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모은 5500만원 날리고 결혼도 미뤘어요”
[죽음의 전세사기] ① 꽃다운 청춘 죽음으로 몰고 간 인천 미추홀구 '건축왕' 사기 사건
건축업자, 공인중개사·중개보조인·시공업체와 전세보증금 가로채
피해 주택 약 2700가구, 예상 피해금액 3543억원 달해
[이코노미스트 박지윤 기자] 한국의 고유한 주거문화인 전세제도가 악성임대인의 투기 확대를 위한 먹잇감으로 활용되고 있다. 최근 인천 지역의 자치구 중 한 곳인 미추홀구에서만 전세사기 피해 주택이 무려 약 2700가구에 달하고, 경매에 들어간 주택도 약 1000가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가 밝힌 피해 예상금액은 약 3543억원이다.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약 2700가구의 전세 피해를 입힌 주범인 ‘건축왕’으로 불리는 건축업자를 비롯해 공인중개사, 중개보조원 등은 사기와 공인중개사법위반 혐의로 현재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 일당의 주요 타겟은 2030세대, 신혼부부 등 주로 자본금이 적은 사회초년생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월세 한 푼이라도 아껴보고자 평생 모은 자금을 전세보증금으로 마련한 청년들이다.
지난 2월에는 건축왕 일당에게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기에 처해 대책과 제도 개선을 요구했던 한 청년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전세사기가 현행 법과 제도의 미비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재난이라고 지적한다. 피해 임차인의 무지함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사회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건물 수백채 가진 부호’라며 안심시켜
지난해 겨울은 30대 A씨에게 유난히도 춥고 길었다. 인천에서 대학 생활을 하기 위해 대구에서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으로 올라온 A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타지에서 홀로 생활하는 것을 걱정하시는 부모님께 돈도 많이 벌고 잘 지내고 있다며 큰 소리를 치고는 3평 남짓한 좁고 어두운 고시텔에서 몸을 뉘었던 속 깊은 딸이다. 23살에 인천에 위치한 회사에 첫 취업한 뒤 약 6년간 차곡차곡 모은 4800만원으로 A씨는 고시텔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인근 부동산중개업소에서 소개한 거실과 작은방 1개, 큰방 1개가 있는 투룸 빌라에 마음이 갔다. 천장에 누수 흔적이 있어 걱정하는 A씨에게 집주인과 부동산중개업자는 관리사무소를 통해 곧 깨끗이 수리를 해주겠다며 보증금 4800만원에 이렇게 넓고 깨끗한 집은 못 구한다고 계약을 부추겼다. 약 7000만원의 근저당이 잡혀있는 점이 맘에 걸렸던 A씨에게 집 주인은 건물 수백여채를 가진 부호인데다 부동산중개업소에서도 2억원까지 공제를 해준다며 안심시켰다.
2019년 12월 덜컥 전세계약서에 사인을 한 A씨는 난생 처음 스스로 마련한 전셋집이라는 생각에 들뜬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 여름 장마철이 되자 빌라 맨 위층이었던 A씨 집은 비가 내리면 창틀과 벽지로 물이 스며들어 흘러내리다 못해 뚝뚝 떨어졌다. 집주인을 대신해 집을 관리한다는 부동산중개인과 관리사무소는 서로 누수 피해와 수리에 대한 책임을 떠넘겼고, 어느덧 2년이 흘러갔다. 집주인의 대행업무를 맡는 부동산중개인에게 보증금을 1억원 이상으로 올리겠다는 말을 들은 A씨는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누수가 심한 집이라 다음 세입자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부동산중개인은 5500만원에 재계약을 하면 이번엔 제대로 수리를 해주겠다며 A씨를 달랬다. 재계약을 한지 정확히 2개월 뒤 A씨의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갔으니 배당 요구권을 행사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문서가 날아왔다.
“놀라서 부동산중개인을 찾아가니 공제증서를 보여주며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보증금에서 최우선 변제금을 제외한 차액은 부동산에서 직접 책임지겠다며 끝까지 안심시켰어요. 집주인이 재력이 상당한데 여행을 가는 바람에 자금 흐름이 꼬여 대출 이자가 밀려서 경매로 넘어간 것이라며 한두 달 안에 이자를 다 갚으면 다시 경매가 취소될 것이라고 했죠.”
하지만 한달 뒤인 지난해 4월부터 부동산중개인은 연락이 두절됐고, 해당 부동산중개업소도 문을 닫았다. A씨는 회사에 연차를 쓰고 수일 동안 법무사, 변호사를 만나 자문을 구했지만 소송을 걸더라도 집주인이나 부동산중개소에서 파산신청을 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최우선 변제금 2700만원이라도 받는 게 최선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5500만원의 보증금을 돌려받고 올해 여름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리려던 A씨의 행복한 꿈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홀로 속앓이를 하던 A씨는 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 채로 친구 집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같은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의 한 오피스텔에 전세로 거주하는 40대 B씨도 봄이 왔지만 아직 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B씨는 2020년 1월 거실, 방 3개, 화장실 2개를 갖춘 오피스텔에 보증금 7200만원에 전세 계약을 체결하고 한달 뒤 입주를 마쳤다. 이 오피스텔은 근저당 1억4000만원이 잡혀있었지만 B씨의 전세보증금과 합쳐도 2억1200만원에 그쳐 주변 시세보다 훨씬 낮은 편이라는 부동산중개인의 설득에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부동산중개인은 오피스텔 주인이 성실한 임대사업자이기 때문에 2015년 오피스텔 준공 이래로 여태껏 한번도 전세계약으로 문제가 발생한 일이 없으며 부동산에서 공제증서도 발행해주니까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2022년 2월 전세 계약 만기일이 다가오는데 새학기를 맞아 전세 매물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판단한 B씨는 일단 전세 계약을 다시 연장했다. 부동산중개인의 보증금 증액 요구에 360만원의 보증금을 더 내고 2년 동안 전세로 거주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임대인이 대출 이자를 수개월째 납부하지 않아 지난해 7월 B씨의 오피스텔이 경매로 넘어간다는 서류를 받았다. 집주인은 연락이 닿지 않았고 부동산중개업소에서는 조금만 기다리라는 답변만 되풀이한 뒤 연락이 끊겼다. 임대인이 임대사업자로서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임대보증금 반환 보증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때 알게 됐다.
