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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트라브존] 옛 소련 문화권과 공존하는 흑해 최대도시

[터키 트라브존] 옛 소련 문화권과 공존하는 흑해 최대도시


트라브존의 첫 인상은 투박하고 탁하다. 겨울 트라브존의 길목에는 오후 3시만 넘어서면 어둠이 내린다. 터키 여행의 로망인 이스탄불, 카파도키아, 안탈리야 등의 화려한 잔영을 이곳에서 섣불리 찾아보기는 힘들다.

흑해 최대 도시라고 하지만 길목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복잡다단하다. 도심 메이단 공원에 나서면 러시아인의 얼굴과 흔하게 마주친다. 트라브존은 흑해를 사이에 두고 그루지아 등의 옛 소련 문화권과 맞닿아 있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주민은 이곳에 넘어와 둥지를 틀었다. 실제로 도심 노천카페에서 햇살을 즐기는 러시아인의 정취는 방문자의 모양새가 아니다.

서쪽 끝자락 이스탄불에서 출발하면 동북부 트라브존까지는 버스로 16시간을 쉴새 없이 달려야 한다. 언어만 같을 뿐 물리적인 거리가 멀다. 반면 그루지아 등으로 향하는 여객선과 버스는 트라브존에서 서너 시간이면 닿는다. 트라브존은 예부터 러시아뿐 아니라 이란 등으로 향하는 교차로의 성격이 짙었다.

이곳에서 오히려 낯선 이들은 구릿빛 동양인이다. 서너명만 지나쳐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된다. 시선에서 느껴지는 눈빛은 이물감이 아니다. 신비로움과 호의다. 뒷골목 청춘들에게 담뱃불을 빌려도, 은근슬쩍 노천바 의자에 잠시 걸터앉아도 양손을 살짝 들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검푸른 바다에 기댄 보즈테페 언덕본토 트라브존 주민에게 느껴지는 정서는 살가움이다. 흑해가 더 이상 탁하지 않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도 비탈길 골목에서 만나는 주민들의 웃음 때문이다. 사실, 바다가 검은 색을 띠는 것은 단절의 이유가 크다. 사방이 육지로 싸인 내해이기 때문에 산소가 부족해 생기는 일종의 자연현상일 뿐이다. 터키사람에게 오히려 흑해는 ‘손님을 좋아하는 바다’라는 정겨운 의미로 오랫동안 인식돼 왔다. 지리상의 단절은 지중해 연안의 화려한 도시와는 다른 풋풋한 개성을 잉태했다.

한 발자국 물러나 바라보면 트라브존은 대비가 강렬한 도시다. 도심의 가옥은 해안과 산자락 사이의 비탈길에 가지런하게 정렬해 있다. 바다는 검고, 지붕은 붉으며, 도시의 배경이 된 산자락은 계절이 흐르면 녹음으로 채색된다.

트라브존을 한눈에 감상하는 방법은 보즈테페 언덕에 오르는 것이다. 도심 메이단 공원에서 간이버스인 돌무쉬를 타면 보즈테페 언덕에 10분이면 닿는다. 언덕 위의 전경은 흑해 연안 도시의 편견을 아름다움으로 빠르게 전이시킨다. 언덕 꼭대기 주변으로는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노천 테이블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트라브존 청춘들에게 이곳은 데이트코스이자 한낮의 한적한 아지트다. 터키 ‘차이’는 주문하면 주전자 채로 넉넉하게 나온다. 트라브존에서 홍차의 산지로 유명한 리제까지는 지척거리다. 이곳 차는 좋은 이웃 도시를 둔 덕에 맛이 깊으면서도 은은하다.

차이 맛보다 가슴을 먹먹하게 적시는 것은 테이블 아래로 펼쳐지는 풍광이다. 비탈길에 가득 늘어선 붉은 지붕과 모스크 사이로 검푸른 흑해는 끝없이 이어진다. 검고 붉은 물결 너머 언덕 위로 다가서는 바람은 정갈하다. 단 한순간의 강렬한 장면은 언덕에서 조우한 도시와 흑해의 단상을 추억으로 아로새긴다.

