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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감독권 남용도, 예속도 안 된다

금융감독권 남용도, 예속도 안 된다

“금융감독 정책을 독자적·독립적으로 수립하지 못하면 제2의 경제-금융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 금융감독원이 출범한 1999년 1월4일 이헌재 초대 금감원장(초대 금감위원장 겸임)이 창립 기념사에서 한 말이다. 외환위기의 여진이 남아 있을 때라 이런 그의 얘기엔 울림이 있었다. 이 날 그는 “단기 (금융)정책은 정부에 맡기고, 단기 판단이 중장기 정책방향에 맞는지 견제하는 기관으로 (금감원이) 독립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했다. 금융감독 기능의 독립과 정부에 대한 견제가 금융 개혁의 설계사 이헌재가 노린 금감원의 역할이자 위상이었던 셈이다. 그의 이런 발언 내용이 알려지자 재정경제부쪽에서 “금감원은 재경부가 수립한 중장기 금융정책의 틀 안에서 시장 상황에 맞는 단기 대응을 주로 해야 하는데 이원장이 설립취지를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는 반응이 흘러나왔다. 어떻든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올해 말이면 은행, 증권, 보험 등 3개 감독원에 신용관리기금까지 흡수한 통합 금감원이 출범한 지 3년이다. 금감원 통합에 앞서 98년 4월엔 금융감독위원회가 닻을 올렸다. 당시 금융감독기구 통합의 명분은 금융시장에 대한 종합적인 감시기능과 총괄 감독기능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통합 전 4개 감독기구 합쳐 1천8백명에 달했던 인력은 5백여명 줄어들었으나 그 후 다시 늘어나 지금은 통합 직후보다 2백명 늘었다. 예산 규모도 늘어나고 있다. 통합 첫해인 99년 1천3백25억원이었던 금감원의 예산은 올해 1천5백29억원으로 늘었다. 통합으로 대형화, 겸업화 등 금융업의 세계적인 추세에 대응하겠다고 했지만 금감위-금감원의 감독당국으로서의 전문성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리 후해 보이지 않는다.

전문성, 글쎄? 금융 파생상품도 늘어나고 리타워텍 사건, 이용호 사건 등에서 드러나듯 금융 사기와 첨단 금융기법간의 경계가 모호해져 감독의 전문성에 대한 기대가 높지만 현실은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기존 인력들은 수용성이 떨어지고 외부 전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은 미비하다. 몇 차례 외부 전문가들을 받아들였지만 텃세에 밀려 대부분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떠났다. 현장 출신의 외부 전문가들을 기용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급여체계를 마련하고 이들을 위한 고용안정책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전문성은 특히 각종 금융 스캔들로 화두가 되고 있는 사전적 위험 관리의 필요조건이다. 금감원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은 발족 초기 직원들간의 ‘화학적 결합’을 노려 인력개발실이 앞장서 출신을 무시하고 서로 섞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통합 전과 다른 분야로 발령받은 직원들은 당시 6개월가량 직무교육을 받았다. 직원의 3분의 1이 교육을 구실로 빠지자 나머지 직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구조조정으로 업무는 폭주했다. 일부 언론들이 이 중요한 시점에 무슨 교육이냐고 톤을 높였다. 교육 중이던 직원들은 업무에 복귀했고, 전문성 향상을 위한 교육은 폐지되고 말았다. ‘건수 올리기식’ 검사도 비일비재했다. 한 투신사 관계자는 “당시엔 업무 내용도 잘 모르고 검사를 나오는 경우가 태반이라 검사를 받는다기보다 금감원 직원을 교육시키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투신사 관계자는 “정기검사 때면 빈 손으로 돌아갈 수 없지 않느냐며 협상을 해오고, 안 내놓으면 비품의 구입 단가 같은 자질구레한 문제를 구실로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용호 게이트에서 금감원측은, 이씨로부터 해외 CB(전환사채)를 사들인 김영준씨가 회장으로 있는 대양금고를 밀착 감시 대상으로 지목하고 세 차례나 검사를 했지만 대양금고와 이씨측의 차명거래 등 기본적인 위법 사실을 적발해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금융계 일각에서 금감원 직원들이 이씨측을 봐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검찰 수사 결과 금감원 직원들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금감원은 이에 대해 “단순한 사무착오였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봐주기 못지않은 무능 케이스이다. 피감기관들은 아직 전문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출범 초보다는 많이 높아졌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금감원 직원들이 실제 이상으로 도덕성을 의심받는 것은 금융 스캔들이 터졌을 때 검찰에서 사건 당사자를 조사한 금감원 직원들을 같이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외부에서는 당사자들과 유착된 사실이 없더라도 의혹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최근 금감위가 강제조사권을 요구한 배경엔 이런 사정도 있다.

