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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빌려줬다고 '감놔라, 배놔라'?

돈 빌려줬다고 '감놔라, 배놔라'?

일러스트 김회룡
현대상선 ‘김충식 사장 퇴임 사건’에 대해 산업은행이 목소리를 내자 기업들이 걱정하고 있다. 기업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하나 더 느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소리가 적지 않다. 기업관계자들은 대개 “채권자는 훈수두는 정도로 그쳐야지 경영의 세부적인 문제에까지 간섭하는 건 월권”라는 의견이다. 하지만 상대가 채권은행이다 보니 기업들로서는 함부로 의견을 말하기도 쉽지 않다는 조심스런 표정들이다. 괜히 은행권에 밉보였다간 ‘괘씸죄’로 찍혀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채권은행이 돈 빌려간 기업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기업관계자들은 채권은행이 주주처럼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문제가 있지않느냐는 의견을 보였다. A전자의 한 임원은 “채권은행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전제한 뒤 “다만 포괄적인 방향, 특히 재무나 채권회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닌 경영활동과 판단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월권행위”라고 꼬집었다. 구체적인 경영에 간섭하려면 채권은행이 출자전환을 통해 직접 개입하면 된다는 설명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밖에서 간섭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는 것. “경영자에게 위임된 경영권에 대해 이해관계자들이 다 간섭한다면 경영자는 불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또 다른 임원은 “은행은 채권을 회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심을 가지면 되는 것”이라면서 “지금 산업은행이 인사에 까지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현대 살리기’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즉 진작에 시장원리에 의해 채권을 회수했으면 간단한 문제를 워크아웃이니 신속인수제니 하면서 무리하게 지원하다가 결국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맺고 끊는 것을 분명히 하면 되는데 조금씩 조금씩 지원하다가 이제 경영사항까지 간섭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영자들의 고유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가 올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중견 대기업은 B그룹의 한 임원은 “경영자가 결정과 판단에는 기업내부의 분위기, 경영과 관련된 여러 정황과 예측 그에 따른 책임이 들어가 있다”면서 “단순히 돈을 많이 빌려줬고, 이익이 많이 걸려 있다고 해서 외부에서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은 아마추어 경영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꼬집었다. 프로야구팀에 엄연히 감독이 존재하는 데 구단주가 경기마다 작전을 지시하면 팀이 잘 되겠느냐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성적이 않좋을 경우 구단주는 감독을 갈아치우든지, 아니면 구단을 팔면되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작전을 지시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경영자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돈 가진 사람이 최고’라는 식으로 흘러가면 경영자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 대기업의 임원은 “현 정권들어 재벌개혁이 가장 큰 정치적 목표 중에 하나고, 현대는 재벌개혁의 가시적 성과”라고 했다. 그는 또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이번 사건에 대해 정부와 어떤 형태로든 조율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번 사건을 잘 보면 새로운 형태의 정부 개입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현 정부가 꾸준히 은행을 통한 재벌개혁을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뿐 아니라 민간은행들도 정부가 대주주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은행에 의한 자율적 개입이 되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부의 입김을 배제할 수 없다. 정부가 재벌개혁에서 대주주의 전횡을 견제하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듯이 지금 은행도 정부가 대주주인 이상 정부의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재계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다른 은행들도 채권자라는 명분으로 기업들의 경영권에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현대상선’의 특수한 처지로 보는 의견도 있다. 우선 현대상선이 독립적인 경영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된다는 점이다. 산업은행의 회사채 신속인수에서 알 수 있듯이 채권단의 지원 없이는 지탱하기 힘든 회사다. 은행의 경영권 간섭을 우려하는 기업인들조차 현대상선의 경우 그렇게 할 빌미를 주고 있었다는 데는 동의했다. 기업이 은행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면 기업스스로 생존해 나갈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A전자의 임원은 “현대상선의 경우 채권은행에 의존도가 높다”면서 “그러다보니 채권은행도 간섭을 할 수 있고, 경영자와 대립할 힘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앞으로 회사 경영을 잘하지 않으면 이런 사태가 또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경영자들이 이번 사태를 ‘그냥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심정으로 볼 것이라는 뜻이다. C그룹의 한 임도 “이번 사건만 보면 산업은행의 개입이 꼭 잘못 됐다고만 할 수 없다”고 얘기했다. 그는 “오너의 지분이 얼마 안 되고, 부채가 많으면 채권자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면서 “특히 은행도 이제 채권손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고, 현대의 경우 사실상 은행에 의존해 목숨을 연명해 가고 있기 때문에 경영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견 D그룹의 한 임원은 “껍데기만 남은 회사의 대주주가 무슨 할말이 있나”고 반문했다. 채권은행이 사실상 주인인 상태에서 채권은행도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시중은행의 재무담당 임원은 “일반적으로 채권은행은 경영자의 변동에 대해 의견제출이나 사유조사는 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간섭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했다. 다만 “현대상선의 경우 산업은행이 대략적으로 자금이나 경영현황에 대해 간섭(involve)하고 있었다. 이번에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대해 강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약정이나 협의사항을 위반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신현암 수석연구원은 “채권자도 투자자(stakeholder)이기 때문에 회사의 경영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투자자들은 자기의 의견과 반(反)할 경우 채권회수 등을 거론하며 의견을 제시한다. 산업은행의 이번 ‘발언’이 의견제시였는지, 구체적인 경영간섭이었는지에 따라 이번 사건을 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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