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거만한 게 아니라 굳건한 신념 있을 뿐”
“난 거만한 게 아니라 굳건한 신념 있을 뿐”
컨트리 뮤직의 거장 찰리 프라이드, 역사적인 데뷔부터 85세인 지금도 청중 매료시키는 마력까지 미국의 컨트리 가수 찰리 프라이드(85)가 지닌 장점 중 가장 중요한 건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인 듯하다. 프라이드가 빌보드 컨트리 히트곡 톱 10에 52번(1위 29번 포함)이나 오르는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준 그의 목소리도, 10대 시절 미국 흑인 야구 리그 멤피스 레드 삭스의 투수로 활동할 수 있게 해준 그의 팔도 아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집 안의 라디오 주파수를 언제나 ‘그랜드 올 오프리’(WSM 라디오의 컨트리 음악 프로그램)에 맞춰놔 어린 프라이드가 컨트리 음악에 둘러싸여 지낼 수 있도록 해준 그의 아버지도 아니다.
프라이드의 미소를 머금은 듯한 바리톤 음성을 들으면 이 세상에서 그를 당황하게 할 만한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난 지난가을 어느 날 오후 전화로 그와 긴 얘기를 나누면서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 대화는 상당히 극적으로 시작됐다. 난 뉴욕 브루클린의 우리 집에서 텍사스주 댈러스의 자택에 있는 프라이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받아 ‘여보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브루클린의 내 방 창문 밖으로 거세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억수 같은 비로 바뀌었다.
프라이드가 컨트리 음악계뿐 아니라 우리 가족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렇게 극적인 시작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이아나 출신의 우리 할아버지는 쌀농사를 지었는데 난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프라이드의 노래를 목청껏 불렀던 걸 또렷이 기억한다. 또 2017년 내 결혼식 때 처음 연주됐던 노래 중 하나가 프라이드의 1971년 히트곡 ‘Kiss An Angel Good Mornin’’이었다. 그런 그가 아직도 활동 중이며, 나와 통화까지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사실 2019년은 프라이드에게 꽤 멋진 한 해였다. 그가 등장하는 켄 번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컨트리 뮤직(Country Music)’이 발표됐고, PBS의 ‘아메리칸 마스터스’ 시리즈 영화 ‘찰리 프라이드: 난 그냥 나일뿐(Charley Pride: I’m Just Me)’이 나왔다. 또 2017년에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투어 일정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10년 전부터 추진되다가 흐지부지된 전기 영화 이야기도 다시 거론된다. “이젠 내가 직접 나설 생각”이라고 프라이드는 말했다. “캘리포니아로 가서 제작자와 감독, 배우를 적극적으로 찾아보겠다.”
뒤이어 프라이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떻게 컨트리 음악계에서 그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를 들려줬다. 가수 초창기 시절 그는 RCA 레코드와 계약했지만 한동안 공연 섭외가 없어 애를 먹었다.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인종 상황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조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 출연하면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 프라이드와 매니저 잭 D. 존슨은 캘리포니아로 가서 출연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이야기가 잘 안 됐다. 프라이드는 당시를 이렇게 돌이켰다. “존슨은 ‘더 이야기해 볼 것도 없다’면서 ‘내슈빌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난 ‘여기 남아서 더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프라이드는 로스앤젤레스에 남아 ‘투나잇 쇼’의 섭외 담당자 사무실 앞에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 중요한 사람이 드나들 때 말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얼마 안 있어 중요 인사 한 명이 화장실에 가려고 사무실에서 나왔다”고 프라이드는 말했다. “난 벌떡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면서 화장실까지 그를 따라갔다. 난 그에게 ‘내가 좀 독특하긴 하지만 당신 쇼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다. ‘난 컨트리 음악계의 재키 로빈슨(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사상 최초의 흑인 선수)’이라는 말도 했던 것 같다.” 이 말을 하면서 프라이드는 껄껄 웃었다. 그는 언론이 자신에게 그 별명을 붙여주기 전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선 그 표현을 서슴없이 썼다. 프라이드는 “그 사람이 ‘잠깐 기다리라’고 해서 우리 둘 다 볼일을 봤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가 ‘사무실로 가자’고 하기에 난 ‘좋다’고 말하며 따라갔다. 곧 한 남자가 들어 왔고, 뒤이어 또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그 다음 주 난 조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 출연했다.”