경매 넘어간 피해 주택만 1000채 가까워
이 같은 사례는 셀 수 없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에 따르면 세입자의 보증금을 가로채 ‘건축왕’이라고 불리는 60대 건축업자와 공인중개사, 중개보조원, 시공사 관계자들이 조직적으로 전세 사기를 공모해 피해를 입은 주택은 2700여가구에 달한다. 3월 기준 경매에 넘어간 주택만 996가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건축왕이 소유한 주택에서 전세 사기를 당한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이 지난 2월 28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30대 C씨는 인천 미추홀구 깡통전세 피해시민대책위원회에서 적극적으로 피해를 알리고 대책 지원을 요청했던 피해자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C씨는 근저당을 설정한 집에 2021년 10월 보증금 7000만원의 전세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최근 건축왕 전세사기 사건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은행을 찾았지만 대출 연장 거절을 받았다. 7000만원에 전셋집을 계약했기 때문에 6500만원 이하의 소액임차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단 500만원 차이로 최우선변제금도 받을 수 없던 상황이었다. C씨는 ‘전세사기 피해 대책위에서 위로를 얻었지만 더는 못 버티겠다며 더 좋은 대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담은 유서를 남겼다.
‘건축왕’ 일당, 2009년부터 활동해
건축왕 일행의 전세 사기 행각에 대해 검찰과 경찰도 수사에 나섰다. 인천지검 형사5부는 3월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사건 수사 결과 건축왕을 비롯해 공인중개사 2명과 중개보조원 1명 등을 사기, 부동산실명법, 공인중개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지난해 1∼7월 인천시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등 공동주택 34∼55가구의 전세 보증금 25억∼65억원을 세입자들로부터 받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건축왕은 2009년부터 공인중개사나 중개보조원의 명의를 빌려 토지를 매입한 뒤 자신이 운영하는 종합건설업체를 통해 소규모 주택‧오피스텔을 지어 전세보증금과 주택담보 대출을 받아 다시 주택을 신축하는 방식으로 주택을 2700여가구까지 늘려나갔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정부에서 마련한 긴급 지원 대책만으로는 현재 피해 상황을 타개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입을 모았다. 안상미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인천시가 마련한 긴급 주거주택은 238가구로 피해 임차인이 3000여명이 넘어서는 상황에서 턱없이 부족하다”며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해 저금리 대출을 제공하고 대출 기간을 연장해주겠다는 대책도 올해 5월부터 시행하는 데다 근본적으로 사기 피해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대출 기한연장이나 이자를 낮춰주는 미봉책일 뿐”이고 지적했다.
“경매 넘어가도 세입자에게 우선매수권 없어”
안 위원장은 현재 공공주택과 달리 임대사업자가 보유한 주택이 경매에 넘어갔을 때 세입자에게는 우선매수권도 주어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세 임차인이 임대인에게 사기를 당해 경매로 넘어간 집이지만 입찰에 참여할 경우 경매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경쟁해야 한다.
안 위원장은 “눈물을 머금고 경매로 넘어간 집이라도 낙찰받고 싶어하는 세입자들이 있는데 우선매수권이 없어 눈앞에서 다른 경매 참여자들이 집을 낙찰 받는 것을 봐야 한다”며 “보증금을 날린 상태에서 높은 가격을 써서 경쟁자들을 이기고 낙찰에 성공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임대인이 범죄 혐의가 있을 경우 경찰 혹은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라도 경매 절차를 유예해주는 등 전세사기 피해 임차인 보호 대책이 더 촘촘하게 이뤄졌으면 한다는 바람이다.
전세사기를 벌인 임대인이 피해 임차인에게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제공하는 안심전세대출을 통해 보증금을 돌려받으라고 회유하는 것도 문제다. 임차인에게 기존 보증금보다 더 높은 전세가로 HUG의 안심전세대출을 활용해 근저당 말소 조건으로 추가 대출을 받아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HUG가 자동으로 보증보험에 들기 때문에 집주인이 세금을 체납해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HUG에서 전세입자에게 대신 보증금을 변제해줘야 한다.
안 위원장은 “전세사기범들이 전세보증금 반환에 대한 책임을 HUG로 떠넘기는 편법을 활용하라는 제안을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권장하고 있다”면서 “피해자는 안심전세대출을 신청할 경우 사기 공모 혐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HUG도 결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하는 정부 기관이므로 피해는 다시 국민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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