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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제부터 납득시켜라”

“김만제부터 납득시켜라”

“김만제부터 납득시켜라.” 진념 부총리가 재정경제부의 어느 국장에게 던진 말이다. 경제정책을 짤 때 야당 경제팀도 수긍하는 보고서를 들고 오라는 뜻이다. 얼마 전 이런 얘기를 직접 들었다는 전경련 출신의 어느 인사는 경제팀의 풍향 변화를 실감한다고 털어놓았다. 진념 부총리가 경제기획원 차관보 시절 김만제 의원이 장관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힘 센’ 야당의 정책위의장 아닌가. 이쯤 되면 나라 경제팀 수장이 야당의 눈치를 본다는 얘기도 나올 만하다. 사실 요즘 들어선 여당보다 야당 쪽 풍향에 신경을 더 써야 할 판이다. 정권 말기 레임덕과 新여소야대 정국 아래에서 어느새 한나라당이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쥔 탓 아닐까. 그간 외면만 해온 시어머니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정부 경제팀의 ‘눈치 보기’를 잘 보여주는 장면은 또 있다. 지난 11월21일 열린 이른바 첫 ‘야·정(野·政) 정책 간담회’-. 정부측과 한나라당은 이날 대기업 정책 방향 등을 놓고 1시간20여분 동안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눴다. 진념 부총리와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 등이 한나라당을 찾아갔다. 파트너는 김만제 정책위의장 등 정책팀이 중심이었다. 옛날에도 장관들이 야당 쪽에 정책 협조를 요청하는 경우가 있었다. 다만 이번처럼 본격적인 ‘설명회’ 모양새를 갖추진 않았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특히 주제 또한 재벌 규제완화 등 예민한 사안 일색이라 자리의 무게를 더했다. 사실 ‘수(數)의 파워’가 아니더라도 정부와 여당은 야당을 정책 동반자로서 대접할 필요가 있다. 정권마다 그런 ‘의무’을 게을리했을 뿐이다. 정권이 누구 손에 있든 여(與)·야(野)·정(政)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는 게 자연스런 일이다. 더구나 정치에 좌지우지되지 말아야 할 경제문제는 특히 그렇다. 그런 관점에서 한라당이 어떤 경제철학과 정책 목표를 갖고 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카드’를 내놓느냐에 따라 나라 경제의 성장 곡선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집권당이 아닌데도 ‘칼자루’를 쥐고 있다. 한나라당의 경제철학은 마가렛 대처 前 영국 수상이 내걸었던 ‘자유 기업 제도(Free Enterprise System)’ 또는 ‘자유 시장주의’에 가깝다. 민간 부문 특히 기업이 앞장서서 경제를 끌어간다는 논리가 포인트다. 新자유주의나 시장경제주의와는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주창했던 이른바 ‘DJ노믹스’와도 근본 궤를 달리한다. 물론 당에서도 이른바 ‘親기업’을 넘어 ‘親재벌’ 성향이 강하다는 불만 섞인 시각도 있긴 하다. 하지만 기본 노선과 큰 줄기는 정해진 모습이다. 김만제 정책위의장은 “여느 당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지만 경제철학은 거의 동색(同色)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나라당 내건 경제정책의 캐치프레이즈는 한 마디로 ‘고도 성장’이다. 해마다 6∼7%씩은 성장해야 한국 경제를 지탱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물론 한국 경제의 몸집이 어느 정도 커진 만큼 3∼4% 정도가 적정 성장률이고, 그에 맞게 수렴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고도 성장이란 표현이 대선을 앞둔 전략적 슬로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한나라당측은 고도 성장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미국도 지난 10년간 3∼4%씩 커왔고 싱가포르처럼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나라들도 쑥쑥 발전해왔다는 것. 우리라고 못할 게 없다는 얘기다. 한나라당의 밑그림은 대충 이렇다. 정부는 ‘자유 기업 제도’가 뿌리 내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예컨대 ▶글로벌스탠더드에 맞는 경제환경을 마련하고 ▶연구개발 투자를 적극 지원하고 ▶교육제도를 개선해 인재를 공급해야 한다 등이다. 그러면 기업이 투자를 늘릴 장(場)이 열리고 성장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민간이 주도하는 고도 성장으로 관(官) 주도였던 박정희식 고도 성장과 다르다. 