사람들은 프라이드가 가수 생활을 해오는 내내 “흑인으로서 컨트리 음악계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질문은 적절치 않다. 프라이드가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은 건 분명하다. 그는 1940년대 말 미국에서 ‘컨트리 음악’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이래 컨트리 음반 1위에 오른 최초의 흑인 뮤지션이었다. 1941년 디포드 베일리(흑인 컨트리 스타) 이후 ‘그랜드 올 오프리’에 출연한 최초의 흑인 가수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80년대 RCA 소속 가수 중 엘비스 프레슬리를 제외하고 음반이 가장 많이 팔린 최초의 흑인 슈퍼스타였다.
하지만 컨트리 음악 명예의 전당의 아티스트 전기에 따르면 ‘그는 인종 문제를 떠나 그 자체로 컨트리 음악의 전설’이다. 사람들은 프라이드가 컨트리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데 흑인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여기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인종 문제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프라이드는 “난 (흑인이기 이전에) 미국인이며 노래를 아주 잘 불렀기 때문에 노래가 끝날 때쯤 청중은 내 피부가 초록색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난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초창기 때의 또 다른 일화를 들려줬다. 디트로이트에서 멀 해가드, 레드 폴리, 벅 오웬스 같은 컨트리 스타와 공연할 때였다. 프라이드는 몬태나주에서 자동차를 타고 디트로이트까지 갔다. 그는 그 얼마 전까지도 몬태나주의 구리 제련소와 세미 프로 야구팀에서 일했다.
첫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프라이드가 도착하자 공연 기획자부터 사회자 랠프 에머리까지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들은 프라이드를 그냥 무대에 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라이드는 에머리가 “당신이 무대에 나가기 전에 청중이 당신에게 호감을 가질 만한 멘트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프라이드의 초기 앨범에서는 그를 ‘컨트리 가수 찰리 프라이드’로만 소개하고 사진을 싣지 않았다. 따라서 그 자리에 모인 약 1만 명의 청중은 그의 싱글 3곡을 들었건 안 들었건 그가 흑인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라이드는 에머리에게 그냥 자기 이름만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에머리가 그의 이름을 소개하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가 무대에 등장하자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프라이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신사 숙녀 여러분, 제가 영원히 벗겨지지 않는 선탠을 한 채 컨트리 음악 공연 무대에 오른 것이 좀 특이한 일이긴 한 것 같군요”라고 말했다. 객석에서 요란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프라이드는 50년이 지난 그때 일을 마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프라이드와 매니저 존슨은 이 문구를 미리 준비했다. “존슨은 ‘뭔가 충격적인 멘트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바로 노래를 시작하면 어느새 청중은 노래에 빠져들 것’이라고 말했다”고 프라이드는 돌이켰다. 그 계획은 적중했다. 디트로이트 공연에서 프라이드의 멘트는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는 백인 청중이 무대에 오른 흑인 가수와 함께 웃으며 그의 노래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줬다. ‘그랜드 올 오프리’의 프라이드 전기에서 디트로이트의 그날 밤을 설명하는 대목은 ‘궁극적으로 인종은 컨트리 음악 팬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끝을 맺는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프라이드의 빛나는 성공을 넘어서서 오늘날 컨트리 음악계는 흑인 아티스트로 가득 차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오늘날 야구 경기장이 흑인 선수로 가득하듯이 말이다.
우리가 프라이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위대한 흑인 컨트리 아티스트’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피부색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도 되듯이 말이다. 하지만 프라이드는 자신을 ‘전통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어니스트 텁, 태미 와이넷, 조니 캐시 같은 컨트리 거장과 맥을 같이하며 조지 스트레이트 이후의 컨트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음악을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프라이드는 자신이 블루스의 거장 B.B. 킹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났으니 컨트리보다는 블루스 음악을 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느냐는 말을 종종 들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니다, 난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른다’고 대꾸했다.”
프라이드에게 컨트리 랩 스타 릴 나스 X 같은 젊은 세대 아티스트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카우보이’ 잭 클레멘트(오랫동안 프라이드의 제작자로 일했다)는 내게 늘 이렇게 말했다. ‘어떤 노래를 녹음하든 지금까지 나왔던 노래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임해라. B급 노래라면 A급으로, A급은 AA급이나 AAA급으로 만들어라.’ 난 그 말을 잊은 적이 없다. 내 앨범이 그렇게 많이 팔린 이유가 거기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인스타그램에서 누가 자신을 팔로우하는지부터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까지 수많은 제약을 받는다. 그러니 이런 생각에 정반대되는 입장을 지닌 누군가와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댈러스에서 전화기를 통해 울리는 바리톤 음성이 뉴욕에 가을 폭풍우를 몰고 오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일 수 있다.
