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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관객 홀린 '마케팅의 유령'

10만 관객 홀린 '마케팅의 유령'

지금이야 누구나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의 성공에 이의를 달지 않지만,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상황은 정반대였다. ‘제작비 1백억원’이라는 소리에 공연계에서는 코웃음을 쳤다. 더구나 그런 대형 프로젝트의 총책임자가 공연과는 무관한 ㈜제미로의 문영주(39) 대표라는 말에 “공연 한 번 안 해본 ‘젊은 놈’이 설치고 다닌다”느니, “한국이 브로드웨이인 줄 착각하고 있다”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이 많았다. 1백억원의 투자면 객석단가(평균 8만5천원)를 감안할 때 13만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야 한다. 연간 공연 관람객이 30만으로 추정되는 한국 시장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높은 가격 때문에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층 관객들이 외면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우려(?) 속에 출발한 ‘유령’은 2월28일 현재 1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3월분 예약관객을 포함하면 13만명이 이미 봤거나 보기를 희망하고 있다. 10만명은 단일공연 최다관객 기록이다. 하지만 기록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애초에 걱정했던 ‘실패’에 대한 부담도 덜었다. ‘재고’도 거의 없다. 지난해 12월2일 첫 공연을 시작한 이후 평균 유료객석 점유율이 93%에 이르기 때문이다. 초대권·할인권이 적지 않은 한국 공연문화를 감안할 때 경이적인 수치라 할 만하다. 제미로 측에선 “이대로만 간다면 25만 관객에 2백억 매출은 무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나라 뮤지컬 시장이 연간 1백40억원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7개월 공연으로 매출 2백억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유령’ 하나로 뮤지컬 관객층을 늘리는 셈이다.

“브로드웨이인 줄 착각하나?” 이 기록적인 공연 비즈니스의 총지휘자 ㈜제미로의 문영주 대표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공연 한 번 안 해본 ‘젊은’ 비즈니스맨이다. 하지만 문대표는 ‘한국이 브로드웨이인 줄 착각 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도 브로드웨이 같은 공연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처럼 ‘유령’은 여러모로 브로드웨이식 공연의 외향을 취하고 있다. 대규모 투자나 장기공연, 장기간에 걸친 마케팅 등은 전에 없던 형태다. 어떻게 보면 ‘오페라의 유령’이 한국 공연계에 끼친 영향은 무대 위보다 무대 밖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주먹구구식 공연문화에 기업의 비즈니스적 모델을 적용해 성공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유령’ 성공은 뭐니 뭐니 해도 검증된 작품 덕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다른 공연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유령’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많이 투자하고 많이 뽑는다 우선 대규모 투자를 들 수 있다. 1백20억원이라는 제작비(마케팅 비용 포함)는 기존 뮤지컬은 물론 블록버스터 영화보다도 규모가 크다.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다는 건 사업하는 데 기본 아니에요?” 공연 기획가 출신이 아닌 비즈니스맨다운 발상이다. 기존의 공연 비즈니스는 흥행 요소가 있는 작품을 선택해 제작비 등 경비를 최대한 줄여 이익을 내는 전략을 추구했다. 흔히 말하는 ‘안전빵’ 공연이다. 이미 성과가 인정된 공연을 들여와 최소 경비를 들여 본전을 뽑는 것이다. 하지만 문대표는 이와 반대로 했다. 좋은 작품을 골라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장기 대관도 하고, 무대도 고치고, 9차례에 걸친 오디션을 통해 주연 배우도 뽑았다. 개막 7개월부터 신문·방송·옥외 광고에 14억원에 달하는 광고비를 쏟아부었다. 일반 공연의 1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마케팅 비용을 포함한 사전제작비만 무려 60억에 달했다. 이 정도 금액이면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도 충분히 만들고 남는 수준이다. 이런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에 기록적인 관객과 수입이 가능했다. “투자를 하지 않는 대신 손해를 안 보는 게 기존 공연의 전략이었다면 ‘유령’은 소비자들에게 상품을 세일즈하듯 한 거죠.” ‘유령’ 공연을 단지 ‘작품’으로만 봤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품’으로 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마케팅 성공이 공연 성공 마케팅에는 더 적극적이었다. 국내 공연 최초로 1년간 마케팅 계획을 수립해 스케줄대로 진행해 왔다. 공연 계약이 체결된 지난해 4월부터 현재까지 계획된 타임 스케줄에 따라 행사나 이벤트·홍보가 진행되고 있다. 제작발표회를 시작으로 9차례에 걸친 오디션·프레스 투어·공연 4개월 전 티켓예매·네티즌 펀드·계열사 프로모션 등 다양한 방법을 썼다. 각 행사 때마다 일반인들의 관심을 끄는 화제거리를 만들었다. 또 버스 한 대를 아예 광고버스로 제작해 서울시를 누비게 했다. 네티즌 펀드의 경우 공연 사상 최고액인 2억5천만원이 공모 첫날 5초 만에 마감되는 대기록을 남겼다. 영화 ‘친구’가 1억 공모에 1분이 걸렸고, 뮤지컬 ‘더 플레이’가 1억 공모에 16분이 걸렸던 것과 비교하면 열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돈만 쏟아부은 것은 아니다. 2001년 3월부터 6월까지 세차례에 걸쳐 전문 조사기관을 통해 시장상황을 예측했다. 그 동안 기업 제품에 대한 다양한 리서치 분석에 비해 전무했던 뮤지컬 시장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직업별·학력별·월평균 가구 소득별 공연관람 빈도와 1회 관람당 티켓 구매수량 예측, 공연물 정보에 대한 입수 경로 등 고객인 관객들의 성향을 파악했다. 또 마케팅 조사를 통해 얻은 ‘유령’에 대한 인지율이나 호감도 등을 바탕으로 시의 적절한 전술을 펼쳤다. 3월 1차 조사 때 ‘유령’에 대한 관람의향이 전체 조사대상에서 23.7%에 불과했던 것이 5월 2차 조사에서는 63.3%로 급속히 오른 것이 좋은 예다. 1차 조사때의 부진에 분발해 그 사이에 제작발표회와 언론 노출 등 인지도를 제고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한 덕이다. “돈 받고 파는 공연은 분명 장사입니다. 장사를 위해 시장조사를 하는 건 사업의 기본에 해당하죠.” 문대표의 설명이다. 이처럼 체계적인 마케팅이나 프로모션은 기업, 그것도 일정 규모 이상이 되는 대기업이 아니면 이루어지기 어렵다. 때문에 공연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RUG에서도 ‘유령’의 공연 계약을 ‘원맨컴퍼니(one man company)’와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십년간 세계 각국에서 공연을 진행해온 RUG가 그 만큼 마케팅을 공연 성패에서 중요한 변수로 두고 있다는 증거다.

