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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경쟁.덤핑...IT시장 다 죽인다

저가 경쟁.덤핑...IT시장 다 죽인다

일러스트 김회룡
건강보험관리공단이 지난해 말 발주한 건강보험 종합관리 시스템 프로젝트에서는 S사가 입찰 적정가의 10억원을 밑도는 입찰가를 써내 사업권을 따냈다. 그룹웨어와 하드웨어 장비가 포함된 입찰에서 S사는 자사의 그룹웨어 가격에 사실상 ‘0원’을 적용했다. 대한지적공사가 발주한 4억원대 프로젝트에서는 1단계 기술평가에서 앞선 H사가 2단계 가격 입찰에서 경쟁사가 2억원 초반대로 입찰가를 써내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동일 수준의 가격을 제시, 사업권을 획득했다. 국방분야 IT 프로젝트에는 최근 기형적인 경쟁 양상이 벌어지면서 소위 ‘절반치기’ ‘최하 가격 긁기’의 사례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방부의 공군 주전산기체계 도입 사업에서는 8개의 시스템통합(SI) 업체가 참여해 입찰 경쟁을 벌인 결과 1백16억원 사업 예산의 65% 수준인 약 77억원을 써낸 L사가 수주했다. 12월에 있었던 국방 군수통합 정보체계 개념 연구사업에서는 총 1백점 중 97점이 배당된 기술평가에서 앞선 L컨소시엄이 3점에 불과한 2차 가격 입찰에서 책정 예산가(10억5천만원)의 절반인 5억3천만원을 제시한 S컨소시엄에 사업권을 넘겨주는 일이 발생했다. L사는 9억원가량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말 강원랜드의 카지노 정보시스템 구축사업에서도 적정 예상가 1백37억원의 50% 수준인 70억원을 입찰 희망가로 써낸 H사가 사업을 수주했다. 대한투자신탁이 발주한 재해복구(DR)센터 구축사업에서 I사는 발주사의 예상 사업규모인 18억∼20억원에훨씬 못 미치는 6억원에 입찰, 사업을 수주했다. 50% 가격 수준의 낙찰은 그나마 형편이 낳은 편이다. 대한투자신탁이 발주한 재해복구(DR)센터 구축사업에서 I사는 발주사의 예상 사업규모인 18∼20억원에훨씬 못 미치는 6억원에 입찰해 사업을 수주했고, SI업체인 P사는 국방부 메가센터 컨설팅 사업에 입찰가 10원을 써낸 바 있다.

인수위 ‘최저가 낙찰제’ 논란 IT 업계의 ‘덤핑 출혈 경쟁’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입찰가 1원으로 사업권을 따내던 건설업계의 옛 구태가 21세기 IT 시장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IT 시장에서 저가 출혈 경쟁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으로 ‘최저가 낙찰제’가 지목된 지는 오래다. 하지만 업계와 정책당국의 해결 의지 부족으로 여전히 ‘논란의 대상’으로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이제는 논란의 차원을 넘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라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최적가 낙찰제는 최근 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정부 공공사업에 대한 최저가 낙찰제 확대 의사를 밝히면서 논란의 중심으로 재차 부상하고 있다. 물론 인수위의 방침은 공공분야 건설 공사 중심의 사업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최저가 낙찰제 확대가 새 정부의 정책으로 확정될 경우 건설산업의 입찰 과정과 유사한 IT 업계, 특히 공공 부문 프로젝트에까지 확대 적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데 IT 업계 종사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IT 시장의 프로젝트 입찰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된 최적가 낙찰제는 사업자간 저가 수주경쟁을 촉발시키면서 채산성 악화·과당 경쟁·불공정 거래 등의 원인이 돼 왔다. 불량 마진을 담보로 한 수주 후에는 수익성 보전을 위한 개발 비용과 인력 축소가 이어졌고, 결국 부실 프로젝트가 초래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업계 수익성 악화의 원흉으로 최저가 낙찰제도를 포함한 현행 입찰 방식의 문제점이 공론화된 것은 이미 오랜 얘기다. 업계 자정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IT 경기 악화가 장기화되면서 공염불이 됐다. 오히려 출혈 저가 경쟁이 IT 산업 전 분야로 확대됐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지난해 10월 네트워크연구조합(이사장 김선배)이 IT 업계 종사자 2백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결과 “최저가 낙찰제가 국내 네트워크 산업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과 무관치 않다. 특히 공공분야 IT 프로젝트 입찰 시장은 상도(商道)가 사라진 이전투구 현장 그 자체다. 적정 입찰가의 50%를 밑도는 낙찰은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시스템통합(SI) 업체의 고위 관계자는 “공공 분야 입찰 시장에서는 1원, 10원 써내는 업체가 나올 때 그나마 뉴스가 되는 실정”이라는 말로 현 IT 프로젝트의 입찰 시장의 혼탁함을 대신했다.

