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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도배 고수들 꺾은 명장…“해외로 K-인테리어 전파하고파”[대한민국 명장]

신호현 실내 건축 부문 명장 인터뷰
10대 시절 우연히 도배에 빠져
청와대·국회의사당·기업 총수 등 도배 도맡아
“도배 박물관 설립이 꿈…해외 진출 계획도”

지난 11월 8일 서울 구로동에 위치한 ‘도배의 민족’에서 신호현 실내 건축 명장이 이코노미스트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신인섭 기자]
그들은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한 자리에서 15년 이상 일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한복생산부터 제빵·금형·석공예·용접 등 한국 사회가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흔히 말하는 3D 업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이 어려워도 편법 대신 원칙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낸 장인들이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기꺼이 부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꽃보다 아름다운 명장의 인생사를 담은 ‘대한민국 명장’ 시리즈를 시작한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38개 분야 92개 직종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이들 중에서 대통령 명의로 선정된 기능인을 말한다. 지금까지 712명이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편집자주]

[이코노미스트 이혜리 기자] 주(住)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 중 하나다. 이중에서도 주거의 주춧돌이 되는 도배는 실내 건축의 첫 단추이자 공간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벽을 보호하기도 하고, 방습·방풍·방음 등의 기능도 수행한다. 도배를 단순히 벽지를 붙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지만, 실제로는 계획 단계부터 세심한 준비와 숙련된 기술이 요구되는 고도의 작업이다. 

국내 도배 산업을 이끌어 온 한 사람이 있다. 평생 도배공으로 살아온 ‘도배 명장’ 신호현씨는 48년 경력을 지닌 ‘도배의 신’으로 불린다. 60대인 그는 도배에만 50여 년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는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하는 대한민국 명장 실내 건축 분야에 지난 2015년 이름을 올리며 ‘도배 명장 1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한 분야에서 한 우물만 파며 성공을 이룬 그는 도배에 대한 자부심도 확고했다. 명장으로서 그는 이제 도배 인재 양성을 사명으로 여기고 대한민국 도배 기술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고자 한다.

방황하던 청년, 우연히 마주한 도배

신 명장이 도배의 길에 들어선 것은 16세 때인 1976년.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 중이었던 그는 우연히 도배를 접했고 이후 술값을 벌고자 이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됐다. 

“팔자인 것 같아요. 도배를 시작하고 나니 당구나 볼링치는 것도 재미없고, 도배에 빠져들게 됐죠. 마음이 차분해진달까. 수양하는 느낌도 들고, 절제도 되고. 유흥비, 용돈을 벌 겸해서 현장에 가기 시작했죠. 열여섯에 배워서 열일곱에 대장이 됐어요. 할아버지뻘 되는 분들에게 작업 지시를 하고, 제가 생각해도 당찼어요.”

손재주가 좋았던 신 명장은 고향인 광주에서 금세 일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1등이 되기까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 일을 끝내고도 현장에 남아 시공법이나 벽지에 대한 연구를 하며 도배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혼자서 천장 10~20m를 도배했어요. 원래 서너 명이 붙는 작업인데, 혼자서 벽지를 발랐죠. 체력이나 손 감각이 겸비돼야 해요. 실력이 좋아지기 위해 별 노력을 다했어요. 혼자서 2~3일간 내 체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가장 높고 긴 천장을 어떻게 바를 수 있는지, 혹한의 추위를 견뎌보는 등 테스트했죠.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했을 거예요.”
지난 11월 15일 신호현 실내 건축 명장이 구로동의 한 작업 현장에서 도배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이후 3~4년간 전국을 돌며 실력자들과 대결을 펼쳤다. 이를 ‘타짜 도배’라고 한다. 배낭 하나만 메고 전국을 돌며 신 명장은 전국구 도배 명인이 됐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배 고수를 깼어요. 지역이 대전이면 대전에 가서 이곳에서 제일 도배 잘하는 분을 찾아 그분의 현장에 가서 시합을 요청하는 거죠. 어린애가 오니까 ‘저리 가라’고 내쫓기도 했어요. 몇 날 며칠을 빈정대면 응해주더라고요. 결국 제가 다 이겼어요. 기술 세계에서는 기술이 최고면 ‘어른’인 거예요. 대결을 통해 이론과 기술을 습득하고, 또 이동하고, 그렇게 기술을 쌓아갔습니다.”

