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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에 들어온 한반도 평화 역사에 영구적 평화는 없다

시야에 들어온 한반도 평화 역사에 영구적 평화는 없다

북한 비핵화 이슈에 남·북·미·중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왼쪽부터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시진핑 중국 주석,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 대통령.
온다던 김정은은 오지 않은 채 해가 바뀐다. 순항한다 싶던 한반도 평화 오디세이가 난기류를 만나 속도가 뚝 떨어졌다. 그래도 2018년은 전쟁의 기제가 평화의 기제로 역사적인 방향을 튼 한반도의 위대한 해였다. 김정은의 연내 서울 방문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2018년의 역사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2019년은 김정은의 신년사를 동력으로 2018년에 뿌린 씨를 거두는 또 하나의 위대한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실망은 이르다.

평화 오디세이의 ‘오디세이’는 그 말 자체가 초인적 인내와 불굴의 의지가 없으면 끝낼 수 없는 난제 중의 난제라는 말이다. 오디세이에서는 단기 승부는 금물이다. 시한을 빠듯하게 정해놓고, 2018년 안에 종전선언, 2019년에는 괄목할 수준의 비핵화와 대북제재 완화를 만들어 낸다는 목표 설정이 반(反)오디세이적이다.

처음부터 김정은의 서울 답방 결단 자체가 작은 변수에도 흔들릴 수 있을 만큼 취약한 것이었다. 김정은 자신이 아래서 반대가 심했지만 문 대통령에게 약속한 것이니 서울 방문의 결단을 내렸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그가 결단했다고 해서 그의 답방을 반대한 다음 세 가지 디테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첫째, 경호 문제다. 한국은 온 국민이 중앙통제로 움직이는 일사불란한 사회가 아니다. 김정은이 서울에 오면 문 대통령이 평양에서 받은 것 같은 십수만 군중의 환영을 기대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귀국길 비행기에서 기자들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을 온 국민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김정은의 사람들은 그들의 ‘최고 존엄’이 서울에서 보수세력의 반대 시위로 훼손될 것을 걱정한다. 합리적인 걱정이다. ‘백두 숭상회’ 같은 김정은 환영 집단이 있는 반면 김정은을 거부하는 보수 집단도 있다.

둘째, 정상급 의제의 소진으로 같은 말의 반복이다. 지금 남북 간에는 공동연락사무소 개설, 경의선과 동해선의 복구 착공식, 임진강 하구를 포함한 서해의 공동 활용, 비무장지대 일대의 군사적 긴장 완화에서 괄목할 진전이 있었다. 실무급 협상으로도 남북관계 개선과 교류 확대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김정은이 서둘러 연내 답방을 하지 않아도 잃을 것이 없는 북한이다.

셋째, 김정은은 더 이상 문 대통령의 족집게 과외를 받고 트럼프와 협상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협상 내용에서도 ‘핵·미사일 신고, 영변 핵시설 폐쇄와 미국의 대북제재 완화 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교환’은 굳이 서울을 중개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에 제시할 선행조치, 미국에 요구할 상응조치는 김정은이 트럼프와 직접 만나 얼굴을 맞대고 협상하는 편이 효율적이고 ‘주체적’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 대북정책 참모진은 평창 이후 김정은 서울 답방이 불발된다는 결론을 내릴 때까지 평창과 판문점, 평양의 황홀경(euphoria)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다. 김정은 답방 불발이 그들을 유포리아에서 깨어나게 만들었기를 바란다. 그들이 고려해야 하는데 고려하지 않은 것은 북한과 김정은의 입장과 관점이다. 상대가 있는 협상, 고차원의 방정식 같은 비핵화·평화 협상에서 상대의 관점, 복잡하게 돌아가는 김정은의 사고 회로를 냉철하게 계산했더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김정은의 서울 방문에 매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숲에서 나와서 숲을 보는 지혜, 전략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청와대는 귀를 크게 열어 지금의 대북협상 방식이 국민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평소 합리적이고 균형된 시각을 유지하는 최고위 외교직을 지낸 한 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의 을’과 같이 보인다고 논평했다. 가혹한 평가지만 종전선언과 대북제재 완화를 마케팅 하러 동분서주한 문 대통령의 모습이 그런 이미지를 확산한 것 같다. 가장 망신스러웠던 것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메이 영국 총리에게 대북제재 완화를 위한 협조를 부탁했다가 즉석에서 거절당한 것이다. 그것은 대북제재를 주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프랑스와 영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사전에 상대국 외무성에 타진하지 않은 결과다. 외교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문 대통령의 체코 방문 때도 체코라는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로 쓰는 웃지 못할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초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1+1=3’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깜빡 실수인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하찮은 실수가 북한 관련 외교에서 소외된 외교부 직원들의 좌절감, 더 나쁘게는 기강해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G20 정상회의에 대통령을 수행하지 않고 멕시코 대통령 취임식에 특사로 참석한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외교 당국은 멕시코의 국제적 위상,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미국의 펜스 부통령이 그 취임식에 참석한 사실을 가지고 강 장관의 G20 불참을 정당화한다. 일리 있는 논리로 들린다. 그러나 이번 아르헨티나 회의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었다.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행사의 경중을 따졌어야 한다. 중남미 국가들의 대통령 취임식에는 주로 정치인들을 특사로 보낸 관례를 따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청와대는 내년 초 남북 정상회담이 먼저냐 북미 정상회담이 먼저냐에 관심의 초점을 두면서 남북 정상회담이 먼저이기를 바란다. 그 선후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먼저 만나 입장을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김정은에게 그럴 의사가 있는지가 의문이다. 우리의 합리적인 사고를 기준으로는 김정은의 행보를 판단할 수가 없다.

