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은 중국에, 금융은 미국에 밀렸다
제조업은 중국에, 금융은 미국에 밀렸다
-엔저가 상당히 오래 갑니다. 얼마까지 떨어질 것 같습니까? “현재 추세를 고려하면 달러당 1백40엔까지 진행될 것입니다. 정부도 엔저를 방어하겠다는 어떤 정책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촉진하는 느낌도 듭니다. 이는 수출을 늘려서 경제를 살리려는 의도 때문이죠. 하지만 1백40엔대 이하로는 힘들 겁니다. 한국·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경제를 흔들리게 하는 것은 일본으로서도 큰 부담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과 펀더멘탈을 고려할 때 1백35엔대가 적당한 것 같습니다.” -1백35엔이면 흔히 말하는 엔저상태 아닙니까? “불과 4∼5년 전만 하더라도 일본의 문제는 금융 부분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장기불황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의 경쟁력은 확고했죠. 하지만 지금은 중국 경제의 부상으로 제조업이나 서비스업도 갈수록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전처럼 달러당 엔의 환율이 1백10엔일 경우 일본 경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1백35엔도 은행·유통·건설·동산 부문에는 여전히 부담이죠. 이들 업종들이 버티기 위해선 1백40엔 이하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만큼 경쟁력이 없다는 거죠. 하지만 가전·자동차 등 업종은 1백35엔 정도면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당분간 엔화 환율이 예전처럼 1백10∼1백20엔으로 가기는 힘들 겁니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갈 것으로 보십니까? “일단 장기불황을 언제 벗어나냐가 관건입니다. 그러나 그게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당장은 ‘3월 위기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그때 중소은행·중소기업이 무더기 도산하는 일이 발생하면 엔저의 끝이 안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변수를 제외하면 일단 2005년까지는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고이즈미 총리가 ‘2005년이 되면 일본 경제가 다시 성장으로 들어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예측이 정확하다고 보지는 않지만, 일단 그때까지는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 경제를 불황상태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엔저도 그때까지는 유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3월 위기설’이 매년 반복되고 있습니다. “‘3월 위기설’이 반복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경기침체로 새로운 부실채권이 계속 생기기 때문에 위기가 반복되는 것이죠. 경기가 업턴(up-turn)을 하면 부실도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데 다운턴(down-turn)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부실이 계속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 한국의 IMF 때처럼 고금리 정책과 같은 충격요법을 쓰면 일거에 해소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자민당 내부에서도 고금리 정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2년 동안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도 정치인이기 때문에 개혁을 머뭇거리는 겁니다. 고금리 정책이 몰고올 고통 감당하기가 어려운 거죠. 지금 일본은 상당히 꼬여 있습니다. 실업률이 5.6%에 달하고 경기침체가 10년을 넘어섰습니다. 정권을 잃어야 정상인데 고이즈미 총리는 여전히 지지율이 높습니다. 충격요법을 쓰지 못하는 것은 정권을 걸고 충격요법을 쓸 만한 정치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97년 아시아 위기를 전후로 해서 일본에서도 대형합병과 지주회사(holding company) 설립이 많아졌습니다. “지주회사가 일본에서 법적으로 허용된 것은 97년의 일입니다. 1948년 패전 이후 50년 만의 일이죠. 하지만 이때부터 허용된 지주회사 제도는 서양과는 성질이나 동기가 다릅니다. 기업을 위한 지주회사가 아니라 부실화된 은행을 대형화시켜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금융빅뱅을 위해 지주회사를 이용한 셈이죠. 실제로 97년 이후 금융권은 지주회사 형태를 통해 빅4로 재편되었습니다만 기업에는 거의 지주회사 형태가 없습니다. 97년 당시 경제주간지인 동양경제(東洋經濟)가 일반 기업을 상대로 지주회사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60% 이상이 ‘별 관심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99년에 또 설문조사를 했지만 대답은 비슷했습니다. 세제 문제 등 제반 여건이 정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은행이나 NTT 같은 국영기업은 특별법을 만들어 세제상의 혜택과 통합비용을 줄여줬습니다. 한마디로 일본의 지주회사는 은행을 살리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주회사가 은행을 살리는 데 어떻게 유리하다는 것입니까? “비용면에서, 또 문화면에서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은행의 IT화입니다. 인터넷 뱅킹과 전산처리 시스템이 은행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인데, 이는 대형화할 경우 비용대 효과 면에서 효율이 훨씬 좋아집니다. 또 공적자금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은행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보다 대형은행 한 곳에 투입하고 관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입니다. 효과도 좋고요. 