도배 훈련을 독하게 하고, 전국을 다니며 대결을 펼친 신 명장이다. 어렸던 그에게 도배는 어떤 존재였을까.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지만, 일종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수양의 수단이기도 했다.

“어떤 일에 있어서 지는 걸 싫어하고,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근성이 있어요. 하지만 어린 나이에 울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결국 안 다니게 됐고,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죠. 도배를 하지 않았다면 거칠게 살다가 문제를 크게 일으켰을 것 같기도 해요. 근데 이게 도배로 순화가 되더라고요.”

열정으로 이룬 명장의 자리 

도배 외길을 걸어온 신 명장은 2015년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되면서 그 이력에 정점을 찍었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15년 이상 산업현장에서 관련 직종에 종사한 최고의 숙련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에게 수여되며, 실내 건축 분야에서 도배사로서 이 상을 거머쥔 건 신 명장이 최초다. 신 명장이 명장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도배 분야에서 명장제도는 전무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신 명장 외에 도배 분야의 명장은 탄생하지 않고 있다.

“실내 건축 인테리어가 국내에 도입된 지 50~60년이에요. 그런데도 이전엔 명장 제도가 없었죠. 그래서 직접 노동부에 베이커리, 미용 분야는 명장이 있는데 실내 건축 쪽엔 왜 없냐고 지속적으로 건의하기도 했어요. 결국 실내 건축 분야의 종목이 만들어졌어요. 명장이 되는 과정은 정말 어려워요. 수백 명이 지원했고, 이들이 6개월 동안 서바이벌 게임을 거쳐야 하죠. 서류·자격증·사회봉사·기술 수준·수상 이력·사회 기여도 등 모든 걸 합산해요. ‘기술이 좋다’는 수준으로는 안 돼요. 어디서도 보지 못한 신기를 보여줘야 해요. 세 명이 최종까지 올라갔는데, 일용직 도배사인 제가 된 거죠. 직업적 열정을 높이 봐준 것 같아요.”
신호현 실내건축 명장이 개인공방에 걸어둔 대한민국 명장 명패. [사진 신인섭 기자]

명장이 되고 나서 느끼는 책임감이나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다. 신 명장에게 명장이 되고 난 이후에 달라진 점이 있는지 물었다.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어요. 사람들이 명장이라 하면 거리감을 두려고 해요. 너무 어려워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관계성이 어려워지더라고요. 가까이 있던 사람들도 떠나기도 하고요. 수준이 너무 높아진 거죠. 좋은 점은 아무래도 국가가 인정했기 때문에 사람들도 인정을 할 수밖에 없죠.”

신 명장의 이력은 명장의 수식어에 걸맞게 화려하다. 1977년 국회의사당 도배를 맡은 데 이어 청와대 영빈관·삼청각·국립박물관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기업 총수 및 연예인들의 집을 수없이 작업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자택을 시공할 때의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유명인들의 자택을 시공하게 되면서 입소문을 탔어요. 일반 고객들과 도배 콘셉트가 조금 다르긴 하죠. 침실은 어둡게 하고, 단조롭지 않아요. 요즘은 많이들 차분하게 하죠. 정주영 회장 자택을 작업할 땐 ‘좋은 벽지를 쓰지 말라’고 했어요. 워낙 검소한 분이잖아요. 아파트 현장에서 남은 벽지 재고를 발라달라고 하셨죠. 회장님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어요. 물론 기업 총수들마다 성향은 다 달라요. 고급스럽게 하거나 아주 싸게 서민적으로 해달라는 분도 있고요.”

