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간 기술이전…2조5천억원 효과
| 이정민 박사가 기술을 이전해 상품화된 것은 품목당 10억원에서 7백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 “그동안 기술 이전한 제품들의 매출액이 어림잡아 2조5천억원은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24년간 쓴 연구비가 1백50억원 남짓 하니 꽤 남는 장사를 한 것 아닙니까?" ‘불도저’ 별명을 갖고 있는 이정민(55) 한국화학연구원 박사의 첫인상은 맘좋은 아저씨였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연구소 기술의 산업체 이전 ‘야전 사령관’으로 꼽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세탁제인 ‘옥시크린’을 비롯, 흡착제로 쓰이는 활성탄소, 친환경 세제 소재인 지오라이트 등의 기술을 기업체에 제공, 연간 수천억원의 매출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화학공업의 특성상, 실험실 연구결과는 파일럿 실험을 거쳐 생산공정 설계와 시운전까지 기업체 기술자들과 현장에서 뛰며 기술의 병목현상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기술이전이 될 수밖에 없다. 한 아이템의 기술이전에 걸리는 시간은 짧아도 3∼4년, 길면 7∼8년까지 걸린다. 단순한 연구개발 결과물을 기업에 넘기면 끝나는 작업이 아니라 기업의 현장식구들과 함께 호흡하지 않으면 힘든 작업이다. 이박사가 대덕연구단지 화학연구원으로 옮겨온 것은 지난 79년 8월. ‘연봉 두배’라는 당근도 있었지만 ‘연구결과를 현장에 직접 적용해 보겠다’는 의지가 그를 전남대 화공학과 교수 자리보다 연구원을 택하도록 했다. ‘실험실 화학’ 전공의 해외유치 과학자들이 책임을 맡고 있던 당시에 화공학을 전공한 이박사는 ‘별종’ 취급을 받았다. 이박사는 시험생산시설동에 발령받는 것으로 연구소 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책상 하나만 덜렁 있더라고요. 월급이야 꼬박 나왔지만 연구비는 보따리 장사를 해서 충당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전국 기업들을 뒤지며 연구개발자금을 따내기 위해 세일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공부산하 연구기관으로 갓 출발한 화학연구원이 제대로 된 연구 지원을 한다는 것을 기대한 것은 애당초 무리였지만, 이박사는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렸고, 새로운 분야인 만큼 뛰는 만큼 얻을 것이 많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팔았던 발품 덕택에 LG·한화 등 대기업은 물론이고 라이온케미컬 등 중소 화학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기업치고 이박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그의 돈 되는 첫 연구용역 계약은 81년 늦봄 온양 온천 탕 속에서 이뤄졌다. “신문을 보니 삼천리에서 갈탄을 수입해 조개탄으로 만들어 학교 연로로 공급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당시에 톤당 5만원가량에 팔렸는데 조개탄 대신 ‘흡착제’를 만들면 2백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무작정 회사를 찾아갔지요.” 우여곡절 끝에 당시 이장균 회장 앞에서 ‘흡착제를 만들자’는 연구프로젝트 제안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안 본사로 올라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약속 장소는 온양의 한 온천탕. 당시 화학연구원장이었던 채영복 원장과 이박사, 회사 관계자가 탕 안에 함께 들어갔다. 첫 제안인 만큼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이박사. 우리 남자끼리 홀딱 벗고 얘기합시다. 정말 돈 되는 연구요?” “됩니다.” 삼천리는 이박사 연구에 투자한 덕택에 연료용으로 수입한 갈탄으로 활성탄을 만드는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고 연간 1백억원의 매출을 올리게 됐다. 한번 물꼬가 터지자 연구 의뢰가 줄을 이었다. 24년간의 연구원 생활을 하며 기업에 기술이전을 해 상품이 나온 사례는 총 21건. 지금도 기술을 이전한 제품들은 한 품목당 작게는 10억에서 7백억원까지 매출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이박사는 자신이 낳은 작품중 가장 보람있는 것으로 친환경세제를 만드는 데 필수품으로 꼽히는 지오라이트(zeolite)소재를 국산화하고 일본으로 역수출한 건을 꼽는다.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하이타이 등 분말세제는 수질오염의 주범으로 꼽힌 ‘인산염’을 썼는데,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일본 등에서 소재를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제품이지만 일본 소재를 팔아주는 꼴이었던 셈이다. ‘소재를 만들지 못하면 모든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했던 이박사는 애경산업·LG화학(당시 럭키화학)·동양화학 등을 찾아다니며 ‘직접 만드는 연구를 하자’며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박사를 믿고 선뜻 문을 열어준 연구소는 없었다. 다행히 화약사업의 성장 한계성을 깨닫고 사업다각화를 모색하던 한영자 삼양화학 회장을 만나면서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한회장 앞에서 연구제안을 했는데, 저녁에 곧바로 ‘지오라이트를 만들어 봅시다’는 전화가 왔다. 82년부터 이박사는 삼양화학팀과 합류해 파이럿공정 실험·생산공장 설계·시운전까지 함께 땀을 흘렸다.초기 1년 반 동안은 제품이 안정화되지 못해 공장 앞마당에 재고만 잔뜩 쌓였다. 혼자서 끙끙 속앓이를 했지만 한회장에게 ‘그래도 계속 시운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첫 제품이 생산되는 날 현장을 방문한 한회장과 흰 가루를 덮어쓰며 축제를 벌였다. 지오라이트는 지금은 매년 3백억원 규모가 일본 가오(花王)에 수출되고 있다. IMF로 삼양화학 그룹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3천만 달러어치를 수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기도 했고, 지금은 전북 익산에 담배필터 소재를 만드는 공장까지 세웠다. 현장을 직접 뛰며 일을 벌이는데다 이박사는 특유의 컬컬함 때문에 ‘연구원’이라기보다는 ‘현장 엔지니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화학연구원 내에서도 연구실 선후배는 말할 것도 없고 수위 아저씨까지 화학연구원 사람치고 이박사와 소주 한잔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다. “진주 빛깔을 내는 안료, LNG 저장 시설 흡착제, 밧데리 소재…. 연구비의 10배 이상 부가가치를 낼 수 있는 아이템은 무궁무진합니다.” 이박사는 2년 9개월간 선임연구부장을 맡아 연구원 살림을 챙기다 올해 연구실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 그에게 2003년은 새로운 도전을 위한 한 해가 될 전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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