이처럼 대형화를 통해서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은 세계 금융시장의 흐름입니다. 서구에서도 은행끼리 지속적인 합병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다만 일본 은행의 경우 워낙 개별 은행의 독립성이 강한 문화가 있어 지주회사 형태를 선호하는 것이죠.” -지주회사를 허용한 지 5∼6년 정도 지났습니다. 일본 내부에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요? “97년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세제상·제도상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주회사를 고려하는 기업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홀딩컴퍼니가 일본 경제를 살렸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기업 경영자에게 또 다른 하나의 선택요소를 줬다는 것은 좋은 점입니다.” -폐혜는 없습니까? “사실 국내 경제 측면에서 보면 폐해가 심각합니다. 일단 은행이 빅4(??)로 재편되면서 기업 입장에서 보면 대출선이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거대 계열에 속하지 못한 중소기업이나 독립기업의 경우 대출이 더 어려워 졌습니다. 대신 대기업 계열에 속한 기업들은 자기 계열사들이 커지기 때문에 여건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공정경쟁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빅4 중 하나인 미즈호홀딩컴퍼니의 경우 일본 상장기업(약 2천5백개)의 60%와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 30%에는 주거래 은행 관계를 가지고 있죠. 한국과는 좀 다르지만 일본도 계열관계로 기업이 얽혀 있기 때문에 일본의 은행들이 지주회사로 재편될 경우 그 밑에 있는 관련 기업들도 덩달아 같은 계열로 들어가게 돼 일본 경제 전체를 몇몇 계열기업들이 장악하는 상태가 됩니다” -한때 한국은 물론 아시아와 세계의 모델이 되었던 일본 경제 모델은 붕괴된 것으로 봐야 합니까? “예, 일단 계열관계로 대표되는 일본 경제모델은 붕괴되고 있습니다. 이는 버블이나 불황 때문이 아닙니다. 이 붕괴는 일본 경제가 한참 잘 나가던 80년대부터 진행되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경제는 글로벌화·IT화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쇼크에 일본이 적응하지 못한 것이 붕괴의 원인이죠. 불황이 이 때문에 온 것입니다.” -아시아 경제 대국 일본이 중국의 부상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제 더 이상 값싸기만 한 공장터가 아닙니다. 예전에는 일본 공장들의 중국 진출이 오로지 코스트만을 생각한 측면이었습니다. 즉, 질은 좀 떨어지지만 비용 매력 때문에 중국 공장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의 성장과 함께 그 자체의 구심력에 의해 일본 기업들이 빨려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중국 제조업의 경쟁력은 일본의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의류뿐 아니라 자동차·전자 부품도 일본에 몰려오고 있습니다. 단순히 부품이나 원료를 조달하는 곳이 아니라 중국 자체가 거대한 경제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비슷한 모양새죠.” -그렇게 보면 미국의 금융과 중국의 제조업이 오늘날 일본을 공격하는 두 가지 위협이 되는군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일본 경제의 계열화 붕괴는 중국의 발전과 관계가 깊습니다.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싸고 좋은 부품이 많이 들어오면서 계열관계로 묶여 있던 기업들이 해체된 측면도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경쟁력이 일본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요.” -앞으로 일본 경제에서는 어떤 기업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떤 형태인지는 분명히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 역사를 볼 때 일본은 외부의 영향을 받을 때 사회·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변화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가 메이지 유신이었고, 두번째가 패전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20세기 말의 IT화와 글로벌화는 세번째의 충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은 진정한 개방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2∼3년 전만 해도 일본 기업에 대한 외국인의 지분은 2∼3%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10%를 넘는 기업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또 외국 기업과 전략적인 제휴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일본 기업은 일본인의 돈과 기술·전략으로 경영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상법과 기업 구조에서 미국식 시스템을 채택한 것입니다. 사외이사 제도나 지주회사 등 미국식 시스템을 통해 기존의 의존·보완적인 계열관계를 경쟁관계로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런 방향에서 일본의 경제의 대안이 찾아질 걸로 보입니다.” |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28일 서울 지하철 9호선 일부구간 '경고 파업' 철회
2‘하늘길도 꽁꽁’ 대설에 항공기 150편 결항
3‘이재명 아파트’도 재건축된다…1기 선도지구 발표
4코스피로 이사준비…에코프로비엠, 이전상장 예비심사 신청
5‘3000억원대 횡령’ 경남은행 중징계….“기존 고객 피해 없어”
6수능 2개 틀려도 서울대 의대 어려워…만점자 10명 안팎 예상
7중부내륙철도 충주-문경 구간 개통..."문경서 수도권까지 90분 걸려"
8경북 서남권에 초대형 복합레저형 관광단지 들어서
9LIG넥스원, 경북 구미에 최첨단 소나 시험시설 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