‘부적절한 거래’도 피감기관들은 또 금감원이 투명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표적으로 검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을 지적했다. “투신사의 불법 편출입 한도 위반 사례를 수십 번 조사했지만 한 번도 결과를 공개한 적이 없습니다. 소액의 벌금을 부과하더라도 시장과 투자자들에게 알려야 감독 기능이 활성화되죠. 시장의 안정이라는 명목으로 쉬쉬하는데, 정현준, 진승현 사건도 그런 식으로 쉬쉬하다 터져나온 겁니다.” 그는 이러다 보니 “시장 참여자들은 정보 부족으로 갈 길을 잃어 방황하고 금감원은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일종의 정보의 비대칭성이다. 검사권을 지렛대로 한 ‘부적절한 거래’도 문제다. 업계에서는 현대투신 매각 문제와 관련해 현대증권이 말을 듣지 않자 특별검사를 활용해 강제로 해법을 끌어낸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고 있다. 금융감독권 문제의 최대 쟁점은 그러나 금융감독위원회와 금감원간의 역할 분담이다. 금융감독 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느냐, 세부적인 액션 프로그램을 짜고 이를 직접 집행하느냐의 차이일 뿐 두 기구의 업무영역은 본질적으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기구의 차이점은 금융감독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금감위와 이를 보좌하는 사무국의 구성원들은 위원장을 포함해 공무원 신분인 반면 금감원은 민간 조직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공무원 조직과 민간 조직으로 이원화돼 있는 금융감독 체제는 언제든 내연(內燃)할 수 있는 불씨를 안고 있다.

민관 이원화체제 ‘불씨’ 그 불씨를 묻어 놓은 사람이 이헌재 전 위원장이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기업 구조조정의 추진 주체였던 구조개혁기획단을 해체하면서 공무원 신분의 이들을 금감위에 잔류시키기 위해 그는 금감위에 적용되는 최소 공무원 설치조항을 삭제하고 이에 대한 금감원 직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금감위의 금융감독 정책 기능을 금감원에 위임하는 양해각서(MOU)를 작성했다. 체결의 당사자가 금감위원장과 금감원장이었으니 자신의 왼손과 오른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눈 셈이다. 문제는 이렇게 공무원과 민간의 중도 조직으로 출범한 금융감독 시스템이 점차 공무원 조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금감원 출신인 현경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정책 수립의 단계부터 집행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눈치를 봐야 돼 외압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틀짜기부터 잘못됐습니다. 금융 사고라는 게 감독을 못해서만 생기는 건 아니에요. 지금 체계로는 감독의 객관성, 공정성, 투명성을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감독 차원의 노력엔 이래저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용호 G&G그룹 회장은 지난 7월 초 금감원이 자신에 대한 감시망을 좁혀 오자 금감원을 비난하는 문건을 만들어 정관계에 뿌렸다. 이에 앞서 금감원은 G&G그룹이 비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하고 있다고 보고 밀착 감시에 나섰지만 사건은 결국 곪을 대로 곪은 뒤 터져나왔고, 금감원은 대체 무슨 감시를 했느냐는 비판에 휩싸였다. 현경일 수석연구원은 감독기구는 독립성이 관건이라며 금융감독 선진국인 영국의 경우 우리처럼 감독기구를 통합했지만 독립적인 민간조직(FSA)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공무원 조직화의 표본은 금감위 산하 증권선물위원회 안에 설치되는 조사정책국이다. 30명 규모의 조사정책국이 신설되면 공무원 신분인 금감위의 인력은 1백명 선으로 불어난다. 현재는 63명(파견직원 포함 1백20명). 금융통화위원회 같은 단순한 위원회가 아니라 은행·증권·보험사에 대한 감독 및 감독정책권에 주가 조작 등에 대한 준사법권까지 틀어쥔 규제기관이 되는 것이다. ‘금융부’의 틀을 갖추는 셈이다. 준사법권의 핵심 내용인 현장조사권은 강력한 미국의 SEC(증권거래위원회)도 넘보지 못하는 막강한 권한이다. 이 때문에 벌써부터 금감위의 권한 남용을 우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용호 게이트에서 드러났듯이 금융당국의 고위 간부가 로비 대상이 됐을 때 준사법권이 과연 제대로 발휘될 수 있겠느냐는 시각도 있다.