물론 인종은 프라이드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 문제를 자신의 음악과 별개로 생각하려 했던 프라이드의 의지가 그와 그의 음악을 지금의 위치까지 올려놓는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프라이드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의 그런 결심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지금 와서 보면 내가 어렸을 때 프라이드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었는지 아닌지조차 확실치 않은 이유가 거기 있지 않나 싶다. 그 사실을 알고서도 자꾸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이 내가 좋아하던 그의 음악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라이드가 오늘날까지도 그런 믿음에 전혀 흔들림이 없다는 건 신비하기까지 하다. 내년 1월 10일 네바다주 스파크스의 너겟 카지노 리조트에서 또 다른 청중을 매료시킬 준비가 된 프라이드는 “난 거만한 게 아니라 굳건한 신념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The Country Way 1967 종종 프라이드 최고의 앨범으로 꼽히는 이 음반에는 초기 톱5 히트곡 중 2곡 ‘Does My Ring Hurt Your Finger’와 ‘The Day the World Stood Still’이 실렸다. 또 북아일랜드 분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프라이드가 벨파스트의 리츠 시네마에서 부른 이후 통합의 찬가가 된 노래 ‘Crystal Chandeliers’도 이 앨범에 수록됐다.
Charley Pride Sings Heart Songs 1971 프라이드의 전통적 깊이가 느껴지는 사운드를 들을 수 있는 이 앨범에는 크로스오버 1위 히트곡 ‘Kiss an Angel Good Mornin’’이 들어 있다. 이 노래는 싱글 음반으로 1백만 장 이상 팔렸고 프라이드에게 컨트리 음악 협회의 ‘최고 남성 보컬리스트’ 상과 1971년 ‘올해의 엔터테이너’ 상, 그리고 1972년 그래미 ‘최고의 남성 컨트리 보컬 퍼포먼스’상을 안겨줬다.
Music in My Heart 2017 웬만한 아티스트라면 은퇴할 나이가 지났지만 프라이드는 여전히 순회공연을 하고 새로운 음악을 만든다. 프라이드가 80대에 들어서 녹음한 이 앨범은 그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낸 뮤직비디오 ‘Standing in My Way’와 함께 발표됐다.
- 나디라 히라 뉴스위크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프라이드의 미소를 머금은 듯한 바리톤 음성을 들으면 이 세상에서 그를 당황하게 할 만한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난 지난가을 어느 날 오후 전화로 그와 긴 얘기를 나누면서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 대화는 상당히 극적으로 시작됐다. 난 뉴욕 브루클린의 우리 집에서 텍사스주 댈러스의 자택에 있는 프라이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받아 ‘여보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브루클린의 내 방 창문 밖으로 거세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억수 같은 비로 바뀌었다.
프라이드가 컨트리 음악계뿐 아니라 우리 가족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렇게 극적인 시작이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가이아나 출신의 우리 할아버지는 쌀농사를 지었는데 난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프라이드의 노래를 목청껏 불렀던 걸 또렷이 기억한다. 또 2017년 내 결혼식 때 처음 연주됐던 노래 중 하나가 프라이드의 1971년 히트곡 ‘Kiss An Angel Good Mornin’’이었다. 그런 그가 아직도 활동 중이며, 나와 통화까지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사실 2019년은 프라이드에게 꽤 멋진 한 해였다. 그가 등장하는 켄 번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컨트리 뮤직(Country Music)’이 발표됐고, PBS의 ‘아메리칸 마스터스’ 시리즈 영화 ‘찰리 프라이드: 난 그냥 나일뿐(Charley Pride: I’m Just Me)’이 나왔다. 또 2017년에는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투어 일정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10년 전부터 추진되다가 흐지부지된 전기 영화 이야기도 다시 거론된다. “이젠 내가 직접 나설 생각”이라고 프라이드는 말했다. “캘리포니아로 가서 제작자와 감독, 배우를 적극적으로 찾아보겠다.”
