리드는 2017년 11월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왕자·장관 등 사우디 주요 인사를 잡아가둔 ‘궁중쿠데타’ 당시 호텔에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카슈끄지가 모신 세 번째 주군도 사우디 왕실의 권력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체제에 대항하는 야당인 셈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카슈끄지는 적극적인 비판자로 나섰다. 아랍권 방송에 출연하면서 무함마드 빈 살만이 약속한 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특히 알아랍의 소유주였던 알 왈리드 등을 구금하고 탄압한 사건에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카슈끄지는 2017년 9월 사우디 정부가 ‘무슬림 형제단’을 테러 단체로 규정하자 격렬하게 항의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국가와 통치하고 사회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범아랍권 단체로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아랍권 여러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카슈끄지는 사우디 정부의 사고 방식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개혁, 변화, 아랍의 봄, 그리고 자유를 믿거나 자신의 종교와 국가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 무슬림 형제단의 일부”라며 “무슬림형제단은 고귀한 사고를 가르치는 학교”라고 주장했다.
카슈끄지는 자유언론의 옹호자?
하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할 말을 하는 언론인을 탄압하고 심지어 입을 막으려고 목숨까지 빼앗을 것은 21세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그 나라가 엄청난 석유 자원과 오일 달러를 들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카슈끄지는 언론자유를 요구하고 전제군주제에 대한 개혁을 촉구해왔다. 그가 누구와 손을 잡았든 결국 카슈끄지는 21세기에도 중세시대의 가치관에 머물고 있는 사우디 왕실을 현대 세계로 이끌려는 가치 싸움에서 희생된 인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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