권력 남용 우려도 색깔이 모호한 공무원과 민간의 혼성 조직보다는 공무원 조직쪽이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있다. 1백% 공무원 조직인 일본의 금융감독청의 경우 효율성이 떨어지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금융감독 체제 쇄신 태스크포스팀장을 맡았던 윤석헌 한림대 교수도 “공무원 조직이든 민간 조직이든 한 극단을 택하라는 말에 공감한다”고 털어놓았다. “한쪽을 택하라면 1백% 민간 조직이 바람직합니다. 1백% 민간조직으로 가기 어렵다면 일반 기업의 이사회 형태의 금감위 모양새도 생각해볼 수 있죠. 다만 기본 뼈대는 민간쪽이 맡고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두 조직을 합쳐야 돼요. 지금은 과도기적인 상황입니다.” 김석원 금감위 대변인은 “금감위-금감원 체제는 차선책으로 만들어진 조직체계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자평했다. 그는 사실 “민간형, 정부형, 혼합형 중 어느 것이 우리 체질에 잘 맞는지는 연륜이 더 쌓여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헌 교수도 “표면적으로 특별히 드러난 이슈는 없다”고 말했다. “뾰족한 솔루션 없이 여전히 불씨를 안고 있지만 두 기관이 서로 상처를 입히지 않고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습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거래소·코스닥 시장 규정 개정에 대한 승인권을 둘러싸고 재정경제부와 기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금감위와 금감원이 뭉쳐야 산다”는 분위기가 자리잡았다고 귀띔했다. 동방금고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랬다. 외부의 충격은 조직 내부의 융화를 강화하는 작용을 한다. 금감원은 국별로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중장기 발전방안을 마련 중이다. 이근영 금감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은 19일 인터뷰에서 “중요한 것은 조직보다 조직 운영의 관행”이라고 말했다. 현행 시스템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이 말은 옳다.

노조 기구통합 추진 주영균 금감원 노조위원장은 “민관 혼합형의 금융감독 시스템을 만들어낸 이 정부로서는 자기 손으로 만들고 자기 손으로 깨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의원 입법, 입법 청원 등을 통해 내년, 안 되면 차기 정부 때라도 두 기구의 통합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최근엔 재경부쪽에서 금감위 소관인 증권 관련 규정 승인권을 회수하는 내용을 증권거래법 개정안에 포함시켜 두 공무원 조직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금감위내 조사정책국 신설에 반대해온 재경부의 이런 기도를 금감위쪽에서는 “모피아의 발호”라고 매도했다. 문제는 정치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고 레임덕이 본격화할 내년이다. 감독기능이 비교적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한 금감원 관계자도 “내년엔 대통령 선거 등 정치적인 이슈가 많아 정부 등 외부의 입김이 세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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