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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 흔드는 ‘GL논쟁’ - 대학-기업 괴리 메울 묘수? 무지한 발상?

일본 열도 흔드는 ‘GL논쟁’ - 대학-기업 괴리 메울 묘수? 무지한 발상?

일본 도쿄대학 전경.
대학을 둘러싼 ‘어떤 구상’이 일본에서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발단은 문부과학성이 지난해 10월 7일에 개최한 한 전문가 회의다. 위원을 맡고 있는 경영 컨설턴트 도야마 카즈히코가 ‘일본의 대학 대부분을 직업훈련소로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제안한 것이다.

10장으로 정리된 그의 프레젠테이션의 발표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대학을 G(글로벌)형과 L(로컬)형으로 이분화한다. G형은 극히 일부의 명문대와 학부로 제한하고, 세계에서 통용되는 우수 인재를 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외 대다수의 대학과 학부는 지역 경제의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 직업훈련을 실시해야 한다.’

L형 대학에서 경영학부는 마이클 포터의 전략론 보다 부기·회계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배우며, 법학부는 헌법이나 형법 대신 택지건물거래사 자격을 취득할 공부를 하는 식이다. 교원은 민간기업의 실무자 중에 선택하거나 기존 교원은 재교육을 받도록 하자는 것인데 간단히 말해 ‘도쿄대화(化)’가 진행 중인 대학 교육에 오로지 현장 학문을 다루는 라인을 새로 도입한다는 구상이다. 카즈히코는 2000년대 초 산업재생기구 대표를 맡아 일본항공(JAL)이나 가네보·다이에 등 다수 기업의 재생에 힘을 보탠 경영 컨설턴트다. 아베 신조 총리가 의장으로 참석하는 ‘마을·사람· 일자리 창생회의’ 위원으로도 참여 하고 있다. 그는 일본 경제의 70~80%를 담당하는 지역밀착형·노동집약적 서비스 산업을 활성화하는 데에는 노동자의 직업훈련을 지원해 고용을 유동화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제안을 해왔다.

이 ‘GL안’에 대학 교원들은 곧바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야마구치 지로 도쿄대 법대 교수는 “지적 활동을 세계에서 경쟁하는 엘리트가 독점하는 것이 낫다는 거만함에 어이가 없다”고 언론을 통해 격렬히 비판했다. 이와 달리 지방 국립대학의 한 교수는 “인문·사회계열 대학의 직업적 의식은 자동차 학교 이하라는 지적이 있다”며 “대학은 노동시장에 방치된 젊은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던졌다. 사실상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학생이나 산업계도 논쟁에 참여했다.
 세계적 인재 양성 vs 지역에 맞는 직업훈련
파장은 교육개혁을 경제개혁에 준하는 최우선 과제로 추진 중인 아베 정권의 정책 방향과 맞물려 확산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5월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 연설에서 “학술 연구에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실천적 직업교육을 실시할 것”이라며 “그 새로운 틀을 고등교육에 도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총리 자문기구인 교육재생시행회의가 제5차 제안을 발표했다. ‘실천적 직업교육을 시행하는 고등교육기관을 제도화 한다’는 게 골자다. 서두의 전문가 회의는 이 제5차 제안에 따라 설치된 것이다. 대학이나 전문학교 등 교육 관계자, 카즈히코 등을 포함한 경제계 출신 18명이 위원이다.

‘GL안’은 인터넷 공간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실제 전문가 회의에서 각 위원이 제출한 여러 제안 중 하나다. 아직 이 안을 아베 정권이 지지하거나 추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틀림없는 것은 ‘직업대학’ 창설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부성 고등교육기획과 관계자는 “전문가 회의의 목적은 직업교육의 틀을 만들기 위한 해결책을 고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 회의는 3월까지 월 1회 개최된다. 학교 창설을 위해서는 중앙교육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국회에서 학교교육법을 개정해야 한다. 짧으면 향후 3년 안에 ‘직업대학’이 탄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 ‘직업대학’ 얘기가 나오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대학의 초대중화가 있다. 1991년 설치 기준 완화의 영향으로 일본의 대학 수는 2014년 1.5배 증가한 781교(2014년)로 늘어났다. 대학진학률은 과거 20년에 걸쳐 서서히 증가하며 2013년에 55.1%(전문학교 제외)에 달했다. 이와 달리 졸업 후 학생들의 취업·고용환경은 상당히 열악하다. 총무성의 취업구조기본조사에 따르면 졸업하고 첫 취업 때 계약사원 등 비정규직 청년 비율은 2007년 10월~2012년 9월 사이 남녀 평균 40%에 달했다. 특히 여성은 약 50%가 비정규직이다.

