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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선 행정지도, 뒤에선 담합 적발

앞에선 행정지도, 뒤에선 담합 적발

공정거래위원회의 활동 폭이 넓어졌다. 지난해 사상 최고의 과징금을 부과했고 올 들어서는 소주업계 담합을 적발했다. 공정위는 설탕, LPG, 소주 등 서민생활과 직결되는 품목의 담합을 적발해 소비자 후생을 키웠다는 명분을 앞세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우려의 소리도 있다. 공정위가 산업적, 행정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실적 위주로 간다는 것이다. 관련 업체들은 “국세청, 금감원에서는 가이드라인을 따르라고 하고, 공정위는 그걸 담합이라고 한다”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공정위는 공정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있을까?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해 11월 12일 서울 서초동 공정거래위원회 심판정에서 6개 LPG 공급 업체에 대한 담합 여부 판단을 위한 전원회의를 시작하고 있다.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해 11월 12일 서울 서초동 공정거래위원회 심판정에서 6개 LPG 공급 업체에 대한 담합 여부 판단을 위한 전원회의를 시작하고 있다.

지난 2월 14일 온 국민을 열광케 한 밴쿠버 겨울올림픽 남자 1500m 쇼트트랙 결승전. 8바퀴를 돌아 결승선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정수 선수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순위를 가리는 경기지만 5명의 선수는 출발 신호와 함께 엎치락뒤치락하지 않았다. 5바퀴째까지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출발 때 순위를 유지하며 차분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5바퀴째까지 경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담합을 하고 있었던 걸까? 4년간의 노력을 평가받는 올림픽 경기에서 담합을 시도하거나 그렇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일부 성미 급한 시청자나 관중은 8바퀴 중 반 이상을 뭉쳐서 다니는 선수들에게 야유를 보낼 수 있다. 더 다혈질인 사람은 선수들이 짰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수들은 정중동(靜中動)의 움직임 속에서도 치열하게 상대방을 탐색한다. 이런 측면은 담합인지 아닌지 조사할 때에도 고려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가격만으로 담합을 판단한다면 쇼트트랙 선수에게 처음부터 왜 최고 속력으로 달리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독과점의 폐해를 해소하고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런 상태가 소비자 이익을 극대화하고 기업들의 생존력도 키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격렬한 경쟁만이 최선이라고 믿고 독려해 출혈 경쟁을 할 경우 결과가 꼭 바람직하게 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른 정부기관인 국세청이나 금융감독원 등이 기업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2~3년간 공정거래위원회의 활약상은 그런 차원에서 의구심을 갖게 한다. 공정위는 지난 2월 소주업체 11곳에 가격 담합 혐의로 27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애초 지난해 11개 업체에 2000억원 이상을 부과한 것에 비해 대폭 줄었지만 소주업계는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공정위는 소주업체가 사장단 친목 모임을 통해 가격 인상 여부와 시기, 인상률 등을 협의했다고 판단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소주업체들은 업계 1위인 진로가 먼저 인상된 가격을 국세청에 신고해 행정지도를 받으면 나머지 업체도 비슷한 비율로 가격을 인상했다. 실제 2007년 5월 진로가 참이슬의 출고가격을 4.92% 올리자 곧이어 다른 업체들이 3.75~5.41% 가격을 인상했다.

2008년 12월에도 진로가 5.9% 인상하고 다른 업체들이 뒤이어 3.25~7.1% 가격을 올렸다. 공정위는 행정지도 여부와 관계없이 업체들이 사전 또는 사후에 모여 가격 협의를 했다는 점이 ‘부당한 공동행위 금지’라는 공정거래법 제19조에 위반된다고 설명했다.



소주업체 첫 담합 과징금에 반발

▎소주 업체도 최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가격 움직임을 보였다고 공정위에 담합으로 적발됐다.

▎소주 업체도 최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가격 움직임을 보였다고 공정위에 담합으로 적발됐다.

소주업체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간 소주업체들은 비슷한 시기에 가격을 인상해 왔지만 이전까지는 공정위에 담합으로 적발되지 않았다. 소주 가격 결정권을 사실상 국세청이 쥐고 있다는 현실이 고려된 측면이 크다. 주세법 제40조 등은 국세청장이 소주 등 주류 가격을 통제할 수 있도록 규정해놨다.