보즈테페 언덕에서는 다운타운까지 발품을 팔아 볼 일이다. 내리막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 비탈에 기댄 사람들의 일상과 4,5층 높이로 늘어선 가옥이 낱낱이 다가선다. 해변까지 30여분간 이어지는 이 길이 참 예쁘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이곳 아낙네들이 삼삼오오 모여 뜨개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금을 실로 짜듯 엮어 만든 장신구인 ‘하스’를 만드는 풍경이다. 터키 사람은 유달리 금을 좋아한다. 특히 트라브존 일대에는 ‘하스’를 팔찌처럼 차고 다니는 게 오래전부터 성했다. 최근에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금 대신 은으로 된 ‘하스’를 팔기도 한다.

도심 거리는 메이단 공원을 중심으로 미로처럼 뻗어 있다. 공원 뒤쪽 길로 접어들면 변두리로 향하는 돌무쉬가 빼곡하게 정렬해 있다. 트라브존의 명동격인 ‘우준’ 거리는 인파로 북적거리고 해변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세련된 카페들이 눈길을 끈다. 클럽 등 트라브존의 화려한 밤문화는 터키 내에서도 꽤 정평이 난 편이다. 여성 전용 터키탕 ‘하맘’ 간판도 이례적인 모습으로 다가선다.

더욱 독특한 점은 거리의 가로등에 죄다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트라브존은 흑해 해산물 중 ‘하므시’(큰 멸치) 튀김으로 유명한 곳이다. 번화가에도 생선가게가 버젓이 들어서 있고 도시의 상징물도 하므시로 세워져 있다. 이 생선, 담백한 맛도 일품이다. 이스탄불에서 먹는 것과는 차원이 또 다르다.



절벽에 매달린 ‘쉬멜라 수도원’역사를 되짚으면 흑해 연안의 트라브존은 고대 그리스의 영향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후 로마, 비잔틴, 트레비존드 왕국, 오스만 제국 등 수많은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트라브존의 최대 유적은 ‘아슬아슬한’ 비잔틴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쉬멜라 수도원이다. 수직 암벽 아래 들어선 수도원은 ‘트라브존=쉬멜라 수도원’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낼 정도로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리는 필수 코스다. 수도원은 해발 1628m 지가나산 기슭에 매달려 있다. 5세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해 천년의 세월을 버텨 왔으며 절벽 밑 그리스도의 삶을 다룬 프레스코화도 7~13세기에 그려진 것이다.

수도사들이 은둔하며 기거했던 70여개의 방 역시 일반에 공개돼 있다. 아득한 수도원 산길을 따라 오르면 고행과 단절의 의미가 가슴깊이 새겨진다. 쉬멜라 수도원 가는 길의 마치카 마을은 소박한 흑해지역 도시의 단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찻집에 빼곡히 모여 담소를 나누는 할아버지들의 일상이나, 오가는 길손에게 차이 한잔 건네주는 생선가게 아저씨의 소박한 손길은 따뜻한 온기로 남는다.

도시로 나서면 아야소피아, 오르타히사르 등의 유적과도 조우한다. 흑해를 바라보며 서 있는 아야소피아는 이스탄불의 것과 이름이 같지만 규모는 아담하다. 빨간 지붕의 비잔틴 교회는 오스만왕국 때 이슬람 자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교회 옆 정원에는 차를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소담스런 노천카페가 들어서 있다. 14세기 트레비존드왕국 때 지어진 성벽인 오르타히사르에서는 트라브존의 시련의 역사가 묻어나고. 터키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의 별장은 수려한 정원으로 도시를 장식한다.

트라브존은 이방인에게 분명 낯선 도시가 맞다. 검푸른 흑해의 바람을 맞으며 걷는 행위 역시 이질적이다. 편견을 털어내면 도시가 따뜻하게 다가서는 것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깊게 배어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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