수익 내야 좋은 공연 또 온다 마케팅을 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명품전략이었다. 공연이야 지난 15년간 13개 국가에서 검증된 명품이다. 문제는 관객. 할인권이나 초대권을 일절 금지시킨 것도 고객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제대로 된 공연을 원하는 수요층이 있고, 또 거기에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명품전략을 폈다. 제미로의 모기업인 동양제과의 회장과 사장에게도 초대권을 보내지 않았다. 할인권이나 초대권을 주지 않는 것은 의류로 치면 바겐세일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세일 브랜드가 돼야 제 값 지불하고 산 사람이 억울하지 않듯 할인권이나 초대권이 없어야 돈을 주고 본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행적으로 기자들에게 제공하는 초대권도 ‘유령’에는 없었다. 때문에 동양제과 홍보실이나 제미로 홍보실에는 기자들의 불만 섞인 소리가 종종 들어왔다. “으레 공연표의 10∼20%는 초대권으로 빼놓는 게 한국의 관행입니다. 클래식이나 오페라·발레 같은 공연은 관람객 중 절반이 공짜 손님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공연은 사업으로선 별 가치가 없죠. 공연하는 것 자체에 만족하는 공연은 하기 싫었거든요.” 문대표는 초대권과 할인권이 없어야 공연주최 측에서 수익을 낼 수 있고, 또 수익을 내야 더 좋은 공연을 한국에 들여올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사업은 수익을 내서 재투자를 해야 번창합니다. 공연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공연을 해서 수익을 내면 더 좋은 공연을 들여올 수 있습니다.” 초대권 없이도 ‘유령’은 3개월 내내 90% 이상의 좌석 점유율을 기록했다.

