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SK이사회 의장 "회장도 이사회를 설득해야, 회장은 그런 시스템을 원했다" [이코노 인터뷰]
기업이 돈만 잘 벌면 되던 시대 지나
사회적 가치 따지는 기업이 성공
SK, 이사진 역량 지표까지 외부 공개
[이코노미스트 최영진 산업·ICT부 부장, 이병희 기자] 한국 재계가 주목한 ‘이사회 중심의 책임경영’이 시작된 게 2019년 3월이다. 당시 SK그룹 지주사 SK 이사회 의장을 맡았던 최태원 회장은 그 자리를 외부 인사에게 넘겨줬다. 한국 재계에서 보기 힘든 결정이자 도전이다. 300조원 가까운 규모 그룹의 주요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무겁고도 두려운 자리를 외부에 공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회 중심의 경영 시즌1이 시작됐을 때부터 외부에서는 ‘잘 될까?’라는 의구심이 나왔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의문이다. 2012년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SK하이닉스를 인수한 것은 최태원 회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사회 중심의 책임경영 체제에서 제2의 SK하이닉스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겼다. 그룹 총수는 경영에 직접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얻은 정보와 인사이트를 기반으로 다양한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런데 경영에 참여하지 않은 외부인이 오너의 비전과 인사이트를 따라갈 수 있겠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질문에 그는 “만약 SK하이닉스 인수 같은 안건이 이사회에 올라온다면, 이사회를 설득하는 게 경영자의 역할이라고 본다. 최태원 회장도 주요 사안을 모두 회장이 알 수 없으니 그것을 체크하고 균형을 맞춰주는 게 이사회라는 시스템이라고 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최 회장이 원했던 것처럼 SK 이사회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이사회 산하에 ESG위원회, 인사위원회, 감사위원회, 거버넌스 위원회 등이 마련됐다. 눈길을 끄는 인사위원회는 흔히 말하는 CEO를 평가하고 연봉을 책정하고 해임이나 대표 추천 권한까지 가지고 있다. 그룹 총수의 고유 권한이라고 여겨졌던 인사권을 이사회에 넘겨준 것이다. 최태원 회장이 강조하는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ESG 위원회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거버넌스 위원회의 활동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게 SK 이사회의 시즌1은 재계의 주목을 받을 만한 활동력을 보여줬다. 그 중심에 그가 있다. 바로 전 고려대 총장 염재호 SK 이사회 의장이 주인공이다. 그는 시즌1의 활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2022년 이사회 활동 때문에 모인 게 54번인가 된다. 사외이사 5명이 매주 한 번 이상 모인 것인데, 나와 같이 일하는 사외이사분들은 다들 ‘너무 바쁘다’라고 말할 정도”라고 강조했다. ‘이코노미스트’가 염 의장을 만난 이유는 이사회 중심의 책임경영을 했던 시즌1을 회고하고, 시즌2에 대한 계획을 듣기 위해서다.
염재호 의장은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제19대 고려대 총장을 지냈고 2019년 SK㈜ 이사회 사외이사 겸 의장에 올랐다. 염 의장은 ‘체크 앤 밸런스(check & balance)’, 소통과 설득을 강조하며 SK㈜ 경영진과 이사회 사이 균형의 무게추를 잡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임기는 2025년 2월 말까지다.
지난 7일 오전 10시,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SK 서린 사옥 26층에서 염재호 의장을 만났다. 이제 막 단장을 마쳤다는 SK㈜ 이사회 의장실에는 빈 책상과 의자, 책장과 테이블이 말끔하게 놓여있었다.
그는 이사회 의장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데 무게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30년 전쯤 최태원 회장이 ‘기업이 점점 커지는데, (사업에 대해) 회장님이 결정해 달라고 하는 임원은 정말 무책임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계열사 책임자들이 결정한 다음 잘못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모든 것을 회장님 결정에 맡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사회의 결정이 단순한 결정이 아니라 기업의 미래를 책임지는 결정적인 과정으로 보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만큼 이사회의 결정과 의장의 역할이 가볍지 않다는 뜻이다. 그는 “최 회장도 각 계열사가 이사회를 중심으로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며 “이런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게 그분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염 의장은 미국 건국사를 예로 들며 SK 이사회가 어떻게 변화하려 하는지 방향성을 설명했다. 미국이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당시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재임 후 대통령에서 물러나려 하자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대통령보다 ‘왕’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시대, 통치자가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물러나는 은 상상할 수 없었다는 일이다.
