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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주 한국VMD협동조합 이사장] 소상공인 돕는 전통시장 지킴이

[이랑주 한국VMD협동조합 이사장] 소상공인 돕는 전통시장 지킴이

이랑주 한국VMD협동조합 이사장은 “타인의 불편을 해소하려 고민할 때 스타트업이 가야할 길도 보인다”며 “돈은 그런 과정에서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랑주(42) 한국VMD협동조합 이사장은 ‘비주얼 머천다이징(Visual Merchandising, 이하 VMD)’을 소재로 스타트업을 꾸렸다. 정보기술(IT)이나 식음료가 주요 창업 소재인 시대에 이색적이다. 자신이 가진 전문성을 살린 창업이었다. VMD는 상품의 기획부터 판매 장소나 그 근처에 상품과 판촉물을 진열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설계하는 일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크고 작은 점포에는 내부(인테리어)뿐 아니라 쇼윈도나 외부에도 소비자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다양한 시각적 장치가 필요하다. 이런 장치는 소비자가 점포를 더 많이 찾아 물건을 구입하게 이끄는 중요한 요소다. 이 이사장과 같은 VMD 전문가는 기업 등에 이에 대한 맞춤형 전략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1993년부터 10년 넘게 이랜드와 현대백화점, 롯데백화점 등 유통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VMD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VMD가 한창 유행하면서 국내 기업들도 과학적 효과에 주목하던 때였다. “첫 직장인 이랜드에서는 회사가 지점을 새로 여는 과정에서 기획과 연출 등을 도맡는 업무를 했어요. 많이 배웠죠.” 현대백화점에서는 부산점과 울산점 등의 개점 때 층별로 기획하고 연출했다. 한번은 애써 상품을 연출했는데 뭔가가 안 좋아 보였다. 원인은 조명에 있었다. 독일 출신 조명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 VMD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국내 최초 VMD 전문 연구소 설립
대부분의 소비자는 쉽게 눈치 채지 못하지만 VMD의 위력은 만만하지 않다. 이 이사장은 점포 조명을 다시 예로 들었다. “의류를 파는 매장에서는 절대 형광등을 켜서는 안 돼요. 백색광 아래에서는 여성들의 기미·주근깨가 도드라져 보이거든요. 여성 소비자가 옷을 입어보고도 거울로 마음에 들지 않게 보일 가능성이 그만큼 크죠. 백열등을 켜야 하는 게 기본입니다.” 남성용 의류 매장에도 VMD가 중요하기는 마찬가지다. 보통 넥타이를 말아서 진열하면 하나당 15cm, 3번 접어서 진열하면 28cm, 걸어서 진열하면 76cm 정도 높이의 공간이 소요된다. 이에 딱 맞는 크기의 집기를 갖춰야 소비자가 볼 때 안정적이다.

과일·생선·정육 등 분야별로 필요한 조명과 집기는 천차만별이다. 예컨대 정육점은 붉은 조명을 써서 소비자가 신선한 고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과 다르다. 이 이사장은 “지나치게 붉은 조명을 비추면 소비자 눈에 고기가 검붉게 보여 거부감이 생길 수 있다”며 “아이보리 계통의 조명과 함께 비춰 고기가 선홍빛을 띠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틈틈이 초록빛 식물들을 함께 배치한다면 고기만 진열했을 때보다 소비자들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 같은 VMD 관련 지식을 두루 익힐 수 있었다.

창업은 우연한 계기로 결심했다. 직장인이던 이 이사장은 동네 전통시장을 찾았다가 좋은 상품이 엉망으로 진열된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소상공인들이 매출 감소로 어렵다던데 VMD가 접목된다면 이들에게도 매출 증대와 같은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창업을 결심했을 당시 사람들은 백화점·대형마트에나 VMD가 필요하지 전통시장에 그게 왜 필요하냐고 반문했어요. 아무도 안 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아무도 안 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시장에 VMD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그렇게 2006년 3월 이랑주VMD연구소를 설립했다. 국내 최초 VMD 전문 연구소였다.

이후 2011년 말까지 전국에 있는 전통시장을 다니면서 VMD 컨설팅을 했다. 정부로부터 비용을 지원받고 소상공인들에게는 무료로 도움을 줬다. 소상공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러는 동안 동서대 디자인IT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그가 쓴 여러 논문에는 VMD가 전통시장의 실질적 매출 증대에 효과가 있음이 입증돼 있다. 국내 1호 소상공인 맞춤형 VMD 전문가라는 별칭이 그를 뒤따랐다. 그럼에도 시련은 찾아왔다. 국내 전통시장 매출은 연간 30%씩 감소했고 시장 자체도 1년에 15%씩 사라졌다. 사업은 순탄치 않았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전 세계 전통시장을 둘러보며 연구하면서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훌훌 털고 1년간 덜컥 세계 일주를 했다. 멀쩡히 회사 잘 다니던 남편도 사표를 내고 그를 따랐다. 40개국 150여 시장을 둘러봤다. 영국 런던의 버로 마켓(Borough Market)은 산지 제품을 더 신선하게 보이는 법에 능했다. VMD는 우리나라 전통시장에 여전히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2013년 귀국한 그는 강원도·현대카드와 공동으로 강원 봉평 재래시장의 시설 등을 개선하는 ‘전통시장 활성화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1년간 100여개 점포가 그의 손을 거쳐 더 효율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USSO 등 5개 스타트업과는 힘을 합쳐 새로 한국VMD협동조합을 세웠다. 2012년 12월 시행된 협동조합기본법(3억원 이상이던 출자금 제한이 없어지고 200명 이상이던 협동조합 설립 동의자 수가 5명으로 줄어드는 등 설립 요건이 대폭 완화됨)이 그에게도 전환점이 됐다. 한국VMD협동조합은 집기·연출·디자인·건축 등 VMD 분야별로 전문가 역할을 할 수 있는 스타트업의 모임이다.

이 이사장은 협동조합 설립이 스타트업 운영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고 전한다. “사업을 할 때 가졌던 큰 애로점 중 하나가 인건비 문제였어요. 좋은 인재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기업을 만드는 건데 이들에게 급여를 많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면 인재가 빠져나가게 되고, 진짜 중요한 일은 못하고 해야 할 일만 하게 되는 악순환이 거듭됩니다. 아마 다른 스타트업의 공통적인 고민이 아닐까 싶어요. 협동조합은 하나의 스타트업이 큰 돈을 주고 못 사는 숙련된 전문가들끼리 협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인건비 부담을 덜게 합니다.”
 “일상의 불편, 창업 아이디어로 구체화”
현재 한국VMD협동조합은 롯데마트 등 대기업으로부터 집기류를 기증받아 국내 주요 전통시장을 개선하고 있다. 경기 오산의 오색시장 등이 이 이사장의 손을 거쳐 올해 안에 새 단장을 할 예정이다. 이밖에 한국VMD협동조합은 기업들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VMD 관련 매뉴얼을 제작하고, 기업들에 VMD 관련 컨설팅을 해주면서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스타트업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해서 돈을 더 많이 벌 건지부터 생각하면 다 망해요. 내가 가진 재능으로 타인의 불편을 어떻게 해소해줄까 고민하면 돈은 그런 과정에서 저절로 따라오는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전통시장의 불편을 관찰한 끝에 창업할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일상에서 불편한 부분이 있었다면 꼼꼼히 기록해뒀다가 나중에 창업 아이디어로 구체화할 수 있겠지요.” 그의 다음 계획은 최근 기증받은 집기를 소상공인들이 자유로이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를 통해 나날이 진화하는 전통시장만큼 그의 꿈도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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