전문가에게 맡겨라 이처럼 문대표가 ‘유령’의 경영적 측면을 총괄하면서도 작품 자체에 대해선 설도윤 제작총감독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설감독은 ‘오페라의 유령’을 한국에 들여오기로 마음먹고 기획·투지유치·제작 등 전 단계를 총괄해 무대 위에 올린 주인공이다. RUG와의 실무적 협상도 그가 총괄했다. 81년 뮤지컬 에비타로 데뷔한 후 20년 동안 뮤지컬 배우·안무·감독 등 전 분야를 섭렵한 한국 뮤지컬 대표주자다. 당연히 뮤지컬에 관한 문제는 설감독에게 맡겼다. 그가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문화산업에 진출할 때 흔히 겪게 되는 ‘비전문가의 전문가 지배’라는 문제를 미연에 피하기 위한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설감독이, 무대 밖에서는 문대표’가 일을 책임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분업 형태라고 생각한 것이다. “요즘은 일반 기업에서도 사장 한 사람이 모든 분야를 다 결정하지 않습니다. 삼성만 해도 부문대표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물며 뮤지컬의 문외한인 제가 무대에 올라가서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공연이 되겠어요?” 문대표가 설명한 나름대로의 프로듀서 시스템이다. 기업처럼 각자의 역할을 나누고 그에 따라 조직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기술제휴·컨소시엄으로 위험 분산 아무리 철저하게 조사해 공연을 시작하더라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있기 마련이다. “공연 시작할 때까지 조마조마했죠. 만약에 실패하면 수십억 날리고, 젊은 혈기에 일을 벌인 것밖에 안 되잖아요?” 사업가인 그가 취한 리스크 분산은 두 가지. 하나는 기술제휴. RUG 측에서 공연 라이선스뿐 아니라 무대·세트·의상·연기 지도·마케팅 등 공연에 필요한 각 분야를 직접 가지고 왔다. “일종의 기술제휴인 셈입니다. 상품을 처음 만들 때 선진국과 기술제휴하면 실패할 확률이 적은 것과 같은 이치죠.” 물론 이번에 전수받은 기술은 모두 제미로의 자산이 된다. 일거에 세계 수준의 공연 노하우를 가지게 되는 셈. 다른 하나는 컨소시엄. 개인적으로는 ‘유령’의 성공에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지만 경영자로선 만의 하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제미로가 20억원, 코리아픽처스에서 20억원, 산은캐피탈에서 13억원 등을 비롯, 기보캐피털·SBS 등에서도 투자를 받아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외부투자로 해결했다. 실패할 경우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서다. 대신 투자한 비율만큼 수익도 분배한다. 일단 올 7월에 극장 대관 계약이 끝나면 ‘오페라의 유령’도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그 중간에도 월간 객석 점유율이 70% 이하로 떨어지면 공연은 막을 내릴 수 있지만, 현재 상황으로 봐선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장기공연을 하고 싶어도 극장이 없어서 못하는 게 현실이다. 공연사업은 무대·세트 등 초기 투자비용이 많기 때문에 장기 공연을 할수록 이익이 늘어 난다. ‘유령’의 경우도 관객 10만 관객을 돌파한 이후의 매출은 인건비 정도를 빼면 거의 다 수익이 된다. “공연이 사업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선 장기 공연을 할 수 있는 전용극장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일주일, 한 달 만에 공연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선 아무리 좋은 작품을 올려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미로는 공연단체나 기업 등과 컨소시엄 형태로 서울에 뮤지컬 전용 극장 건립을 추진 중이다. 이미 작업이 상당히 진행돼 부지를 물색하는 단계에 와 있다. 또 ‘유령’ 이후에 무대에 올릴 브로드웨이 공연을 탐색하고 있다. ‘유령’ 성공 덕에 브로드웨이 쪽에서도 제미로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상을 제의하고 있는 상태다.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공연을 3∼4년 정도 더 한 뒤 본격적인 한국의 창작 작품을 무대에 올려 세계에 수출하는 것이 문대표의 포부다. “외국 작품 수입해서 돈 좀 버는 게 제미로의 목표가 아닙니다. 라이선스 공연을 통해 공연 노하우를 배워서 3∼4년 뒤에는 우리 창작극을 브로드웨이에 올리는 게 진짜 목표죠.” 이미 문대표는 브로드웨이의 연출가들과 창작작품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벌써 새로운 무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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