남북 정상회담이 먼저든 북미 정상회담이 먼저든 한국이 철저히 경계할 대상이 있다. 김정은은 평양선언에서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검증 하에 영변 핵시설을 폐쇄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상응하는 조치가 전제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영변 핵시설은 상징성은 크지만 영변은 미래의 핵이다. 북한의 과거와 현재 핵 동결은 한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비핵화가 아니다. 트럼프가 임기 내 비핵화를 서둘러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폐기에 중점을 둔 타협도 한국과 일본에 대한 단·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위협은 여전히 존속하는 위험을 남긴다.

미국이 완전하고 검증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대신 들고 나온 최종적이고 충분히 검증된 비핵화(FFVD=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은 글자대로 해석하면 한국에게는 불만스럽다. 최종적(final), 충분히(fully) 검증된 비핵화(denucleariztion)의 ‘최종적’이라는 말이 최종적 비핵화로도 최종적 검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complete) 비핵화’가 목표인 우리에게는 ‘충분한 비핵화’도 불안하다. 완전하지 않은 것도 충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충분해도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북한이 보유한 모든 핵과 미사일의 폐기만이 우리에게는 충분한 폐기다. 한국의 대통령이든 그 아래 고위급이든 미국 및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혀 북미 합의에 반영시켜야 한다. 이것이 새해 우리에게 부과된 최대의 과제다.

레토릭(rhetoric)은 중요하지 않다. 나올 만큼 나왔기 때문에 감동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말도 너무 당연해서 신선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철저한 현실주의적 접근이다. 문 대통령은 불가역적인 한반도 평화를 역설한다. 그러나 역사는 시간 속을 흐른다. 시간은 변화요 역동성(dynamics)이다. 인류 역사에 불변의 평화는 없다. 상황이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비핵화 협상이 성공리에 종결돼 한반도에 평화가 온다고 하자. 그 평화는 오늘의 남북관계, 오늘의 북한 사정, 오늘의 주변 열강들의 상대적인 힘의 관계에 바탕을 둔 평화다.

중국이 군사·기술굴기로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상대적 군사적 존재가 약화된다면? 일본이 아베 신조 총리가 꿈꾸는 대로 군사력을 길러 중국과 맞서는 지역 강국이 된다면? 러시아가 마침내 태평양에 군사력을 투사할 수준으로 원기를 회복한다면? 북한의 국민총생산이 한국의 3분의2쯤으로 따라 온다면? 만물유전(萬物流轉)이다. 불변인 것은 각축하는 열강에 둘러싸인 한국의 지리적인 위치뿐이다. 그래서 ‘지리는 운명이다’(키쇼어 마부바니)라는 말도 나온다. 이런 현실을 전제로 한반도 평화 이후까지 내다보는 ‘지평선 넘어(OTH, over the horizon) 외교’를 준비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가 시야에 들어 온 지금, 남북한은 평화 이후를 설계할 때 한반도의 지리적 좌표가 암시하는 지리적 결정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하나의 행동수칙으로 삼아야 한다. 현대 지정학의 대표적 학자 니컬러스 스파이크먼은 고전이 된 [세계 정치 속의 미국의 전략]이라는 역저에서 “전쟁의 종식이 힘의 투쟁(power struggle)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썼다. 우리가 뼛속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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