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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英 지도층의 병역의식 차이

日·英 지도층의 병역의식 차이

수년전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을 신청하자 그 사무국 요원이 내한, 우리의 실상을 조사하고 돌아갔다. 이때 그들이 남긴 말은, “회원국이 되고 싶으면 알아서 하시오. 그러나 한국 교육은 창의력을 중시하지 않고 있으며, 독자적으로 개발된 과학, 기술이 매우 약합니다. 과연 일류국과 맞붙을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였다. 92년 미국은 전자 무기를 앞세워 이라크를 완패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이때 사용한 반도체 93종 가운데 92.5종이 일제(日製)였음이 밝혀져 세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만일 일제 반도체가 없었다면 미군은 제대로 전쟁을 치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전자 기술자인 가라쓰 하지메(唐津一)는 “이제는 죽어 저승에서 제2차 대전 때에 자살공격대로 전사한 친구들을 만나도 부끄러움이 없다. 오늘에야 미·일전쟁은 끝났다”는 말을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인문사회계열의 대학생은 모두 소집돼 그중에는 특공대로 지원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이공계의 학생과 과학, 기술자는 소집 면제가 되었다. 이때 교수들은 “너희들이 공부하는 일은 자살 공격대보다 나라를 위하는 것이다”고 힘주어 말했었다. 가라쓰는 전기과 학생이었으므로 징집 연기를 받았던 기술장교였다. 그는 늘 전사한 동료를 생각할 때마다 그간 과학 기술자로서 나라에 큰 공헌을 못했음을 자책하고 전후 일본 경제를 기술로써 부흥시킬 것을 마음먹었다. 드디어 일본 경제는 부흥되고 미국도 일본 기술을 무시할 수 없음을 자인할 정도가 된 것이다. 전후(戰後) 일본 경제의 주역은 전쟁중 징집연기를 받은 과학·기술자였다. 그들은 단순한 월급쟁이나 경영자가 아니라 기술·경제계에서 미국을 이기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편 영국 지도자들은 일선에서 앞장서지 않는다면 아무도 귀족으로서 우러러 보지 않으며 스스로 귀족임을 포기하는 결과가 된다고 믿는다. 영국 명문대학의 연구자나 교수는 대부분이 귀족 출신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이들은 자원해 일선에 섰다. 나이 또는 연구 업적으로 병역 면제가 될 수 있는데도 대부분이 자원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거의 확정된 H. 보스리는 자원해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스승 라더포더는 “그곳까지 갈 필요는 없었을 텐데”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캠브리지는 수많은 젊은 연구자들을 잃었다. 그러나 전후만 해도 캠브리지는 30명 이상이나 되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선에서 살아 돌아온 그들은 대신 죽어간 우수한 선배, 동료들을 늘 생각하며 몇 배의 노력을 했기 때문이었다. 학문상의 업적은 단순한 학습의 축적만으로 이뤄지지는 않으며 사명감과 건전한 지적 긴장 속에서 성취된다. 한국 중·고등학생의 연간 수업시간은 세계 최장이며 OECD가입국과 비교해도 훨씬 많다. 그러나 사명감은 커녕 오직 속물적인 출세주의에 물들고 있다. 명문대학은 있어도 지도자의 책무의식을 함양할 아무런 제도적 장치가 없다. 대학은 수직적인 자리매김이 되고 그 서열은 사법고시 합격자 수로 정해지는 경향마저 있다. 최고의 명문을 자처하는 서울대학 재학생의 80%가 고시공부에 몰두하며, 대학은 고시학원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고시합격자 가운데 인권운동가, 진지하게 학문으로서 법학의 연구자가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고시의 전통은 장원급제(壯元及第)가 목적이었던 조선시대의 과거(科擧)에 있다. 그것은 입신출세를 최대 목적으로 하고 자신의 호강은 바래도 지도자로서의 책무의식을 외면했다. 18세기의 철학자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조선이 갱생하는 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대부의 자제에게 호복(군복)을 입혀 일선에 배치할 것”을 강조했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났다. 오늘날의 난국을 대처하는 일은 오직 지도자의 책무의식과 사명감이 있는 연구풍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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