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대권도전사/기업인 정치실험 모조리 실패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박태준 전 포철회장,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왼쪽부터) | 무소속 정몽준의원이 부친에 이어 대권도전에 나설 움직임이다. 세계축구협회(FIFA) 부회장·대한축구협회장 등으로 국제 스포츠계에 널리 알려진 정몽준 의원은 ‘월드컵 4강 신화’의 인기를 바탕으로 대권도전에 나설 참이다. 92년 부친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대권 때 이미 국민당을 만들어 정당을 운영해본 경험도 있다. 재벌2세로서 자금동원 능력도 있다. 여차하면 개인재산을 팔면 대권도전에 필요한 자금은 별 문제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축구협회와 국민당 운영 등을 통해 조직관리·운영 능력도 있다. 대권도전은 기정사실로 여겨지고 있고 여권 중심에서 불붙고 있는 신당에 참여하느냐, 독자 신당을 만드느냐의 선택만 남아 있는 것 같다. 정몽준 의원의 월드컵 4강 신화가 올 연말 대통령선거전에서도 다시 한번 재현될 수 있을까? 해방 이후 굴절된 한국 정치사에서 기업인 출신의 현실정치 참여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개인의 정치적 욕망실현을 위한 것이었든, 기업의 방패막이 등을 위해서였든 국회의원의 10∼20%는 늘 기업인 출신들로 채워져 왔다. 그렇지만 과거 기업인 출신 유명 정치인들은 많은 굴곡을 겪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은 물론 70년대 공화당 항명파동으로 정치권에서 밀려난 김석원 쌍용양회 회장의 선친 고 김성곤 쌍용 회장·80년대에 침몰한 윤석민 전 대한선주 회장 등은 비운의 정치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쌍용양회 김석원 회장은 선친이 “절대 정치를 하지 말라”고 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 발을 들여놨다가 국회의원 임기 절반도 못 채우고 기업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정치와 기업경영을 병행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현실정치의 벽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정치참여는 처음에는 순조로운 듯했다. 기성 정치에 환멸을 느낀 유권자들이 한국 최대 기업을 창업한 정주영씨의 등장에 처음에는 신선함과 호기심으로 표를 몰아주었다. 92년 국민당을 창당하고 처음 치룬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은 30석을 훌쩍 넘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 여세를 몰아 정주영씨는 92년 말 대권도전에 나섰다. 9백만명의 당원을 확보했다고 큰소리 치며 당원들이 1표씩만 찍어도 당선은 확실하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자 정주영씨는 16%(3백80만표)를 조금 넘는 표를 얻는 데 그쳐 김영삼·김대중에 이어 3등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현대그룹을 총동원해 끌어모은 당원들도 정주영씨에게 표를 안 준 것이었다. 93년 2월 정계은퇴를 선언할 당시 정주영씨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정치는 정치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 내가 정치를 너무 몰랐던 것 같다. 나는 9백만 당원이 나를 찍어주면 대통령에 당선될 줄 알았다.” 기업적 사고와 문화가 우리 정치토양에 뿌리를 내릴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주영씨는 현실정치의 벽을 실감하고 대선이 끝난 후 3개월 만에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그 후유증은 엄청났다. 정주영씨가 정치참여를 선언했던 92년부터 현대그룹은 정부의 직·간접적인 제재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지원이 중단되고 각종 인허가도 지연됐으며, 특별세무조사도 받았다. 특히 YS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정주영씨는 범죄자(선거법 위반혐의 등)로 몰려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는 등 정신적 고통이 심했다. 현대그룹은 93년 새 정부 들어서면서 현대중공업 등 5개사를 기업공개키로 하고 필요한 절차를 마쳤으나, 최종 허가가 나지 않아 등록을 못했다. 이들 5개사 중 현대중공업 등 3개사의 장외등록마저 보류됐다. 90년·91년 2년 연속 1천억원 이상을 배정받았던 산업은행의 설비자금도 92년부터는 일절 배정받지 못하는 등 새 정부의 현대그룹 옥죄기는 계속되었다. 기업의 가장 큰 자산인 인재의 손실도 컸다. 이현대 현대석유화학 사장·음용기 현재목재 사장 등 20명이 넘는 현대 CEO와 고위임원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수배되었다. 4백명의 인력을 국민당에 파견했던 현대그룹은 선거 후 대부분 다시 회사로 복귀시켰으나, 정치바람으로 깊이 파인 골은 즉각 메워지지 않고 일손도 잡히지 않았다. 당시 당원을 모집한다면서 현대는 해외주재 인력도 최소인력만 남기고 전원 귀국명령을 내릴 정도로 대선전에 몰두했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도 몇차례 대선출마 의사를 비쳤다가 번복하면서 그때마다 대우그룹이 술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주영씨는 그룹이 휘청거리고 자신이 실형을 선고받는 등 압박을 가해오자 대선이 끝난 후 3개월도 채 안 돼 YS정부에 백기를 들고 투항하기에 이르렀다. 10년 전 이렇듯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던 현대가문의 2세 정몽준 의원이 다시 대권도전에 나선다. 물론 지금은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월드컵의 인기 상승세를 바탕으로 국민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부친의 실패를 거울 삼아 정의원이 과연 부와 권력을 동시에 거머쥐게 될지 관심거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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