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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의 아버지', 백달원은 달랐다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①]

뜨내기 장사꾼과 맞춤형 서비스맨의 차이를 만들다

일찍이 정조 임금은 “이 세상은 변화가 무궁무진하여, 옛날과 오늘날 사이의 차이점을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그 이면에는 서로 비슷한 데가 있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과 감정의 작용이 같고, 시대가 융성하고 쇠퇴하는 흐름도 대개 유사하다.”라고 하였다. 21세기에 ‘조선의 부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부의 원리, 부자로서의 마음가짐과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을 것이다. 더욱이 조선은 부자가 되기 힘들었던 시대였다. 그 어려움을 뚫고 부를 이뤘다면 한번쯤 살펴볼 만하지 않은가. 자,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난 2013년 ‘서문시장 패션대축제’ 모습.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보부상 거리 퍼레이드가 큰장네거리~한일극장 구간을 지나고 있다. [중앙포토]
남자는 고심했다. 주인집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한 지도 어느새 몇 달. 함경도 삼수갑산에 숨어들어 화전을 일구는 삶은, 매 순간이 만만치 않았다. 손에 물 한 번 묻혀본 적 없던 아내가 갖은 고생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자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겨울이 매서운 함경도에선 추위를 막기 위해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옷을 선호한다. 한데 수요에 비해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산 속에 사는 사냥꾼이 마을에 내려왔을 때나 겨우 구입할 수 있을까? 게다가 사냥꾼들은 가죽을 다듬지 않고 팔았기 때문에 소비자가 직접 가공해야 했다. 남자는 사냥꾼들을 찾아다니며 양질의 털가죽을 매입했다. 그리고는 솜씨 좋은 화전민 아낙들을 모아 보기 좋게 손질한다. 남자가 파는 털가죽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는데, 품질도 품질이지만 소비자의 불편을 해결해 준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제품을 단순히 소비자에게 중개만 한 것이 아니라, 상품의 가치를 높여 판매함으로써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한 것이다. 이 남자가 바로 고려말 조선초기의 거상이자 부보상(負褓商)의 아버지로 불리는 백달원(白達元)이다.
 
이 같은 성공 경험을 토대로, 백달원은 소비자의 수요를 파악하고 필요한 상품을 구해 직접 전달해 주는 방식, 이른바 등짐장수(부상)와 봇짐장수(보상)로 불리는 상행위에 나선다.(부보상은 부상과 보상을 합친 말이며, 보부상이라고도 부른다) 물산이 풍부한 곳에서 열악한 곳으로, 특정 산물이 생산되는 곳에서 그것을 구하기 힘든 곳으로. 수요와 공급의 공백을 이용하고, 지역간 시세차이를 활용하면서 그는 큰돈을 벌어들였다.  
 

수요와 공급의 공백 이용해 큰돈 벌다  

이 과정에서 백달원은 흉년으로 배곯는 사람, 관아에서 핍박받는 사람, 산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화전민을 부보상으로 끌어들여 상단의 규모를 키웠다. 부보상은 초기자본이 별로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절실한 만큼 더욱 열심히 장사에 임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다루는 품목과 유통지역도 넓혔다. 덕분에 백달원이 이끄는 부보상은 한반도 전역을 무대로 삼을 만큼 급속히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사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백달원은 걱정스러웠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물건을 파는 부보상은 자칫 상도(商道)를 어기기 쉽다.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생각에, 이 고을에 또 오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에, 바가지를 씌우거나 소비자를 기만하는 부보상들이 생겨났다. 이는 본인뿐 아니라 부보상 전체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따라서 물건만 팔고 떠나면 그만인 ‘뜨내기 장사꾼’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물건을 내 집까지 가져다주는 소중한 ‘서비스맨’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모든 부보상이 평소 행동거지를 단정히 하라고 강조했다. 사람으로서 신뢰를 주게 되면, 그 사람이 파는 상품에 대해서도 자연 신뢰가 생긴다는 것이다.  
 
백달원이 소위 ‘사물(四勿)’, 망령된 말을 하지 않는 ‘물망언(勿妄言)’,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는 ‘물패행(勿悖行)’, 음란한 짓을 하지 않는 ‘물음란(勿淫亂)’, 도둑질을 하지 않는 ‘물도적(勿盜賊)’의 네 가지 규칙을 제시한 것은 그래서이다. 이는 훗날 부보상의 4대 강령으로 자리 잡는데, 장사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규율을 먼저 강조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이 정도만으로 백달원이 시대를 대표하는 거상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탁월한 안목으로 사람에게 투자,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을 얻는다. 조나라에 볼모로 온 자초를 후원하여 킹메이커가 된 중국 전국시대의 거상 여불위처럼, 백달원은 일찍부터 이성계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백달원이 이성계와 처음 조우한 것은 함경도의 어느 전장이었다. 상행에 나서던 길에 여진족과 고려군의 전투에 휩쓸린 백달원은 숨어 지켜보며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고려군 지휘관이 큰 부상을 입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 지휘관의 용맹과 무예에 감탄하던 백달원은 순간 주저하지 않고 달려 나갔다고 한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자기 눈앞에서 명장이 죽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백달원은 지휘관을 지게에 짊어져 구출해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이성계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와 인연을 맺게 된 백달원은 이성계가 천하를 담아낼 만한 큰 그릇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성계가 전장에 나갈 때마다 휘하의 부보상을 동원하여 물자를 지원해주었다. 전투 중 곤경에서 구해준 것도 여러 차례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전국에 걸쳐있는 부보상 조직을 활용하여 이성계 일파를 위한 정보수집 및 여론 조성에 나섰다. 백달원은 이성계를 위해 들어가는 비용을 아끼지 않았는데,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훨씬 더 큰 혜택으로 돌려받게 된다.  
 

전국적 조직망으로 이성계 지원, 즉위 후 전매특허권 취득  

이성계가 소원을 말하라고 하자 그는 자신과 같은 부보상들을 돌봐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이성계는 부보상을 위한 중앙조합기관인 부상청(負商廳)을 설립하고 지역사무소인 임방(任房)을 전국 각지에 세우도록 했다. 또한 백달원을 전국 부보상을 통솔하는 오도도반수에 제수하고 ‘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이라 쓰인 도장을 하사하였으며, 부보상에게 목기, 토기, 어물, 소금, 수철(무쇠, 주로 가마솥을 만들 때 쓰인다)의 다섯 가지 품목에 대한 전매특권을 부여했다. 실로 파격적인 조치였다.
 
물론 이성계가 부보상을 우대한 것은 그들이 나랏일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부보상은 전국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사람들과 직접 대면한다. 지역의 동향을 파악하고 민심을 살피기 용이한 위치다. 따라서 부보상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면 효과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 장악력을 높일 수 있다. 지역에서 지역으로 옮겨 다니는 부보상을 통해 물산의 유통을 장려하고, 상업을 활성화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달원이 없었는데도 이 정도로 대우해주었을까? 백달원은 이성계에게 투자함으로써 부보상 전체에도 큰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백달원의 방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소비자의 수요에 ‘찾아가는 서비스’로 대응한 것, 상품의 가치를 높여 소비자의 호응을 이끌어낸 것, 상인으로서의 기본 자질을 중시하고 소비자의 신뢰를 받기 위해 노력한 것은 지금도 필요한 요소들이다. 돈을 버는 데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여기에 안목과 용기가 있다면 백달원이 그랬듯 사람에게 과감히 투자해볼 필요가 있다. 기대 이상의 성공을 가져다줄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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