이른바 민간기업주도의 성장전략을 구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밑그림을 그리고 덧칠을 하는 한나라당의 경제통은 크게 두 줄기다. 먼저 김만제 정책위의장-이한구 의원-임태희 제2정책조정위원장-유승민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이어지는 정책 라인이 있다. 임태희 의원과 유승민 소장은 한나라당의 ‘젊은 피’면서 경제 브레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 유승민 소장은 이회창 총재의 연설문까지 쓰지만 전면에는 나서지 않는 숨은 브레인이다. 얼마 전 한나라당에 들어온 경제통인 김용환 의원은 한나라당의 공식 정책 자문그룹으로 거듭난 국가혁신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당에서는 김용환 의원이 당의 경제정책 브레인격인 4인방의 다른 생각과 목소리를 조율하는 ‘중화제’ 역할도 기대하고 있다. 여기에 코오롱 그룹에서 잔뼈가 굵은 이상득 의원, 경제기획원 사무관 출신으로 금성사 전무를 지낸 박종근 의원,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을 지낸 황승민 의원,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인 이명박 前 의원 등이 실물통으로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 두 그룹에서 ‘한나라 경제인맥’ 구축도 활발하다. 경제계 시니어 그룹은 김만제 의원이, 주니어 그룹은 유승민 소장이 그리고 중간 그룹은 이한구 의원이 맡아 이총재와 연을 맺어주고 있다. 또 이상득·이명박 의원 형제가 기업인과 이총재의 가교 역할을 맡고 있다. 김만제 의원과 유승민 소장은 학계 인사들과 이총재의 고리역도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세(勢)를 불려가고 있는 한나라당은 마치 이미 집권한 듯한 분위기다. 국회 의석수나 이총재 지지도 등을 보면 무리도 아니다. 더군다나 ‘反 DJ 정서’를 업고 DJ정부가 펴온 재벌정책부터 노동정책까지 하나하나 뒤집을 생각이다. 당장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을 표 대결로 밀어붙였다. 여기에 금융실명제법·국세기본법·국민건강보험법 등 6개 법안도 손을 볼 계획이다. 특히 법인세도 꼭 내린다는 강경 방침이다. 주목할 대목이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야당의 개혁이 이거냐’부터 ‘數의 횡포가 아니냐’는 비난도 세다. 특히 여당과 정부는 ‘여론을 봐가며’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교원 정년 연장 논란을 불러일으킨 교육공무원 법안에 대해 거부권까지 불사한다는 입장이다. 정책 실무선에서도 걱정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변양호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은 “옛날에도 야당이 반대하면 정책 통과가 쉽지 않았다”면서도 “합리적으로 해야지 무리수를 두면 곤란하다”고 밝혔다. 한나라당과 자문 그룹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DJ정부의 실패작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물고 늘어지며 정력을 낭비할 때가 아니라는 것. 이젠 국가 개조 차원의 밑그림을 내놓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나라당 고위 관계자는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정권 교체만 해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까지 했다. 이와 관련 한나라당에서는 이른바 ‘회창 노믹스’를 만들고 있다. ‘회창 노믹스’는 이회창 총재가 어떻게 나라 경제를 이끌어갈 것인가를 보여줄 ‘백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DJ 노믹스가 DJ의 경제관을 담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도 성장을 골자로 어떤 경제정책을 펼지 기본 틀을 선보일 전망이다. 여의도연구소와 국가혁신위원회가 주축이 되서 작업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이르면 올말께 초안은 나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거야 경제팀의 경제 브레인들이 과연 어떤 내용을 담아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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