소주, 맥주 등에는 주세, 교육세, 부가가치세 등 최고 약 113%의 높은 세율이 부과되며, 주류산업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목적’에 의해 통제를 받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공정위는 “국세청의 행정지도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행정지도를 빌미로 사전 또는 사후에 사업자들이 가격 인상 등을 별도로 합의한 것이 문제”라고 밝혔다.

공정위는 국세청의 행정지도는 선두업체인 진로의 가격에 한한 것이고, 행정지도를 받기 전에 소주업체들끼리 신제품을 출시하거나 용량을 조정해 가격을 6~7% 올리기로 담합했다고 설명한다.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은 한 조찬강연에서 “지난 10년간 소주 가격 추이를 보면 가격을 올린 날짜도 같고, 인상률과 심지어 도매가격도 같다”며 “소주 사업자들이 국세청을 핑계 삼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소주업계 관계자는 출고가 기준 800원에 불과한 소주 한 병 가격을 감안할 때 몇 십원에서 몇 원 차이도 작은 것이 아니라면서 “공정위가 업계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일반적인 시각에서 담합으로 몰았다”고 주장했다.

한국주류산업협회 이종진 상무는 “공정위에서 행정지도를 인정하면서 담합했다고 하는 것은 무리”라며 “어느 업종이든 친목 모임이 있는 것인데, 일부 업체에서 업계의 관심사인 가격 인상에 대해 얘기한 것도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소주업계 고위 관계자는 “소주는 서민용 술이라는 이유로 역대 정부에서 가격을 통제해온 제품”이라며 “지금도 그런 관행이 여전한데 어떻게 자유경쟁을 하라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손보사들 공정위 상대 대법원 상고

또 다른 문제제기는 산업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소주처럼 지역적 구도가 견고하고 원가 구조가 단순하며 유통망이 사업의 성패를 결정할 경우 가격 경쟁으로 시장 점유율을 좌우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예를 들어 대구·경북지역 소주인 금복주가 진로에 비해 50원 싸다고 해서 서울 소비자가 그 지역으로 가서 소주를 사서 마실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업체들로서는 가격 경쟁을 굳이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오히려 가격은 전체 추세와 맞춰 가면서 지역 유통망이나 지역 브랜드로서 마케팅을 강화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다. 지방 소주업계 관계자는 “진로의 가격은 소주업계의 바로미터”라며 “시장 점유율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게 뻔한데 혼자 가격을 내리는 경영자가 어디 있느냐”고 되물었다.

이처럼 일률적인 소주 가격은 겉으로 볼 때 담합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지역별 과점 형태를 띤 산업 특성이나 규제당국의 행정지도 등이 작용한 결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주장이다.

자유기업원 박양균 시장경제팀장은 담합을 없애는 방법으로 “진입 장벽을 없애면 언제든지 잠재적 경쟁자들, 즉 새로운 기업이 시장에 진입하기 때문에 비정상적 이윤을 유지할 수 없다”면서 “정부는 사후적으로 담합을 가려내기보다 제도적으로 인허가, 행정지도 등으로 진입 장벽을 없애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07년 손해보험사를 상대로 담합 판정을 내린 결정에 대해서도 손보사는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법원에서는 2008년 “과징금 부과는 정당하다”며 공정위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407억원의 과징금을 문 손보사들은 “제도가 바뀌는 과도기에 금감원과 공정위의 인식 차로 억울하게 업계만 피해를 봤다”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공정위는 당초 10개 손보사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8개 손해보험 상품의 보험료율을 공동 결정한 사실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공정위가 가장 문제 삼은 것은 보험료를 결정하는 ‘할인할증률(SRP)’이다. 공정위는 당초 심사 보고서에서도 보험사별로 달라야 할 SRP가 모두 비슷하게 책정된 것은 담합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손보사들은 상품의 차별성을 두는 것도 힘들고, 10개 손보사가 좁은 시장 안에서 영업경쟁을 하고 있어 공통적인 보험료를 제시하지 않으면 과당경쟁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역 내 할인마트의 상품 가격이 사실상 비슷하다는 것과 같은 논리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경쟁업체와 같은 가격으로 조정하는 것을 담합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당시 담합 결정 과정 중 금융감독원의 보험료 행정지도에 대해 공정위는 금감원이 보험가격을 규제할 법적 근거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정재찬 당시 공정위 카르텔조사단장은 “보험료율 자유화 과정에서 일부 금감원 직원이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사업자 간 보험료율을 유사하게 결정토록 행정지도를 했더라도 이는 법령상 구체적 근거 없이 행한 행정지도라 판단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개별 금융회사가 금감원의 행정지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금융업계 현실을 감안할 때 공정위의 주장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또 다른 손보사 관계자는 “수십 년간 보험개발원 보험료율을 이용하다가 갑자기 보험료 책정이 자율화됐지만 통계 부족 등으로 자체 순보험료율 개발 여력이 부족했다”며 “완전 가격 자유화로 가는 과도기적 상황인 점을 공정위가 감안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러 이유로 사회적 파장이 크거나 물가 관심 품목 등은 정부의 행정지도나 비슷한 형식으로 규제 아닌 규제를 받는다.