하지만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가 역할을 나누고 견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여기에 연방제를 실시하면서 지자체(주)가 중요한 일을 결정하도록 했다. 과거 기업의 오너가 ‘왕’처럼 군림하던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는 게 염 의장 생각이다. 그는 SK그룹도 미국처럼 각 계열사 이사회가 주요 안건을 결정하고, 지주회사인 SK 역시 이런 큰 틀에서 전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이사회, 거수기 아니다” 사전 숱한 논의‧검토 과정 고려해야
이사회에 올라오는 안건에 대해 100% 가결된다는 비판에 대해선 ‘빙산의 일각’만을 보면 안 된다고 했다. 숱한 검토와 토론을 통해 선별한 뒤에야 이사회에 안건을 올리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사회가 거수기 역할만 한다고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염 의장은 “이사회의 분과위원회가 매우 많고 모든 안건에서 3~4시간씩 사전검토하고 토론한다.”고 했다. “여기서 이야기가 안 되면 소위 빠꾸(back)를 시켰다가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져야 이사회에 안건이 올라가는데, 대부분 통과되는 것도 이런 과정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무회의도 차관회의나 사전 조율을 통해서 올리는 안건을 대부분 통과시키는데 이와 비슷하다는 설명이다.
이사회 반대 때문에 실행이 안 되는 안건도 많나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첨단기술에 투자하겠다고 하면서 그 기술을 지지하는 교수를 데려와 강의 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를 설득하려면 객관적인 사람을 데려와서 여러 대안 중 어떤 게 낫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었다. 또 투자하는 대상의 미래의 가치를 너무 높게 평가하거나, 투자하려는 우리 입장이 너무 약하게 거래가 된 부분에 대해서도 지적한 적 있다.
최태원 회장이 특정 안건에 대해 미리 언질을 주기도 하나
처음에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지만, 한 번도 없었다. 어떤 때는 최 회장이 ‘나도 지금 듣는다’고 얘기한 적도 있다. 그래서 사외이사들도 안건 회의할 때 생각대로 다 이야기하는 일이 많다.
이사회가 반대하는 일을 경영자가 밀어붙일 수도 있을까. SK그룹이 2012년 적자 기업이던 하이닉스를 인수할 당시, 최태원 회장은 그룹의 미래를 고민하고 통 큰 결단을 내렸다. 객관적 지표만을 봤을 때 이런 결정을 사외이사들이 지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염 의장은 “회장으로서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외이사 가운데 특정 사업에 대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경영자가)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업이라면 (반대하는 사외이사를) 설득하지 않겠냐”고 했다. 사외이사는 양심에 따라 반대할 수 있고, 반대하는 이를 설득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했다. ‘체크 앤 밸런스(check & balance)’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염재호 의장은 “회장님 정도면 거의 매일 심층 과외를 받는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정확한 정보를 계속 받고 세계 변화의 트렌드를 제일 많이 알고 있는 것”이라며 “비즈니스 쪽에서는 저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설득하면 우리(사외이사)가 쫓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옆에서 본 최태원 회장은 어떤 사람인가.
미래지향적인 사람이다. 그런 부분이 최종현 선대 회장님과 매우 비슷하다. 최종현 회장이 1974년에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만들었다. 1978년, 3기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 유학 생활을 했는데, 특이한 것은 그때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만 10명을 뽑았다. 최종현 회장은 미국 출장을 오면 직원들보다 학생들을 먼저 만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최종현 회장이 “SK는 30년 뒤에 세계 500대 기업이 될 것이다. 한국도 선진국으로 부유한 나라가 될 텐데 그때는 사회문제가 복잡해질 것이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했었다. 최종현 회장이 화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문‧이과를 다 경험한 것 아닌가. 최태원 회장도 물리학과 경제를 공부했다.