“도배 문화 발전에 앞장…인식 바꾸고파”

구로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은 그가 운영하는 회사의 사무실이기도 하다. 전국 도배시공연합체 ‘도배의 민족’을 운영하는 동시에 그가 도배에 사용해온 도구들이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롤러·칼·망치·붓 등 100가지가 넘는 공구들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신호현 실내 건축 명장이 직접 만든 공구 손잡이들. [사진 신인섭 기자]

“현장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거칠고 지저분한 공구를 사용하는 건 아니에요. 공구에 공예적 요소를 가미해서 제가 직접 만들고 있어요. 예쁘게 만들면 일도 허투루 하지 않을 것 아니에요?(웃음) 같이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복장에 신경 쓰라고 해요. 너무 지저분하게 다니지 말라고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교양을 쌓으면 좋죠. 도배사들에 대한 편견이나 인식이 변화하길 바랍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배 명장이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개발하기 위해 새로운 콘텐츠를 늘 공부하고, 받아들이고 훈련한다. 그는 이제 국내의 도배 문화의 정착과 도배 산업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준비 중이다. 

“명장이 되고 나서는 현실에 안주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너무 힘들게 달려왔으니까 명장이 되고 난 후에는 안주형으로 돌아서 버린 거죠. 저는 명장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명장이 되고 난 이후에도 해야 할 일이 많이 있더라고요. 낙후된 도배 산업을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에 이제 시작이고, 또 고생 시작인 거죠.”

신 명장은 현재 국내 도배 산업의 기반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역사에 비해 도배 산업이 낙후되어 있고, 인식 또한 저평가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도배 기술 서적 5권을 집필, 출간해 시공법 매뉴얼화에 나섰다. 

“후배들에게 제 기술을 전수하고 떠나고 싶어요. 후학들은 선진화된 도배를 했으면 좋겠죠. 그래서 제가 기초 디딤돌은 만들어놓고 가야 하지 않나 싶어요. 도배는 정직하고, 노력한 만큼 얻어요. 고전적인 기술로는 이 바닥에서 경쟁력이 뒤떨어져요. 기술을 발전시켜야 나아갈 수 있죠. 도배하면서 습득한 기술을 글로 정리해 체계화한 게 제가 출판한 책들이에요. 중구난방인 시공법을 매뉴얼화해서 선진 기술이 정착되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지난 11월 8일 서울 구로동에 위치한 ‘도배의 민족’에서 신호현 실내 건축 명장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신인섭 기자]

또 후에는 도배 박물관을 짓는 게 신 명장의 꿈이다. 이미 30년 전부터 개설 계획을 세우며 자료도 대거 수집한 상태다. 

“제 오랜 꿈인 도배 박물관을 준비 중이에요. 과거에 사용했던 벽지와 갖가지 공구 등 600여 점을 보관하고 있죠. 지방이나 제주도에 가면 다양한 분야의 박물관이 있잖아요. 학술의 시작은 박물관에서부터잖아요. 도배 학술의 기본이 있어야 되겠다 싶어 생각하게 된 거죠. 이때까지 돈 벌어서 이곳에 다 투자했어요.”

해외 진출도 계획 중이다. 앞서 아르헨티나와 미국·프랑스에 있는 한국문화원의 도배를 직접 담당했고 태국·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는 도배 공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현재 모 기업과 MOU 체결 단계까지 간 상태예요. K-푸드, K-팝이 유행인 것처럼 해외에서도 K-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요. 산업 연수생들을 우리나라로 들여서 명장인 제가 교육하고, 그들이 돌아가서 K-인테리어를 전파하고. 또 우리나라 청년들이 해외에 나가서 도배일을 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려고 해요. 후배들이 제 기술을 잘 배워서 제2·3의 명장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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