소주, 보험 외에 통신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통신업계에 ‘과열 마케팅 자제’를 부탁했다. 단말기 보조금이 사실상 가격 할인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열 마케팅 자제는 가격 경쟁 자제 요청으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몇몇 업종은 정부에서 수시로 가이드라인이나 지침, 행정지도 등을 통해 업계에 사인을 주고 있다.



과징금 불복 소송 48%로 높아져지난해 공정위의 담합 적발 중 사상 최대 과징금 기록(6689억원)을 세운 LPG업계의 담합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공정위는 2003년 이후 6년 동안 6개 LPG 업체의 ㎏당 평균 판매가격이 1원 이상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이들 업체가 모두 72회에 걸쳐 판매가격 관련 정보를 교환했다는 이유를 들어 사상 최대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에 대해 LPG업계는 “공정위는 업체별 공급 가격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했으나 업계의 가격 산정 방식이 큰 차이가 없고 원가 반영 요소가 비슷해 생긴 결과”라며 담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일부 경제학자도 지난해 말 공정위에 업계와 같은 주장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박병형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 등은 LPG 시장에서의 가격 일치 경향은 시장의 특수성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 담합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취지의 주장을 제시했다. LPG의 경우 제품 차별화가 쉽지 않은 ‘동질적 재화’인 데다 6개 LPG 사업자가 과점적인 시장을 형성하고 있어 업체 간 가격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논리다.

공정위가 문제 삼는 업종들은 상당 기간 정부의 행정지도나 가격 통제를 받아왔다. 업계에서는 “앞에서는 정부 정책에 협조해 달라고 하고 뒤에서는 담합으로 몰면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물론 공정위의 활동이 기업들의 불공정한 경쟁을 바로잡아 소비자는 물론 정당한 경쟁을 원하는 신규, 후발 사업자들에게 도움이 된 경우도 많다.

하지만 공정위의 최근 활동을 보면 공정위가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감시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도 있다. 공정위의 담합에 대한 시정 실적은 2003년 23건에서 2008년 65건으로 급증했다. 과징금 부과 비율도 2003년 9건 39.1%에서 2008년 43건 66.2%로 크게 늘었다. 이에 따라 기업의 불복 소송 비율도 증가추세다.

지난해 민주당 홍영표 의원이 배포한 자료를 보면 불복 소송 비율은 2007년 18.1%에서 2008년 48.2%로 높아졌다. 2009년 6월까지는 56.1%로 더 높아졌다. 또 지난 정권 때는 기업, 특히 재벌의 지배구조 문제에 집중했던 공정위가 현 정부에서는 서민생활 안정이라는 정부 정책에 맞춰 파급력이 큰 특정 품목의 담합 조사에 지나치게 집중한다는 비판도 있다.

애초 2000억원이 넘었던 소주업계 과징금이 결과적으로 10분의 1 수준인 272억원으로 줄어든 것에 대해 공정위도 “정부의 물가안정 대책에 부응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공정위가 물가안정 기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공정위가 지나치게 주관적인 판단으로 사안을 해석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 기업인은 “공정위 조사관들이 조사 나오면 이미 기업은 과징금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면서 “그들이 검사이면서 재판관이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유럽연합에서도 공정거래당국이 조사와 판결을 겸하는 것에 대해 심각한 회의론이 일고 있다.

공정경쟁은 무조건 가격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기업들이 정상적인 경쟁상황 하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야 소비자에게도 이익이 돌아간다. 공정위는 소비자단체가 아니라 법 집행기관이라는 걸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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