뒤이어 프라이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떻게 컨트리 음악계에서 그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를 들려줬다. 가수 초창기 시절 그는 RCA 레코드와 계약했지만 한동안 공연 섭외가 없어 애를 먹었다.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인종 상황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조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 출연하면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 프라이드와 매니저 잭 D. 존슨은 캘리포니아로 가서 출연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이야기가 잘 안 됐다. 프라이드는 당시를 이렇게 돌이켰다. “존슨은 ‘더 이야기해 볼 것도 없다’면서 ‘내슈빌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난 ‘여기 남아서 더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프라이드는 로스앤젤레스에 남아 ‘투나잇 쇼’의 섭외 담당자 사무실 앞에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 중요한 사람이 드나들 때 말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얼마 안 있어 중요 인사 한 명이 화장실에 가려고 사무실에서 나왔다”고 프라이드는 말했다. “난 벌떡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면서 화장실까지 그를 따라갔다. 난 그에게 ‘내가 좀 독특하긴 하지만 당신 쇼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다. ‘난 컨트리 음악계의 재키 로빈슨(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사상 최초의 흑인 선수)’이라는 말도 했던 것 같다.” 이 말을 하면서 프라이드는 껄껄 웃었다. 그는 언론이 자신에게 그 별명을 붙여주기 전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선 그 표현을 서슴없이 썼다. 프라이드는 “그 사람이 ‘잠깐 기다리라’고 해서 우리 둘 다 볼일을 봤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가 ‘사무실로 가자’고 하기에 난 ‘좋다’고 말하며 따라갔다. 곧 한 남자가 들어 왔고, 뒤이어 또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그 다음 주 난 조니 카슨의 ‘투나잇 쇼’에 출연했다.”
사람들은 프라이드가 가수 생활을 해오는 내내 “흑인으로서 컨트리 음악계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질문은 적절치 않다. 프라이드가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은 건 분명하다. 그는 1940년대 말 미국에서 ‘컨트리 음악’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이래 컨트리 음반 1위에 오른 최초의 흑인 뮤지션이었다. 1941년 디포드 베일리(흑인 컨트리 스타) 이후 ‘그랜드 올 오프리’에 출연한 최초의 흑인 가수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80년대 RCA 소속 가수 중 엘비스 프레슬리를 제외하고 음반이 가장 많이 팔린 최초의 흑인 슈퍼스타였다.
하지만 컨트리 음악 명예의 전당의 아티스트 전기에 따르면 ‘그는 인종 문제를 떠나 그 자체로 컨트리 음악의 전설’이다. 사람들은 프라이드가 컨트리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데 흑인이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여기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인종 문제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프라이드는 “난 (흑인이기 이전에) 미국인이며 노래를 아주 잘 불렀기 때문에 노래가 끝날 때쯤 청중은 내 피부가 초록색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난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초창기 때의 또 다른 일화를 들려줬다. 디트로이트에서 멀 해가드, 레드 폴리, 벅 오웬스 같은 컨트리 스타와 공연할 때였다. 프라이드는 몬태나주에서 자동차를 타고 디트로이트까지 갔다. 그는 그 얼마 전까지도 몬태나주의 구리 제련소와 세미 프로 야구팀에서 일했다.
첫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프라이드가 도착하자 공연 기획자부터 사회자 랠프 에머리까지 모두가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들은 프라이드를 그냥 무대에 세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라이드는 에머리가 “당신이 무대에 나가기 전에 청중이 당신에게 호감을 가질 만한 멘트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프라이드의 초기 앨범에서는 그를 ‘컨트리 가수 찰리 프라이드’로만 소개하고 사진을 싣지 않았다. 따라서 그 자리에 모인 약 1만 명의 청중은 그의 싱글 3곡을 들었건 안 들었건 그가 흑인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라이드는 에머리에게 그냥 자기 이름만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에머리가 그의 이름을 소개하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가 무대에 등장하자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프라이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신사 숙녀 여러분, 제가 영원히 벗겨지지 않는 선탠을 한 채 컨트리 음악 공연 무대에 오른 것이 좀 특이한 일이긴 한 것 같군요”라고 말했다. 객석에서 요란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프라이드는 50년이 지난 그때 일을 마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프라이드와 매니저 존슨은 이 문구를 미리 준비했다. “존슨은 ‘뭔가 충격적인 멘트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바로 노래를 시작하면 어느새 청중은 노래에 빠져들 것’이라고 말했다”고 프라이드는 돌이켰다. 그 계획은 적중했다. 디트로이트 공연에서 프라이드의 멘트는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는 백인 청중이 무대에 오른 흑인 가수와 함께 웃으며 그의 노래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줬다. ‘그랜드 올 오프리’의 프라이드 전기에서 디트로이트의 그날 밤을 설명하는 대목은 ‘궁극적으로 인종은 컨트리 음악 팬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끝을 맺는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프라이드의 빛나는 성공을 넘어서서 오늘날 컨트리 음악계는 흑인 아티스트로 가득 차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오늘날 야구 경기장이 흑인 선수로 가득하듯이 말이다.