최태원 회장이 사회적 가치를 이야기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제는 블랙록이나 JP모건 등 해외 투자회사들이 먼저 사회적 가치를 따진다. 최 회장이 그 트렌드를 미리 읽은 것이다. 예를 들면 20세기엔 기업이 무조건 돈만 많이 벌면 된다고 했다. 기업은 열심히 벌어서 세금 많이 내고 기부도 많이 하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트렌드가 바뀌었다. ‘돈쭐 낸다’는 말이 있지 않나. 사장이 착한 일을 한 식당에 손님들이 몰린다. 소비자들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런 (사회적) 가치를 놓쳐서는 절대로 기업이 성공할 수 없다.
SK 사외이사로 힘든 일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지난해 53번 정도 모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다른 곳에선 사외이사로 활동하면 일 년에 5~6번도 모이는데, 이보다 10배는 더 활동했다는 뜻이다. 염 이사는 “지난해에 정식 이사회만 12~13번 모였다”며 “안건 등에 대해서 미리 교육도 받고 경제 연구소에서 보고도 하는데 이런 과정이 많다”고 했다. 예를 들면 소형 원자로에 관해 공부하거나 ESG 위원회 안건을 미리 검토해야 하는데, 이런 일이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출근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고도 했다.
이사회가 인사위원회 운영 “기업 성장하는 데 시스템 필수”
SK 이사회에서 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인사위원회’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인사위원회는 대표이사 평가와 후보 추천, 사내이사 보수 적정성 검토, 중장기 성장전략 검토 등 핵심 경영활동을 맡는다. 인사권은 경영자가 놓기 어려운 중요한 문제지만, SK는 이런 역할까지 이사회가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염재호 의장은 “작은 기업이면 몰라도 기업이 커지는데 인사 문제를 회장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또 “외국 기업도 CEO 후보군이 있는데 최 회장도 SK그룹이 이런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기 ‘C’ 레벨 급 후보를 아우르는 리스트가 있느냐는 질문에 “구체적인 리스트는 없지만, 부사장~사장급 임원은 많이 알고 있다”고 했다. 다만 최태원 회장만큼 임원들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염 의장은 “최 회장은 (임원들을) 20~30년을 지켜봤던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회장께서 인사위원회에 들어가야 한다,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진 분 아니냐’고 했다”며 “다만 현직 CEO 같은 경우에 평가를 객관적으로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SK는 이사진의 역량 지표도 만들어 외부에 공개한다. 경영진과 얼마나 친한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전문성과 지식을 기반으로 이사진을 선발했다는 점을 주주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에서 일반화된 정책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다는 평가가 많다.
염 의장은 “재무‧법률‧정책‧글로벌 마인드 등. 우리도 이런 부분을 평가하려고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예로 들며 “나는 (대학) 총장을 했기 때문에 조직의 전체를 보는 능력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재무나 투자 부분에선 약하다. 어떤 사람은 재무 역량은 뛰어나지만 다른 역량은 부족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이 자료를 공개하면 주주들도 알 수 있고 이 회사가 어떻게 변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 이런 기업이 성공한다는 걸 보여주자는 것이 이 정책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최근 SK는 사외이사가 이사회 안건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경영정보를 제공하는 포털 시스템도 구축했다. 이 시스템에는 이사회에 상정된 안건이 만들어지기까지 히스토리와 회의자료가 게재된다. 기록을 통한 책임의 무게가 명확해진다는 뜻이다. 염 의장은 “기록에 남아야 개선이 된다, 그냥 (의견을) 던져놓고 아무도 안 챙기면 안 된다”고 말했다.
모든 정보를 공개하는데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염재호 의장은 “공개하지 않는 게 더 손해가 된다”고 했다. “이제는 이런 리포트를 블랙록 같은 투자 회사들이 요구한다”며 “이렇게 진화가 이뤄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오징어게임2’ 기대가 컸나…혹평 일색에 관련주 동반 급락
2서울 최초 이케아 입점 '아이파크 더리버' 내년 4월 개장
3셀트리온, 다잘렉스 바이오시밀러 美 3상 IND 승인
4하나증권 조직개편 실시…“책임 경영 강화·기민한 대응체계 구축”
5'♥박성광' 아니다.. 이솔이, 침대 셀카 男 정체는
6최상목 "韓 대행 탄핵은 내각 전체에 대한 탄핵"
7 원·달러 환율, 1480원 돌파…15원 넘게 급등
8가족 반대에도 18세 연하와…'더글로리 빌런' 놀라운 근황
9중국, 국내외 무역 통합 시범 본격화… 9개 지역 선행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