제살 깍아 먹기식 입찰방식 그렇다면 업계 모두가 비난하는 최저가 낙찰제가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최저가 낙찰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시장 자율경제 원리에 부합하는 제도며, 특히 예산 절감을 원하는 발주처 입장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제도라는 데 이견은 없다.문제는 최저가 낙찰제를 운용하는 방식과 인식에 있다. 현재 IT 시장의 프로젝트는 대부분 2단계 분리입찰 방식을 택하고 있다. 1차 기술평가와 2차 가격 평가의 종합 점수를 통해 수주 업체를 선정한다. 대략 85:15 정도의 비율이 관행이다. 수치상으로는 기술평가의 비율이 높지만 사실상 수주 업체 선정은 가격 평가에서 이뤄지는 것이 정설이다. 앞서 밝힌 국방 군수통합 정보체계 개념사업에서 기술평가 결과 경쟁사에 뒤진 S사가 가격 평가를 통해 사업자로 선정된 것이 좋은 예다. S사는 사업 적정가의 50% 미만의 입찰가를 써냈다. 업계에서는 이를 속칭 ‘가격을 긁는다’고 표현한다. “기술과 프로젝트 운용 능력이 좋아도 가격을 긁어대는 데는 장사 없다”는 업계 영업 관계자들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그나마 최근에는 가격과 기술평가를 동시에 산출하는 종합평가제 도입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여전히 가격평가가 낙찰자 선정의 절대 기준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술평가 역시 투명성과 공개성이 보장되지 않고, 실무에 약한 대학 교수진들에 의한 외부 평가가 많아 업계의 불신도는 이미 위험 수위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사업 수주를 위한 영업력은 가격 평가에 맞춰지고, 로비와 불공정의 씨앗을 양산하게 된다. 제살을 깍아 얻어낸 사업권을 가지고 수익을 맞추기 위해 업체는 무리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 S사의 개발팀 관계자는 “최적가 낙찰제로 인해 낙찰업체는 수익을 내기 위해 개발일자와 인건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면서 “이렇게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품질 저하는 불가피하고, 개발자들의 법정근로시간 준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폐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적자를 감수하는 대형 IT 기업간 과당 경쟁 속에서 기술력은 있지만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 업체들은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한다. 때문에 대형 SI기업과의 컨소시엄 참여에 사력(社力)이 집중되면서 기술 개발 여력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열쇠는 업계 손에 최저가 낙찰제로 인한 시장 파행이 계속되면서 최근 이에 대한 개선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최저가 낙찰제 파행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대형 IT 업체를 중심으로 자정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과당 출혈 경쟁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대형 SI업체의 CEO들이 잇따라 관련 세미나와 외부 기고를 통해 최저가 낙찰제 개선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최저가 낙찰제 대신 적정가 또는 최적가 낙찰 방식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는 데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한 우선 과제로는 입찰 선정 기준에서 가격평가 비율 대폭 축소와 입찰가격 하한선 제도가 제시되고 있다. 아울러 공정하고 엄격한 기술평가 시행을 위한 국책 및 민간 평가 기관의 확대, 입찰사전자격심사제 도입, 덤핑 수주에 대한 법적 제재 강화, 공공 프로젝트의 중소 업체 참여 보장 제도, 감사 기관의 탄력적 운용, 입찰 평가의 외부 공개, 해외 선진 입찰 방식의 벤치마킹 등 과제 해결을 위한 산학연정 차원의 공동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KT가 올해부터 최저가 낙찰제 대신 총소유비용(TCO) 개념을 도입한 목표가 입찰방식을 도입하기로 발표했고, 정통부 역시 공공 프로젝트 저가 수주 방지를 위한 ‘국가를 당자자로 하는 계약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는 등 IT 업계 전체에 최저가 낙찰제 개선 동조 움직임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중요한 것은 최근의 업계 자정 노력이 또다시 단발성 탁상공론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IT 시장의 최저가 낙찰제 개선 노력이 이어졌지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SI 프로젝트의 평균 수준 금액은 발주처 제시 가격의 52%선에 불과했다. 결국 해결의 열쇠는 업계 스스로가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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