이 수치는 1980년대부터 일관되게 증가하고 있으며 남성은 3.6배, 여성은 2.6배 증가했다. 첫 직장에서 비정규직이 된 사람 중 전직을 거쳐 정규직으로 고용된 사람은 25%에 그친다. 일단 한번 비정규직이 되면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다는 의미다. 그 이면에는 비정규직일 경우 기술을 향상시키는 OJT(직장내 훈련) 기회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와 함께 교육기회 격차도 뿌리 깊은 과제란 의미다.

조금 돌아가는 이야기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1969년 일본경제단체연맹(일경련)은 ‘능력주의관리 그 이론과 실천’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연공제 평가와 함께 사원을 직무수행능력을 근거로 서열화하고, 승진이나 임금을 연동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아베 총리 ‘직업대학’ 창설 예고
여기서 말하는 직무수행능력이란 전문성이라기보다 다른 직장에 배치돼도 업무를 해낼 수 있는 종합적인 능력이다. 이 능력은 기업이 종신고용을 전제로 지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육성한다. 때문에 신입을 뽑을 때 전문적인 기술 유무는 상관없다. 이른바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는 ‘소재’로서 학생을 채용해온 것이다. 기업이 학생의 전문성을 묻지 않게 되자 대학 역시 학생에게 직업적인 교육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대학이 아카데미즘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산업계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95년 이런 흐름은 크게 바뀐다. 버블경제 붕괴 후 기업을 둘러싼 치열한 환경 변화 속에서 일경련은 ‘신시대의 일본적 경영’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한다. 종래 장기 고용과 단기 고용을 합친 ‘고용 포트폴리오’라는 사고방식을 개혁 방향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일련의 규제완화가 시행됐고, 1999년 이후에는 거의 모든 업종에서 노동자 파견이 가능해졌다. 전문성이 없어도 기업이 책임감을 갖고 사원의 능력을 키워주는 구조는 사실상 붕괴한 것이다.

극적인 변화에 맞게 대학도 대책을 강구했다. 2000년 무렵부터 ‘커리어 교육’이라 불리는 직업교육 준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내실은 기업 분석을 중심으로 한 취업 지원 활동에 그쳤다. 본격적인 직업교육 노력은 거의 추진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노동 정책연구·연수기구의 하마구치 케이치로 총괄연구원은 ‘국제적으로 비교하면 일본에 아카데믹한 대학만 있는 것이 오히려 이례적”이라며 “독일처럼 현장 실습 중심으로 배우는 대학이 있고, 이런 대학이 학생들 사이에 인기를 끄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라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의식이 정책에 반영되기 시작한 건 민주당 정권하인 2011년 즈음이다. 그 해 1월 중앙교육심의회는 “실천적인 인재교육은 기업의 역할이라는 사고방식에서 탈피해 대학이 자립된 직업인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모든 대학·단기대학 학생의 직업적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길러주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결론을 냈다.

지난해 시작한 전문가 회의 또한 언뜻 이러한 흐름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문가 회의에선 대학 교육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세간에서 이렇게 화제가 된 GL안조차 논의 대상에서 거의 빠져있다. 사실 이 회의의 핵심은 전문학교다. 전문학교는 대학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기관의 하나다. 진학을 위한 곳으로 과거와 같은 인기는 없지만 지금도 동 세대의 20%가 진학하는 고등교육기관이다. 하지만 현실은 척박하다.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거의 받지 못하고, 졸업자에게 주어진 학위는 국제적인 호환성이 없는 등의 차별이 있다. 전문학교 업계에서는 이 격차에 대해 오랜 기간 문제 제기를 해왔다.
 대학진학률은 늘면서 청년 비정규직도 늘어
실제로 전문가 회의에서는 전문학교 측 위원이 활발하게 발언하며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일부 전문학교를 대학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직업대학’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베 정권과 문부과학성이 의도하는 방향과 일치한다. 물론 이미 직업교육을 위해 상당한 기능을 하고 있는 전문학교를 지원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방향으로만 논의가 진행되면 전문학교 학생보다 훨씬 많은 대학생을 둘러싼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

GL안은 결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다. 극단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찬반양론이 발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고용시장이 변화하는 가운데, 대학은 실학에 힘쓸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의제를 진지하게 제기한 것은 분명하다. 일본 사회가 대학의 직업교육에 대해 국민적인 논의를 시작할 시기를 맞이한 것은 아닐까?

- 일본 경제 주간지 주간동양경제 특약, 번역=김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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