우리가 프라이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위대한 흑인 컨트리 아티스트’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피부색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도 되듯이 말이다. 하지만 프라이드는 자신을 ‘전통주의자’라고 소개한다. 어니스트 텁, 태미 와이넷, 조니 캐시 같은 컨트리 거장과 맥을 같이하며 조지 스트레이트 이후의 컨트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음악을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프라이드는 자신이 블루스의 거장 B.B. 킹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났으니 컨트리보다는 블루스 음악을 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느냐는 말을 종종 들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니다, 난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른다’고 대꾸했다.”
프라이드에게 컨트리 랩 스타 릴 나스 X 같은 젊은 세대 아티스트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카우보이’ 잭 클레멘트(오랫동안 프라이드의 제작자로 일했다)는 내게 늘 이렇게 말했다. ‘어떤 노래를 녹음하든 지금까지 나왔던 노래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임해라. B급 노래라면 A급으로, A급은 AA급이나 AAA급으로 만들어라.’ 난 그 말을 잊은 적이 없다. 내 앨범이 그렇게 많이 팔린 이유가 거기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 인스타그램에서 누가 자신을 팔로우하는지부터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까지 수많은 제약을 받는다. 그러니 이런 생각에 정반대되는 입장을 지닌 누군가와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댈러스에서 전화기를 통해 울리는 바리톤 음성이 뉴욕에 가을 폭풍우를 몰고 오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일 수 있다.
물론 인종은 프라이드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 문제를 자신의 음악과 별개로 생각하려 했던 프라이드의 의지가 그와 그의 음악을 지금의 위치까지 올려놓는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프라이드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의 그런 결심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지금 와서 보면 내가 어렸을 때 프라이드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었는지 아닌지조차 확실치 않은 이유가 거기 있지 않나 싶다. 그 사실을 알고서도 자꾸 잊어버렸던 것 같다.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이 내가 좋아하던 그의 음악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라이드가 오늘날까지도 그런 믿음에 전혀 흔들림이 없다는 건 신비하기까지 하다. 내년 1월 10일 네바다주 스파크스의 너겟 카지노 리조트에서 또 다른 청중을 매료시킬 준비가 된 프라이드는 “난 거만한 게 아니라 굳건한 신념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박스기사] 이 노래는 꼭 들어야 해
The Country Way 1967 종종 프라이드 최고의 앨범으로 꼽히는 이 음반에는 초기 톱5 히트곡 중 2곡 ‘Does My Ring Hurt Your Finger’와 ‘The Day the World Stood Still’이 실렸다. 또 북아일랜드 분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프라이드가 벨파스트의 리츠 시네마에서 부른 이후 통합의 찬가가 된 노래 ‘Crystal Chandeliers’도 이 앨범에 수록됐다.
Charley Pride Sings Heart Songs 1971 프라이드의 전통적 깊이가 느껴지는 사운드를 들을 수 있는 이 앨범에는 크로스오버 1위 히트곡 ‘Kiss an Angel Good Mornin’’이 들어 있다. 이 노래는 싱글 음반으로 1백만 장 이상 팔렸고 프라이드에게 컨트리 음악 협회의 ‘최고 남성 보컬리스트’ 상과 1971년 ‘올해의 엔터테이너’ 상, 그리고 1972년 그래미 ‘최고의 남성 컨트리 보컬 퍼포먼스’상을 안겨줬다.
Music in My Heart 2017 웬만한 아티스트라면 은퇴할 나이가 지났지만 프라이드는 여전히 순회공연을 하고 새로운 음악을 만든다. 프라이드가 80대에 들어서 녹음한 이 앨범은 그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낸 뮤직비디오 ‘Standing in My Way’와 함께 발표됐다.
- 나디라 히라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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